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12. 18:56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하고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한대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 왔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마22:15~22)
누가 한 말인지는 몰라도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은 참 멋진 말이다. 비만이 건강에 해롭다고 생각하면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이려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비만해지면 편한 대로 생각하게 되고 그때부터 diet라 적어놓고 그 뜻은 '내일부터'라고 해석하는 인간들도 적지 않다.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가 '진실한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진실하지 않다'고 말했나 보다.. 진실은 직면하기도 어렵거니와 전해주기도 불편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달콤한 말을 들으며 평생 꽃길만 걷고 싶어 한다. 그러다 보니 권력을 쥔 자 곁에는 상황을 조작하고 진실을 왜곡하는 크고 작은 거짓말들이 공존해왔다. 거짓말에도 색깔이 있다고 한다. 상대를 속여 부당한 이익을 얻으려는 '흑색 거짓말', 상대를 위로하는 도구로 사용한 '백색 거짓말' 등. 가장 흔한 거짓말은 나와 상대방에게는 이익이나 제삼자에게는 손해를 끼칠 수도 있는 '회색 거짓말'이다. 그런데 근자에는 '노란색 거짓말'도 있다. 배반을 상징하는 노란 장미를 빗대어, 스스로를 속이는 거짓말, 자기를 기만하고 자신을 배반하는 거짓말을 말한다.
1. 자가당착
예수 당시에도 그런 인간들이 있었다. 자신을 속이고 허위 사실로 상대를 위험에 빠뜨리는 그런 인간들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던 인간들이 그때나 오늘이나 시대를 막론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이들이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예수에게 시비를 벌였던 사람들이었다. "선생님, 우리가 알기로 당신은 매우 진실한 분입니다. 하나님의 길을 참되다 가르치시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문제 말입니다.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아닙니까?" 토끼몰이하듯 사냥감을 사면초가 상황으로 몰아넣는 함정의 질문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들 피를 짜낸 세금을 로마에 바침을 수치요 굴욕이며 매국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예수가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다 하면 그 유대 민중의 분노를 사는 것이 되고 반대로 세금을 내지 말라 하면 조세저항 운동자로 찍혀 로마 당국에 주포 되어갈 상황이었다. 그러니 어떤 대답을 한들 올무에 걸릴 교묘한 질문이었다. 물론 예수는 그들의 위선과 기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세금으로 내는 데나리온 동전 하나를 가져오라 하였다. 그리고 거기에 누구의 형상과 어떤 글이 새겨져 있는지를 물었다.
당시 데나리온 동전은 로마 군인들 급료 지급과 황제에 대한 세금납부 용도로 사용되었기에 로마 식민지 전역에서 통용되었다. 때문에 그 동전 앞면에는 당시 로마의 제2대 황제 얼굴과 ‘신성한 아우구스투스의 아들 티베리우스 가이사’라는 글, 그리고 뒷면에는 ‘최고의 제사장’라는 글귀와 함께 신의 보좌에 앉은 황후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황제를 신의 아들로 지칭하는 이 동전은 야훼만 섬기는 유대인의 눈으로 볼 때 불경하기 그지없는 동전이었다. 그래서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 동전을 소지하지도 않았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예수는 그런 동전을 보이며 말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이 말씀은 오늘날까지 정교분리, 즉 정치와 종교를 분리 근거로 활용되어 왔다. 대체로 독재 권력에 암묵적인 지지를 보내온 교계의 이상한 지도자들에 의해 더욱 강조되었다. 그러나 예수의 말에는 대적들의 질문과 다른 결정적 단어가 하나 있다. 그들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 바쳐야 하나, 말아야 하나?"라고 물었는데 예수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려드려라"라고 답한 점이다.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냐 물었는데 예수는 '돌려주라'고 응수한 것이다.
‘바치다’는 단순한 단어로서 ‘돌려주다’, 즉 무언가 빚진 사람이 그 빚을 상환하는 행위의 의미로 굳이 바꾸어 대답한 것이다. 즉, 질문하는 네가 로마 황제가 정복한 땅과 백성, 그리고 거기서 생산되는 물산들의 주인이라 인정한다면 너는 그 황제가 세금이란 명목으로 자기 것을 요구할 때 그것들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가이사의 주권을 인정한다면 되돌려주라는 것, 그것이 예수의 말이었다. 그러나 유대인이라면, 정말 유대인이라면 바리새인이든 헤롯 당원이든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여호와께서 영원무궁하도록 다스리시도다’ (출15:18) 이 신앙은 유대인들에게 있어 근본이었기에 예수를 책잡으려던 적대자들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니 예수의 답변은 그들의 허를 찌른 것이다. 질문을 던진 이들의 자가당착을 유도하고 자기모순을 폭로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선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자칭 신이라는 황제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는 선언이었다. 즉 스스로를 기만하지 말고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그 믿음에 상응하는 삶을 살라고 촉구요 믿음대로 행하라는 말이다.
2. 자기기만 탈출
야고보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지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하였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으면 '자신을 속이는 자'라는 것이다. 그는 거울의 비유를 들어 이렇게 말하였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얼굴을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기만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모습을 보고 떠나가서 그것이 어떠한지를 곧 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약1:22-27) 몸을 구부리고 서있으면서 자기 그림자를 보고는 바로 서지 않는다고 욕하는 사람은 어리석다. 성경은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는 자’ (요일1:6)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일1:10) 라고도 말한다. 우리는 정말 믿는 대로 행하는가? 아니면 스스로 분열하여 자기 스스로를 속이는가? 바울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자기를 속이는 인간이 되지 말 것을 권하였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6:7)
500여 년, 독일 교회의 개혁은 한 바보 수도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 바보는 루터였다. 21살의 젊은 나이에 수도사가 되어 평생 기도하고 금식하며 극단적 금욕으로 살았다. 진리에 이르려, 신의 인정을 받으려 수도사로서 엄격한 고행의 길을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그의 내면적 고민과 두려움은 여전하였다. 하나님이 완전한 것처럼 자신도 그 앞에서 완전하고자 노력했으나 그럴수록 완전할 수 없는 자기에 실망했다. 그리고 하나님도 그런 자신에게 실망하여 화났고 있다고 여겼다. 하나님의 완전한 의로움 앞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인간이기에 그는 괴로웠다. 그러다가 하루는 이런 질문이 들었다. '진정한 용서란 사제의 인정이 아니라 고해자 마음에서 나오는 참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고해자의 참회가 진심인지 아닌지는 오직 고해자 자신과 하나님만 알 수 있다. 설사 사람을 속인다 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 겉으로 보이는 참회와 진정한 내면의 참회 사이의 간극에서 루터는 고민하고 또 고뇌했던 것이다. 고해 문제만이 아니었다. 면죄 문제도 루터에게는 갈등이었다. 당시 교회는 교회 성인들이 자신의 구원에 필요한 정도 이상으로 쌓은 공로, 즉 '잉여 공로'를 교회의 필요한 사람들에게 양도, 분배시키는 제도가 있었다. 그것을 '면죄' 혹은 '대사'라고 불렀다. 이는 고해성사를 통해 남아 있는 벌을 교황이나 주교가 면제해 주는 행위였다.
이런 면죄를 당시 교회는 성인들의 유골 방문과 연계시켰다. 성물 숭배가 시작된 것이다. 신자들이 성인들의 '거룩한 뼈'를 볼 때마다 얼마만큼의 덕을 보는가를 정확히 계산해서 제시할 정도였다. 루터가 반박문을 내걸었던 비텐베르크 성당에도 19,000개가 넘는 성인들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아기 예수가 누운 구유 앞에 있었다는 지푸라기, 예수의 수염 한 가닥, 예수를 못 박을 때 사용했다는 못 중의 하나, 최후 만찬 때 먹다 남은 빵조각, 성모 마리아의 머리카락 몇 가닥, 성인들의 몸에서 나왔다는 많은 치아와 뼈 등. 이 유물 중 어느 하나에 경배하는 것만으로도 100일치의 면죄 값어치가 있다고도 하였다. 이런 특권이 베풀어지는 날이 만성절이었는데 이 날은 성인들이 쌓은 '잉여 공로'를 분배받는 특별한 날이었다. 일종의 '영적 보물 창고의 대방출'이었다. 그 축복을 분배받고자 독일 전역에서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왔으나 루터에게 이런 면죄가 심각한 갈등 문제였다. 그것으로 누구든 진정 자신이 지은 죄를 참회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루터는 예민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신을 속일 수 없었고 더구나 하나님은 절대 속일 수 없었다. 그는 늘 자신의 죄를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3. 정직한 삶의 하나님
오늘의 우리 사회가 굥고하게 위선적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입으로 하는 말과 실제 행동이 다르고 집단의 명분과 개인의 잇속이 다르기 때문이다. 겉과 속이 다른 것이다. 더 이상 옳고 그름은 없고 오직 '내 편'인가 '네 편'인가가 중요한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모두의 내면을 비추는 상식적 양심과 도덕의 거울이 보이지 않는다.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말했다. ‘인간의 악은 인간의 약함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강함, 즉 인간만이 가진 이성의 자유에 있다.’ 인간 정신의 최고 안에 인간의 가장 교묘한 죄가 내재해 있다는 말이다. 그런 본성을 외면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이 규범이 되어 자기 안에 갇혀버린다. 자기를 비춰주는 거울이 없기에 자폐적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초월자를 상실하는 인간은 결국 자율적 주체라는 인간 스스로를 신격화하기 마련이다. 과거에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언했지만 오늘의 푸코는 이런 '인간의 죽음'을 선언한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다시 하늘로 향하는 문을 열어야 한다. 타율과 자율을 넘어 '신율'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남을 속일 수 있고 나 자신도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절대 속일 수 없다. 그 초월자에 대한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
성경은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신다’ (대하16:9)고 증거 한다.. 사람의 모든 걸음을,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신다고 했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나니’ (잠16:2)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죄가 주 앞에서 숨길 수 없음을 실토하였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빛 가운데에 두셨나이다’ (시90:8)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행위와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신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 예민한 신앙 양심에서 스스로 속이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신다’ (시7:10) 고 했다. 오늘날 우리는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51:10)라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 자기를 속이는 자인가? 하나님과 사귀고 있다 말하면서 어둠에 행하는 자인가? 나는 죄지은 일이 없다 말하면서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사람인가? 하나님의 주권을 노래하면서도 다른 신들을 섬겨 그 우상들에게 세금을 바치는 자인가?
상대가 있는 싸움은 쉽다. 인생은 자기와의 싸움이다. 자기 내면과 싸움, 이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쉽지 않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우리는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말했다. ‘오직 사람만이 내면의 소리를 듣고 부끄러워한다’’ 그래서 우리는 혼자 있을 때 더욱 신실해야 한다. 그 말은 스스로 속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혼자 있을 때도 삼갈 수 있어야 부끄러움을 아는 인생이다. 남들이 알면 부끄러운 일은 물론이거니와 무엇보다도 스스로 부끄러운 일을 삼가야 한다는 말이다. 사실, 부끄러움이란 마음의 소리를 들을 때 생기는 감정이다. 마음 '심'(心)에 귀 '이'(耳)를 붙이면 부끄러움을 뜻하는 '치'(恥)가 된다. 수치(羞恥), 염치(廉恥) 할 때의 그 '치(恥)' 말이다. 마음에 귀를 기울일 때 생겨나는 이 부끄러움이야말로 스스로 절제할 수 있는 힘이다. 성령의 도움이 있어 우리 마음에 그런 부끄러움이 하나님을 향한 기도로, 결단의 삶으로 이어지기를 기도하자.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데 없는 의원이니라 너희가 잠잠하고 잠잠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 너희는 나의 변론을 들으며 내 입술의 변명을 들어 보라 너희가 하나님을 위하여 불의를 말하려느냐? 그를 위하여 궤휼을 말하려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낯을 좇으려느냐? 그를 위하여 쟁론하려느냐? 하나님이 너희를 감찰하시면 좋겠느냐? 너희가 사람을 속임 같이 그를 속이려느냐? (욥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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