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 25. 14:45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제 육 일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예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출16:4~6)
먹고 사니즘은 인간 생존의 중요한 문제이다. 그래서 인류 현인들과 천재들이 이 문제 해결하고자 정치와 제도로 방책들을 펼치기도 해 왔다. 그중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실험은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을 호기롭게 주창할 때 상당수 지식인들과 권력 야망가들은 환호하였었다. 능력껏 일하고 모든 이들이 필요에 따라 공평히 나누어 쓰는 세상, 그 멋진 세상을 기대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토피아는 고사하고 100여년의 실험한 끝에 그 공산주의가 남긴 것은 비효율과 재앙뿐이었다. 이는 애당초 불가능한 출발이었다. 인간들이 스스로 알아서 하겠다며 하나님을 등진 이후, 스스로 보호하고자 만들었던 그 어떤 것도 인간 자신들의 안녕과 행복을 담보함에 불가능함만 증명해 주었다.
1. 양식에 대한 오해
그런데 예수가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준 그 기도문 속의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는 이 문구는 어찌 보면 세상의 것을 구하라는 기도같이 보일 수도 있다. 만일 이 기도가 이 땅에서 우리의 필요한 빵을 구하는 것이라면 성경은 자체 내에서 모순이 된다. 왜냐하면 같은 장 25절에서 분명하게 그런 것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명확히 나와 있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6:25) 성경이 각기 모순된 요구를 한 장에서 이야기할 리는 없으니 분명 우리가 놓치고 있는 어떤 심오한 뜻이 있는 것이다. 원문 성경을 유심히 보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의 '일용할 양식'이라는 단어 옆에 풋 노트가 있다. 그리고 거기에 '혹 내일의 양식'이라는 각주가 적혀 있다. 이유는 ‘일용할’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에피우지온>이 여러 가지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헬라의 어떤 문헌에도 쓰인 바가 없는 생소한 단어이다. 성경에서도 여기서 단 한번 쓰였다. 그래서 성경 학자들도 이 단어에 대한 해석에서 세 가지 견해를 보인다. 첫 번째가 <에피우지온>이라는 단어를 <에피>와 <우지아>의 합성어로 해석하여 ‘삶에 필요한’ 이란 뜻으로 풀은 관점이다. 오늘의 우리에게 친숙한 해석이다. 두 번째가 '그날을 위한, 당일을 위한' 이란 뜻의 풀이이고 세 번째가 ‘오는 날에 필요한’ 혹은 ‘다음 날에 필요한’으로 해석한 견해이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대부분 세 번째 견해에 일치한다. 그 이유는 예수가 공생애 기간 동안 아람어를 사용하였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아람어는 바벨론의 언어로서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70년 세월로 인한 영향으로 그들의 일상 언어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히브리어는 유대인 학자나 랍비들만 쓸 정도로 일반인들에게는 잊힌 언어였다. 그리고 실제로 아람어 기도문에는 ‘오늘 우리에게 내일의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되어 있다.
게다가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는 개혁주의 신학의 기본이 이 견해를 뒷받침 한다. 성경의 난제를 성경으로 풀지 않으면 그 해설이 아무리 그럴듯하다 해도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본래 의도와 전혀 다른 이야기로 흐를 수가 있기 때문에 이 원칙을 사수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시대와 상황으로 풀어서 해석하는 이들은 이렇게 해석한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가는 사람이 도중에 강도를 만났다. 예루살렘은 천국을 말하는 것이고 사마리아는 세상을 이야기한다. 강도는 사탄이고 선한 사마리아인은 예수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포도주와 기름을 부어 치료하는데 포도주는 예수의 보혈을 의미하고 기름은 성령을 의미한다. 여관으로 데리고 가는데 그 여관이 교회이고 그 여관 주인에게 동전 두 개를 주니 그것을 신약과 구약이라 한다. 그리고 다시 오겠다 약속을 하고 간다. 그것은 예수가 재림할 것을 의미한다.’ 어찌 보면 딱 맞아떨어지는 해석 같으나 과잉 해석이고 지나친 짜 맞추기식 설명이다.
2. 양식을 구하는 인생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비유는 율법사가 예수께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에게 대답으로 주신 말씀이었다. 예수는 그 율법사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는지를 먼저 물었다. 이에 그 율법사는 대답하였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죠’ 그 정확한 대답에 예수는 더 보탤 말이 없기에 '가서 그렇게 행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율법사가 물었다. ‘그런데 누가 내 이웃입니까?’ 그때 예수가 비유를 들어 설명한 것이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의 결론은 ‘누가 네 이웃인가 잘 정리하라'는 말이었다. 자기 입맛에 맞는 이웃을 고르려 말고 '네가 다른 사람들의 이웃으로 살라’는 것, 이것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담고 있는 메시지였다. 이렇듯 성경을 잘못 읽게 되면 인간들이 원하는 상황과 방향으로 해석하고 임의로 설명하게 된다. 그래서 성경을 성경이 아닌 자기 상식으로 해석함이 위험한 것이다.
실제로 ‘내일의 양식’은 구약에서 오늘 준 예가 있다. 광야의 만나 사건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하나님이 6일째 되는 날에는 안식일인 그다음 날의 것까지 허용하였다. 왜 여섯째 날에 일곱째 날의 양식까지 주었을까? 다음 날의 그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했기 때문이었다. 일곱째 날에는 일하지 않고 여섯째 날에 일곱째 날 것까지 미리 거두어 안식일에는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을 기념하고 누리며 종말에 이루어질 진짜 안식을 고대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여섯째 날에 내일의 양식까지 주심으로 장차 다가 올 그날은 반드시 온다는 것을 확신시켰다.. 여섯째 날에 일곱째 날의 양식을 줌으로써 일곱째 날인 안식을 여섯째 날에 미리 누리면서 살 수 있게 한 것이다. 구속사적 측면에서도 주기도문에서 쓰인 '내일의 양식'이라는 ‘마헬’ 아람어는 단지 24시간 후의 내일이 아니라 오늘과는 다른 날, 즉 다가올 미래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그러니 우리가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함은 다가올 나라, 종말을 살고 있음을 고백함이요 이 땅에서 그 천국을 경험하는 확인이며 그 안식,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올 것에 대한 확신이다.
우리는 다가올 하늘나라를 오늘에 사는 하늘 시민들이다. 이 땅에서 저 하늘의 것을 먹고 마시는 존재들이다. 그러면 그 하늘의 양식이 무엇인가? 우리가 오늘 ‘내일의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하는 그 하늘 양식은 무엇인가?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6:27-35)
3. 범사의 양식으로
그 양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가 구하는 내일의 양식 예수는 하늘 왕의 신분이지만 이 땅의 왕이 아니었기에 이 땅에서 고난과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지금은 하늘 영광의 보좌에 앉아 있다. 우리는 그 하늘의 양식인 예수를 원하며 '나도 그렇게 살겠습니다. 나도 그 하늘의 백성이기 때문에 하늘의 왕이 살다 가신 그 길을 가겠습니다.'는 신앙고백이 ‘우리에게 내일의 양식인 예수를 주옵소서.’라는 기도문의 메시지이다. 이는 하늘의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아는 자들만이 할 수 있는 기도이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7-18) 우리가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이 만만치 않다. 눈물도 안 나올 만큼 힘들고 때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을 만큼 괴롭기도 하다. 그러나 바울은 그 하늘의 영광을 알기에 조금만 더 참고 달려갈 길을 계속 달려가자 하였다.
눈에 보이는 이곳은 잠깐이면 지나갈 것이지만 보이지 않는 저 천국은 영원한 곳임을 우리는 믿는다. 그러기에 '오늘날 나에게 내일의 양식을 주옵소서. 그 예수를 좇아 살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고 다짐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이다. 어떤 이들은 요한일서 3장의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는 구절을 근거로 믿는 사람은 그 영혼이 잘된 것처럼 병도 안 걸리고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게 된다고 말한다. ‘범사’는 바울도 자주 쓰던 단어였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살전5:16-18) 하지만 바울이 말하는 '범사'는 ‘모든 일’을 뜻하는 단어가 아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구원을 이루고 그 백성들의 삶에 세밀하게 간섭하여 '그들로 당신의 자녀답게 만들어 가는 그 모든 일들'을 범사라고 한다. 그러니 그 범사의 잘됨은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져 가는 것을 말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고쳐 가고자 하는 대로 우리가 만들어져 감을 말한다.
우리를 징계해서라도 자녀답게 만들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에 이루어져 감,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범사가 잘됨이다. 같은 맥락에서 의로운 일, 선한 믿음의 삶을 살았기에 감옥에 갇혀있던 요셉의 상황을 가리켜 성경은 ‘그의 삶이 형통하였더라’라고 표현하고 있다. 신앙 안에서 내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 된다 함은 전에는 내 마음대로 살던 죄투성이의 인생이 이제 하나님의 통치 속으로 들어와 그분의 뜻대로 살게 된 것을 말한다. 내 모든 일이 하나님 뜻에 맞게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삶, 그것이 범사에 잘 되기를 간구한다는 성경 말씀의 진의이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것이 솔직히 너무 힘들다. 내 욕심과 야망을 접고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어찌 쉽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강건함이 필요하다. 그것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기도했던 바울의 기원이었다. 이 땅에서도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겠다는 말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 예수로 살 수 있도록 천국의 양식, 내일의 양식, 영원의 양식을 구하는 것이다.
결론
‘하늘 양식인 예수 그리스도로 살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 할 수 있는 이들은 땅의 것에 눈을 두지 않는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며 산다. 그러기에 진정 자기 외의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다. 죄와 악으로 사는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자기 양식을 구하며 살아야 하기에 자기 외 모든 이들이 경계의 대상이고 경쟁 상대일 뿐이다. 그러나 예수를 알고 영원한 나라를 아는 자들은 굳이 세상에서 이 땅의 것으로 누구와 경쟁하지 않는다. 그 사랑을 근거로 오른뺨 때린 사람에게 왼뺨을 돌려대며 '오늘날 우리에게 내일의 양식을 주옵시고' 이렇게 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오늘만을 살지 않는다. 내일을 오늘에 산다. 그래서 우리가 하늘의 자녀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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