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12. 17:01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눅13:6~9)
피고에게 유죄판결을 내리고 일정기간 형의 집행을 보류하는 것으로 집행유예라는 제도가 있다. 열매가 없어 찍어버려야 할 무화과나무, 그 나무에 대한 처분 집행을 일 년 간 유예한 성경의 예수 비유가 사법제도의 집행유예 제도를 떠올리게 한다. 사형수들이 사형집행 장소까지 걷는 초록색 바닥을 이야기 한 영화 <그린마일>, 사형수가 일단 그 초록색 바닥에 발을 딛게 되면 그 한걸음 한걸음이 죽음의 발걸음이지만 실상 우리 인간들도 그 그린마일 위를 한 걸음씩 걷고 있으니 매일매일 죽어가고 있다. 더 나아가 인간들이 처한 상태는 집행유예도 아니다. 형 집행 장소로 매 순간 다가가고 있는 처지이다. 그 사형집행 장소로 가는 중에 특사가 찾아와 ‘당신은 사면이요’하며 그 자리에서 자유를 선물함, 그것이 구원이고 성경은 시종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
1. 어떤 비극 이야기
예루살렘에서 한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다. 성전에 갈릴리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러 왔었는데 어떤 이유로 빌라도가 제사드리고 있던 그들을 학살하였다. 그 일로 제단 제물에 그들의 피가 튀면서 섞여 버렸다. 당시 사람들은 생각했다.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하나님이 저렇게 벌을 내렸을까?'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눅13:1) 눅12장에서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 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는 예수의 일갈이 떨어지던 때에 이 질문이 던져졌다. 예수는 당신이 세상에 불을 던지러 왔다고 말했었다. 그 불이 떨어지면 구약 진술대로 어떤 이에게는 심판의 불, 어떤 이들에게는 구원의 불이 될 터, 그럼에도 인간들이 그 하늘 심판과 구원에 대한 관심보다 천지 기상 같은 일상에 더 관심을 두고 있었으니 예수의 안타까움이 더하였다.
그래서 눅12장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네가 너를 고소할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저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관속에게 넘겨주어 관속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네게 이르노니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여서는 결단코 저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눅12:58~59) 지금은 천지 기상 같은 일상에 착념할 때가 아니라 우리 인생을 고소하러 오는 고소자와 화해에 힘을 써야 할 때라는 말이다. 고소하는 이는 호리의 선처도 없기 때문이다. '호리'란 로마에서 통용되는 가장 작은 단위의 동전이니 화해치 못하면 국물도 없다는 무서운 말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가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학살 사건과 실로암 망대 사건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람들을 경멸하고 무시했었다. 사마리아는 앗수르에 점령당하여 인근 이방인들의 이주와 통혼으로 혈통이 뒤섞여 버린 곳이었고 갈릴리는 예루살렘의 변방이자 이방인 접경 지역이라 가난하고 무례한 이들이 살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눅13장 시작은 그 갈릴리 사람들과 그들을 경멸해온 예루살렘 사람들을 등장으로 그 두 지역 사람들의 예기치 못한 죽음을 화제로 띄웠다. 갈릴리 사람들은 제사를 지내다가 이방인의 칼에 맞아 죽었고 예루살렘 사람들은 기혼 샘을 끌어오는 실로암 연못가 수로 공사 중에 거기 망대에 깔려 죽었다. 이 사안과 관련하여 예수는 그들의 죽음이 그들 죄의 경중이나 다소와 관련 없음을 명시하였다. 모든 죄는 하나님 앞에서의 죄이다. 그리고 그 죄는 많고 적음, 또는 중하고 경함을 막론하고 모두 사망일뿐이다.. 그러니 살면서 호리의 죄라도 지은 사람은 심판 대상일 뿐이다. 그럼에도 자신들은 마치 그 지옥 형벌과는 무관한 듯이 다른 이들에게 닥친 불행이나 비극을 죄와 결부시키는 사람들, 그 대가의 경중을 갑론을박하는 인생들, 그런 이들에게 예수는 분노하며 말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13:5)
2. 집행유예와 사면
불태우기 위해 온 예수에 의해 불은 이미 세상에 던져졌다. 그 불타는 심판에서 살아날 길은 예수의 은혜밖에 없다. 그 은혜에 대한 이해를 위해 보탠 비유가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였다. 그런데 비유가 좀 이상하다.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다니? 이는 그 포도원의 포도나무가 주인이 원하는 열매를 맺지 못했기에 주인이 포도를 걷어버리고 다른 작물의 소출을 기대함이다. 즉, 대체작물이었다. 대체작물이란 앞선 실패를 전제한다. 그런데 왜 굳이 포도원에 심긴 무화과나무인가? 이스라엘이 포도와 무화과로 비유되어 왔기 때문이다.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열조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같이 하였거늘 저희가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의 사랑하는 우상같이 가증해졌도다” (호9:10)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뜨거운 광야에서 만나는 싱그러운 포도로 보았고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열매처럼 마음을 주며 가꾸었었다.
하지만 그 포도와 무화과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에게 섞이면서 가증해졌다. 이는 신의 형상으로 지어졌음에도 그 은혜를 떠나 자기라는 우상을 섬겨온 우리 인간의 모습이기도 하다. 인간의 끝없는 자기애 욕망을 여실히 보여주는 이야기가 포도원에 심긴 무화과나무 비유인 것이다. 최적의 환경인 에덴에서 ‘신처럼’ 되겠다는 욕망으로 불순종이라는 들포도를 맺었던 아담, 그것이 이스라엘에게서 재현되었고 오늘이 우리에게서도 반복되고 있다.“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시 80:8)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라 하였다. 그런데 그 포도나무들이 어떤 열매를 맺었던가? 그렇게 인간이란 자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가 없는 존재였다. 혹, 열매를 맺으려면 하나님의 은혜가 덮어주어야만 가능할 뿐이다. 주인은 무화과나무 실과를 3년간 기다렸다.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눅13:7)
예수의 이 말씀은 레위기 19장의 율법 인용이었다.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레19:23)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과목을 심었을 경우, 3년 미만의 과실은 할례 받지 못한 것, 즉 부정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아야 했었다. 할례는 일종의 계약 징표였다. 그 자체가 자신의 쪼개짐, 즉 죽음 대신에 다른 것이 쪼개져 그 효력이 당사자에게 전가되는 언약의 표식이 할례였다. 이는 먹을 수 있는 과실과 먹을 수 없는 과실 여부는 과실나무의 수고에 의함이 아니라 그 나무에게 은혜를 준 어떤 존재의 배려 때문임을 상징한다. 예수의 십자가가 우리를 위한 할례 사건이었다. 우리가 매달려 쪼개져 죽어야 할 십자가에서 예수가 쪼개진 것이다. 그 쪼개짐이 우리에게 전가가 되어 오늘의 우리에게 집행될 사형이 사면되었다. 그러니 그 예수로 인해 우리 인생은 집행유예가 아니라 이미 사면된 무죄 상태가 되었다.
3. 극상품 포도나무가 된 들포도나무
영화 <그린마일>에서 고약한 교도관이 전기의자에서 사형당한 인디언의 시체를 모욕한다. 그때 선량한 교도관이 그를 밀치며 말한다. ‘이 사람은 이미 전기의자에서 자기 죄값을 다 치른 순결하고 깨끗한 사람이야. 더 이상 모욕하지 마!’ 전기의자에 앉기 전 그 사형수는 악한 죄수였다. 그러나 전기의자에서 죽음으로 그 대가를 모두 치렀다. 바로 우리들이다. 죄로서 죽어 마땅했던 우리들, 그런데 예수가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쪼개지는 할례를 받은 것이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눅13:8) 주인은 과원지기에게 과실 없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 했다. 레위기 표현으로, 그 나무는 할례 받지 못한 부정한 나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원지기가 그 포도원 주인을 막아서며 '반드시 과실을 맺게 하겠으니 1년만 더 기다려 달라' 했다. 어떻게?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과원지기가 수고하겠다는 것이다. 여기 ‘거름’은 죽음이다. 거름은 죽음으로 생명을 살린다. 죽음 안에 부활 에너지를 담고 있는 거름, 예수는 십자가에서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라는 거름으로 심긴 것이다.
그 ‘거름’이라는 단어 앞에 ‘그대로 두소서’라는 어구가 십자가 위에서 그대로 쓰였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눅23:34) 자기를 못 박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용서를 구하는 예수, 그는 처형받아 마땅한 자들을 막아서며 ‘제가 그 형량을 다 채울 테니 저들의 죄를 사면해 주소서’라고 기도한 것이다. 예수는 열매 맺지 못했던 무화과나무가 되어 십자가에서 책임을 감당하였다. 그것이 우리를 살리는 거름이 되었다. 그것이 우리의 회개요 구원이 되었다. 스스로 신이 되어 ‘나’라는 우상을 섬기며 살던 우리가 그의 희생으로 영생을 알게 되었다. 사실, 하나님을 기쁘게 할만한 열매 맺을 포도나무는 예수뿐이었다.. 그 극상품 포도나무가 스스로 거름이 되어열매 맺지 못하는 우리 들포도 나무들 가지를 당신 몸에 접붙였다. 그렇게 극상품 포도나무의 죽음은 거름이 되었고 죽어야 할 들포도들은 극상품 포도나무를 양분으로 생명 있는 존재가 되었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 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 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 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롬11:16~18) 돌감람나무 가지는 참감람나무에서 떨어지는 순간 죽음이다. 그리고 그 돌감람나무에 맺히는 열매도 돌감람나무의 것이라 할 수 없다. 열매는 뿌리 진액으로 맺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참감람나무에 붙어 기생하는 돌감람나무들이 자신들이 맺은 열매를 자랑하려는 인생들에게 예수는 경고한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요15:4-6)
결론
제 잘난 맛에 사는 인생들이 차고 넘치는 세상이다. 그런 인생들에게 하나님은 오래전부터 당신의 메신저들을 보내어 경고해 왔다.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 주 여호와 내가 말하노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내 앞에 그저 있으리니 네가 어찌 말하기를 ‘나는 더럽히지 아니하였다. 바알들을 좇지 아니하였다.’ 하겠느냐?” (렘2:21~23) 하나님 나라의 존재 양식은 은혜이다. 은혜로 존재하고 은혜로 경륜되며 은혜로 완성된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라고 지어진 존재가 아니다. 세상을 떠날 때에 사람들이 나를 그리워해 주고 내 죽음을 아쉬워해 주며 나의 부재를 오래도록 아파해 주는 것, 그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사람은 그 죽음 뒤의 영원을 준비하며 살도록 지어진 존재이다. 그 영원에서 우리는 천국과 지옥 중 어디로 가게 될까? <그린 마일> 위에서 하루하루 죽어가던 우리들이었지만 그 무서운 사망의 현장으로 대사면령으로 하늘 자녀들이 되었다. 그러니 은혜로 살고 은혜 가운데 죽어야 잖겠는가?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주께서 그 앞서 준비하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편만하며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우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헐으사 길에 지나는 모든 자로 따게 하셨나이까 수풀의 돼지가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이키사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권고하소서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 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시8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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