2023. 4. 6. 21:39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의 낳은 아이가 정녕 죽으리이다 하고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아의 처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 지라' (삼하12:13~15)
기독교의 인간론에서 중요한 특징은 죄의 문제이다. 성경에는 인간의 죄에 대한 지적들이 많다. 이미 창세기에서 아담과 이브가 처음 죄를 범했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형이 동생을 살해한 이야기, 노아 시대에 와서는 하나님이 모든 인간들을 쓸어버릴 정도로 부패했던 세상 이야기 등, 모두가 인간이 불가피한 죄인들임을 증거 하는 이야기들이다. 무엇보다 십자가 사건은 인간이 죄로부터 자유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처형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십자가는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의 사건이었다.
인간의 죄에 대한 성경적 증거들을 차지하고라도 우리 내면을 들여다보면 인간이 죄된 속물임을 부인할 수 없다. 대명천지의 오늘날에도 노골적으로, 또는 은밀하게 불의와 폭력의 악순환이 만연해 있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세상이다. 나 자신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내외적으로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결국 인간은 죄인이라는 지적은 성경적으로나 인간 스스로의 성찰로나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은 죄보다는 그 죄에 대한 용서와 은혜에 근거해서 인간을 조명한다. 그래서 바울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롬5:20)고 말했나 보다. 죄와 은총은 서로 대립하는 힘이 아니다. 결국 죄는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능력을 잃는다. 그래서 죄보다 은혜와 해방이 상위 개념임에 기초하여 성경을 읽어야 하는 것이다.
1. 용서의 문제
성경에는 ‘죄를 고백하면 용서를 받고 죄가 사해져 불의에서 깨끗해지리라’ (요일1:9) 하였다. 회개로서 죄의 용서, 그리고 믿고 구원받은 우리는 어떤가? 삶에서 나타나는 죄의 모습과 성향에 어떻게 반응하고 대처하는가? 다윗이라는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가운데 왕이 되었다. 그런 그가 죄를 지었다. 남의 부인과 간통을 하였고 그 결과 그녀가 임신을 하였다. 다윗은 자기 죄가 드러날 것을 염려하여 전장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우는 그녀의 남편을 죽게 하였다. 그리고는 당당히 그녀를 자기 여자로 들였다. 그렇게 다윗은 간음죄, 거기에다가 그것을 덮기 위해 살인교사까지 지었으면서 이를 조작하여 덮었고 스스로를 합리화하였다.. 그러나 스스로를 속여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었다. 이미 하나님이 그 모든 과정을 다 지켜보고 있었다. 그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서 지적하였다. “네가 나를 업신여겼다. 나의 말을 우습게 여겼다.”
이 책망에 다윗은 자백하고 말았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자백하는 다윗을 용서해 주었다. 하지만 단서를 달았다. “네가 낳은 아이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죄를 고백하면 용서 다 받는다고 했는데 왜 이런 처벌을 받는가?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죄와 용서에 대해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먼저, 용서의 일차적인 단계는 죄를 단순하게 고백함이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다.” 다윗은 어떤 핑계, 무슨 구실도 내놓지 않았다. 인간의 약함을 내세우지도 않았고 그저 사실을 인정하였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란 죄짓지 않는 완벽한 인간을 뜻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토를 달지 않고 받아들이는 자세를 말한다. 다윗왕의 이 같은 자세는 전왕 사울과 비교된다. 사울왕은 사무엘의 지적을 받을 때 이런저런 변명을 했었다.(삼상13장, 15장) 반면, 다윗은 선지자를 통해서 들은 하나님의 책망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용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이고 전적으로 무상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이란 용서받음에 익숙해지면서 점차 용서의 감격이 식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용서는 당신의 아픔을 동반한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예수의 십자가였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용서에는 우리 죄의 깊이만큼이나 그분의 고통 또한 수반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라 하여 죄의 흔적을 없애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용서는 해주었지만 그 사함은 상응하는 율법적인 적용을 면제받는 것이지 공의의 하나님 앞에 심판적 조치나 결과까지 면제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면 죄는 하나님의 그 용서는 언제 어떻게 주어지는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다. 즉석에서 용서하기도 하고 일정 고통을 겪게 하신 후에 용서하기도 한다. 그리고 용서의 범위도 하나님의 주권이다. '내가 이렇게 기도했으니 당연히 내 뜻대로 하나님이 용서하라'는 요구를 우리는 할 수 없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이 준 은혜로 용서받으며 살아갈 뿐이다.
2. 용서를 구하는 인간
다윗은 아기가 죽을병에 들자 하나님 앞에서 울며 7일 동안 금식으로 기도했었다. 죽어가는 자식을 둔 아비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기도의 결과는 자신의 바람과는 다르게 아기의 죽음으로 끝났다. 하지만 다윗은 상심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고 따지지도 않았다. 하나님이 정한 용서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이내 평상심을 되찾았다. 그리고는 의관을 정제한 뒤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7일 동안 금했던 음식까지 먹었다. 인간의 죄에 대한 용서는 하나님의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요 하나님의 은혜임을 그는 일찍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데 주기도문의 ‘우리의 죄’가 복수이다. 구체적인 죄의 행위들을 모두 사해 달라는 요구인 것이다. 게다가 마치 우리가 하나님의 모범이 되는 것처럼 기술되어 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을 보고 우리의 죄를 사해 달라’는 말처럼 읽힌다.. 여기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는 완료형이다.
요아킴에 따르면, 여기 쓰인 헬라어의 ‘아페카멘’을 아람어로 읽으면 동시적 완료가 된다고 한다. 복잡한 말이다. 왜 신학자들은 아리송한 구절들을 아람어로 번역했을까? 예수가 당시 사용하던 언어가 아람어였기 때문이다. 예수가 아람어로 말한 것을 헬라어로 옮겨 놓은 것, 그러니 그것을 다시 아람어로 옮겨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아람어로 읽어보면 ‘하나님,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동시에 우리도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하겠습니다’는 뜻이 된다. 즉 하나님께 죄 용서를 구하는 내가 누구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면 ‘하나님, 내가 누구를 용서하고 있지 못하는 그 죄만 빼놓고 나머지 죄들만 용서해 주소서’ 이런 말이다. 참 기가 막히는 기도이다.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자들은 자신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주기도문 바로 다음 구절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 다소 무서운 말씀이다.
유사한 말씀이 마태복음 다른 곳에도 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18:35) 이 말씀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비유에서 나온 말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왕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자가 갚을 능력이 없어 왕이 탕감을 해주고 놓아주었다. 당시 갈릴리와 베레아 주민전체가 로마정부에 내는 1년치 세금이 이백 달란트였으니 만 달란트는 상상할 수도 없는 액수였다. 그러니 절대 값을 수 없는 금액임을 상징한다. 그렇게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자가 나가다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났는데 빚을 갚지 않는다고 잡아 옥에 가두어 버렸다. 이에 왕이 그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았던 자를 다시 잡아다가 ‘내가 너에게 그 큰 금액을 탕감해 주었는데 너는 겨우 백 데나리온에 사람을 옥에 넣었느냐’ 하며 그 갚을 수 없는 금액인 일만 달란트를 다 갚을 때까지 옥에 넣어 버렸다. 그 말은 영원한 지옥에 던져 버렸다는 뜻이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는다.
3. 용서를 말할 수 있는 은혜
보편적 인간들은 생각한다. ‘난 그렇게 마음이 넓은 사람이 아니다’ 사실이다. 그러면 기도는 해야 하고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은 안 되는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하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우리는 예수의 삶이 내 삶이 되었고 내 삶이 예수의 삶으로 전가되었음을 믿는다. 그래서 겟세마네의 예수 기도에도 우리 또한 동참하였고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었으며 그 부활에도 함께 하였다. 그 예수가 누군가를 용서할 때 나도 그 안에 있었던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할 때 그 예수 안에 우리가 있었다. 비룩 지금도 여전히 이 모양이지만 우리는 예수로서 용서한 자들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드릴 자격이 있다. “우리 죄를 용서하소서. 우리도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겠습니다.” 라고 기도하면서 어떻게 내가 그를 용서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당당히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게 되었는지를 곱씹으며 감사할 뿐이다.
그 감사에서 진짜 용서가 점차 나온다. 그러니 용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예수의 용서를 따라 용서하며 산다. 용서를 청원하는 동시에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함은 주기도문이 청원인 동시에 서약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며 ‘그 나라 통치에 순종하겠습니다’ 하고 서약함이고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하면서 ‘나도 내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하며 살겠습니다’ 하고 서약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점차적으로 예수가 요구하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천국 시민의 수준으로 만들어져 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31:31-34)
결론
우리는 이 땅의 양식이 아닌 하늘의 양식으로 산다.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자들이기에 이 땅의 것으로 살지 않고 하늘이 주는 양식으로 산다. 그러기에 아담에게 내렸던 저주에서 이미 자유하였다. 그러기에 용서할 수 있는 자들로서 하나님께 당당히 ‘나도 이렇게 용서하는 자가 되었으니 내 죄도 확실히 용서되었음을 확신합니다.’ 하고 기도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그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마18: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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