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 24. 21:34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창45:4~8)
한 아버지에게 여러 아들들이 있었다. 그 아버지는 그 아들들 중에서도 가장 사랑했던 여인에게서 얻은 작은 아들을 더 사랑하였다. 그에게 특별한 옷을 입히고 그의 말에 더 관심을 기울이곤 하였다. 이를 시기한 다른 형제들이 그를 처단하였다. 먼 나라의 노예로 팔아버린 것이다. 세월이 흘러 전화위복으로 입장이 바뀐 처지에서 팔려간 동생과 팔았던 형들의 조우가 있었다. 자신들의 죄과로 전전긍긍하는 형들을 위로하는 동생의 말에서 그가 자신의 인생이 하늘의 뜻, 하나님의 계획의 일환으로 신앙하고 살아왔음을 느낀다. 하늘의 뜻이 자신의 삶을 통해 이루어 간다는 그의 고백은 우리 모든 신앙인들의 고백이기도 있다.
1. 불가피한 고난
우리는 하나님 왕국의 백성으로서 그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한다. 속히 하나님의 구속사가 마무리되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가 이 땅에 오기를 소망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나라가 이미 임했다고 말한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와 있다는 의미로 ‘가까이 왔다’는 표현이다. 그렇다면 그 나라가 어디에, 어떻게 와 있다는 말인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 그 나라는 우리 안에 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재창조되었고 하나님의 통치받기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되었다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고 그의 통치가 있는 바로 그곳이 하나님 나라이다.
우리 안에 그 나라가 있다는 말은 그것을 뜻한다. 주기도문을 헬라어로 읽으면 재미있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 안에 쓰인 동사가 모두 과거시제라는 사실 때문이다. 헬라어의 부정과거는 과거의 1회적인 특별한 사건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것이 명령형으로 쓰이면 과거의 의미와 현재의 의미, 그리고 종말론적 의미도 함께 포함된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옵시며” 라고 기도함에는 그 나라는 이미 임하였고 임하고 있으며 또한 반드시 임할 것이라는 뜻이 모두 담겨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할 때는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교리적 고백이 따른다. 그 나라는 이미 우리에게 임했다. 하나님은 약속하고 계획한 것에 실패할 수 없는 분이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그 나라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다시 오는 날에 그 나라는 완전하게 이루어진다. 우리는 그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면서 우리 신분을 주기도문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하늘 원리로 살아야 하는 우리들에게 환란과 고난은 불가피하다. 왜 천국 시민으로 사는 우리에게 환란과 고난이 오는가? 세상의 원리는 오른뺨 한 대 맞으면 그 모욕감이 없어질 때까지 상대방을 때려주어야 한다. 땅에서 사는 원리가 힘이기 때문이다. 다른 것으로는 누가 더 센지를 알 수 없기에 힘으로 상대를 제압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의 원리는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돌려 대주는 십자가 원리이다. 우리는 그 십자가 원리로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이 세상을 살아야 한다. 그러니 당연히 충돌이 생기고 그때마다 갈등이 생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살라 하였으니 그의 통치에 순종해야 한다. 이렇듯 우리는 다른 차원, 다른 원리로 살아야 하는 신분들이기에 세상과 부딪칠 수밖에 없다. 이것을 성경은 성도의 고난, 환난이라 하였다.
2. 두 종류의 인생
왜 사람들이 술에 빠지고 담배와 도박을 일삼으며 심지어 마약을 하는가? 삶이 허무하거나 심심하기 때문이다. 그 마음에 뻥 뚫려 있는 공허를 메울 수 없기에 무엇인가에 그렇게 몰두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 은혜와 천국 소망으로 그 마음이 채워진 이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필요 없다. 하늘 것을 소유한 것만으로도 만족하기 때문이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계1:9) 예수의 나라와 그의 환난, 그의 참음은 별도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개념이다. 예수의 나라에 동참한 자는 세상에서 환난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그 딜레마를 해결하는 길이 참음이고 인내이다. 그래서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는 요한의 고백에 우리 또한 함께하는 자들이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지금 환난을 당하지만 너희는 그 하나님 나라를 믿음으로 보았으니 참아라.’ 그렇다. 그 나라, 그때는 반드시 온다. 오되 속히 온다. 모든 민족과 나라가, 사탄까지도 그의 이름을 거룩하게 인정하게 되는 날은 반드시 온다. 바로 그와 맥락에서 우리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고 기도한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당신 백성들과 그 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사는 나라를 이루는 것, 한 마디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다. 그 뜻은 이미 이루어졌고 또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어차피 하나님께서 이루실 텐데 왜 우리가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하나?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한 종류는 하나님에게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 종류는 하나님이 “너희의 뜻이 이루어질지어다.”라고 방치해 두는 사람들이다.
후자는 정말 무서운 말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가장 잔인하게 저주하시는 방법은 인간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살게 놔두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롬1:28-32)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롬1:24)
3. 하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의 이 심정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나? 아니, 해석할 수 있겠는가? 부모로서 자녀를 키우다 보면, 혹 어느 순간 그 자식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다. 아침마다 가라는 학교는 안 가고 매일 오락실이나 출입하며 놀러나 다니는 자식을 어찌 하겠는가? 처음에는 야단을 치고 손에 매를 들기도 한다. 그렇게까지 하다가 하다가 더 이상 안 되면 마지막에 나오는 말이 있다. ‘그럼 어디 네 마음대로 해봐! 네 인생이지 내 인생이냐?’ 이쯤 되면 그야말로 정말 끝장이다. 어떻게 사랑하는 자식이 잘못 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애가 타지 않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이 포기한 인생들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 너희 마음대로 살아 보라.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다 이루면서 살아보라.’ 하나님이 그렇게 놔두면 죄로 오염된 인간이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고 또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죄 밖에 없다. 그러면 결국 죄만 짓다가 사망으로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한다. 그 좋은 본보기를 예수가 보여주었다. 그는 잡히시던 날 밤에 어떤 기도를 하셨던가? ‘아버지, 나는 이 잔이 내게로 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그의 최종 기도였다. 사실, 예수의 뜻은 '그 고난의 잔을 내게서 멀리 하옵소서' 였다. 반면에, 하나님의 뜻은 ‘너의 뜻을 접고 나의 뜻인 십자가를 지고 죽어서 나의 백성들을 살리라. 그래서 나의 나라를 이루어내라’는 것이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다. 그 예수의 삶이 오늘의 우리 삶이 되어 우리도 그 같은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신분들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 역시 그 삶을 좇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하늘의 것을 영위하고 누림에 있다. 결코 세상의 것들을 붙들고 더 넉넉히 달라고 애걸함에 있지 않다. 그런 면에서 세상에서의 우리 죽음은 믿음의 시간이요 하늘 자녀의 확증 순간이다. 믿음으로서의 그 죽음은 하나님 한 분만 붙들기 위해 이 땅의 모든 것을 놓는 최종적 선택이다. 내 사랑하는 가족, 내가 사랑했던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 한분 붙잡기 위해 내려놓는 것, 그것이 성도로서의 우리 죽음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의 그 죽음을 얼미나 귀하게 여기시겠는가? 우리는 이 땅에서 그렇게 매일매일 나에 대하여, 세상에 대해 죽어야 한다. 그리고 궁극에 내 삶을 내놓아야 할 때 아쉬움 없이 기쁘게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시116:15)
결론
정말 천국을 사모하는가? 진정 그곳에 가고 싶은가? 혹, 아직은 이곳이 더 좋은가? 당장이라도 여기서 누리는 많은 것들을 내려놓고 갈 만큼 그 나라를 사모하는가?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했다. 그리고 또 임할 것이다. 그분의 뜻도 이미 이루어졌고 또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의 환난에서도 그 나라를 기다리고 지금의 궁핍에서도 그 온전한 뜻을 믿음으로 소망한다. 그 믿음이 세속의 유혹을 이기게 하고 그 소망이 죽음까지도 불사하게 만든다. 그런 우리를 세상 사람들이 성도라 부른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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