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12. 20:27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 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고전3:1-9)\
더 높은 빌딩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의 시야는 더 좁아졌다.더 넓은 고속도로를 가지고 있지만 성질은 더 급해졌고 일은 덜함에도 시간은 늘 모자라며 지식은 많아졌음에도 지혜자를 찾기 힘들다. 약은 더 먹는데도 건강이 더 나빠졌고 말은 더 많아졌지만 사랑은 그만큼 따라가지 않는다. 달나라를 넘어 화성까지도 넘나들려 하는 시대임에도 정작 이웃집에는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오늘날, 우리는 감사를 상실하였다. 풍요 속의 빈곤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1. 그림자 노동
옛 농부들은 콩을 심을 때에 세 알씩 심었다고 한다. 한 알은 땅에 사는 곤충을 위해, 다른 하나는 공중의 새를 위해, 나머지 한 알은 자신의 몫으로 말이다. 공존과 나눔의 마음, 그 선한 마음이 물질적으로는 풍족하지 않았어도 행복한 삶, 넉넉함을 느끼게 한다. 물질적 풍요의 오늘임에도 행복하지 않음은 '콩 세 알'의 마음을 잃었기 때문이요 함께 살고 같이 산다는 선한 마음을 잊었기 때문이다. 마이클 센델 교수는 물었다. "지금 서 있는 그 자리, 정말 당신의 능력 때문입니까?" 내가 가진 재능과 사회로부터 받은 대가는 과연 온전히 내 몫인가? 스스로 자수성가한 사람, 자기 충족적인 사람일수록 감사와 겸손이 어렵다고 한다. 감사와 겸손의 감성이 마른 공동체는 각박하다. 반면에 나의 명성과 성공이 행운이나 은혜와 관계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겸손하다고 한다. 이기적인 사회일수록, 경쟁적 시대일수록 이런 겸손과 겸비한 마음이 더욱 아쉽다.
그림자 노동, 말 그대로 노동력은 있는데 노동자가 안 보이는 노동이다. 이런 노동은 아무리 해도 표가 나지 않는다. 가사와 육아 등의 집안일들이 대표적이다. 오죽하면 '애 본 공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겠는가? 하지만 빨래 설거지를 하루만 멈추어 보라. 온 가족은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설거지를 아무리 깨끗이 해도 성과급은 없다. 당연한 일을 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종종 우리는 나의 당연함이 누군가의 노동이라는 사실을 잊고 산다. 역사상 출현했던 노동 형태가 세 가지이다. 첫째는 무보수 활동인 자급자족 노동, 둘째는 보수를 받지만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품 생산을 위해 일하는 임금 노동, 셋째는 무보수이면서 오로지 임금 노동을 뒷받침하기 위해 존재하는 노동, 즉 그림자 노동이었다. 이 노동은 임금 노동보다 더 근본적이다. 임금 노동은 그림자 노동 없이는 지속될 수가 없다. 그러니 나의 당연함이 누군가의 노동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도 일하실까? 한다면 어떻게 일하실까? 철학에서 말하는 신은 순수 형상의 신으로서 스스로 일할 수 없다. 일을 하지 않는 신이니 수고를 모르고 고통도 모른다. 그런데 성경의 하나님은 일하는 분이다. 천지창조는 하나님의 노동이었다. 빛을 만들었고 하늘을 만들었으며 땅과 바다를 짓고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만들었다. 새들과 짐승들을 만들고 마지막으로 당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었다. 하나님은 일하는 분이다. 일하되 그림자처럼 일한다. 예수가 명절에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친 적이 있다. 그때 유대인들은 왜 하필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하냐고 격하게 항의하였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는 말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요5:17). 하나님이 엿새 동안 하던 모든 일을 그치고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창2:3) 하였기에 그 안식일을 목숨보다도 소중히 지켜온 그들에게 예수가 하나님이 이제까지, 즉 안식일에도 일한다고 하니 큰 충격이었다.
2. 모든 것에 감사
혹, 하나님이 당신의 창조세계를 지키고 돌보며 보존하는 일을 멈춘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 있을까? 하나님이 일을 멈추면 지구 자전과 공전이 멈출 것이고 태양도 빛을 잃을 것이다. 하나님이 일하고 있기에 세상은 돌아가고 우주가 유지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림자처럼 일한다. 안 하는 듯 안 하는 것이 없고 안 보이나 모든 것을 하고 있다. 이 세상이 당신의 사랑으로 만든 곳이기에 오늘도 그 '사랑의 수고'를 그치지 않는다. 그 수고로 우리가 매일 잠에서 깨어나 먹고 마시며 일하고 즐기고 산다. 곤히 잠들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도 아침에 일어나면 맑고 신선한 공기로 충만하다. 내 수고와 내 땀이 전혀 없었음에도 여명의 빛과 물들어 떠나가는 단풍을 감상한다. 성경 시인도 같은 마음이리라. "아침에 주의 사랑을 알리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알리는 일이 좋습니다." (시92:2) 우리의 당연함은 누군가의 노동이다. 오늘 내가 누리는 이 생명과 기회는 지금도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그림자 노동, 그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의 일하심이다.
그러고 보니,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것들이 우리의 수고와는 무관하다. 더구나 그러한 것들은 대체로 소중한 것들이다. 너무나 귀해서 값을 매길 수조차 없을 것들이다. 내가 수고하지 않음에도 존재하여 우리로 살아가게 해 주는 많은 것들로 세상은 충만하다. 그럼에도 인간들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고마운 마음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의 그림자 노동이 있어 우리가 일상을 유지하고 있고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사랑의 수고가 우리 생명과 나의 우주를 지탱해 주고 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삶의 발자국이 남아 있는 길을 돌아보았다. 그 길에는 선명한 발자국이 찍혀있었다.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이 걸어간 흔적이었다. 생각해 보니 두 사람이 함께 걸은 흔적의 시간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반대로 홀로 걸었던 흔적의 시간은 그 인생에서 너무도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분명 하나는 자기의 발자국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가 사랑하고 의지하는 신의 발자국이었다. 그가 물었다. "신이여, 제 삶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엔 어디에 계셨습니까?" "너와 함께 있었다." "그런데 왜 발자국이 하나뿐입니까?" "그땐 내가 너를 업고 걸어갔단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오늘도 우리가 산다. <감사>라는 제목의 기도시는 우리가 감사해야 할 복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잘 말해 준다.
"거둘 수 있음을 감사합니다
그보다 먼저 뿌린 씨를 자랄 수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보다 먼저 시기를 잃지 않고 뿌리게 하셨음을 감사합니다.
그보다 먼저 뿌릴 수 이는 씨앗을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그보다 먼저 뿌릴 수 있는 땅을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그보다 먼저 우리는 아무런 수고를 한 것이 없기에 이 모든 수고한 사람들을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그보다 먼저 이 모든 추수의 근원이신 우리 야훼께 감사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 아름답게 핀 꽃들은 땅속의 뿌리에게 감사해야 하고 보기 좋게 맺힌 열매들은 땅속의 뿌리에게 감사해야 한다. 화려한 꽃과 튼실한 열매에 대해서만 찬가를 불러왔던 우리들에게 삶의 토대가 되어주는 것에, 나를 나로 있게 한 어른들의 수고에, 이름 모르는 수많은 이들의 헌신과 수고에, 그리고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그림자 노동에 감사를 해야 한다.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라고 고백하였다. 겸손을 알고 은혜를 아는 신앙인다운 이런 고백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3. 자라게 하시는 이
바울파와 아볼로파로 분열하여 시기와 분쟁이 그치지 않던 교회에 편지를 보내어 바울은 말한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그는 겸손했고 감사를 알았다. 사실, 이런 고백이 기독교 신앙의 정석이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서로 "내 것이다"며 움켜쥐려는 인간들에게 필요한 고백이다. 화가 피카소는 기도하기를 "주여,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지켜 주소서"라고 하여 자기 욕망을 이루는 것이 성공이라 가르치는 세상에서 원하는 것들의 횡포에 끌려 다니지 않기를 기원하였다. 자연은 내 것이 아니다. 창조주로부터 받은 무상의 선물이다. 오늘의 기후 위기와 생태 경고는 그 자연을 창조주의 선물로 보지 않고 무신론적으로 다루는 인간들의 폭력에서 비릇되었다. 오래전 전도자는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았다. 감사는 이 선물을 누리고 맛보고 향유함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라는 바울의 감사에서 그런 신앙고백을 느낀다. 인간은 다른 피조물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에게 전적으로 의존된 존재이다. 아인슈타인은 <꿀벌이 지구에서 사라진 4년 뒤에 지구는 멸망한다>고 예언했다. 인류가 먹는 모든 식품의 3분의 1이 곤충의 수분 덕분인데 이 중 80%를 꿀벌이 담당한다. 인간들이 아무리 최첨단 지식 정보 사회로 진입해도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는 꿀벌 없이는 잠시도 생존할 수 없는 것이다. 감사의 태도는 ‘지금 서 있는 여기 내 자리는 내 능력 때문이다’고 자기도취에 빠진 인생들을 겸손의 자리로 돌이킨다. 그리고 그런 감사에서 행복감을 느낀다. 여전히 돈을 복이라 여기고 지위를 성공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인생들은 결국 그것의 노예가 될 뿐이다. 다른 이들과 비교하며 늘 불행감으로 사는 인생들에게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라는 바울의 고백은 움켜쥐지 않고도 넉넉할 수 있는, 비교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자족을 알고 느낄 수 있는 비결을 제공한다.
예수는 말씀하셨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6:26).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6:28-30) 풍요에 취해서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을 욕심내다가 하나님을 잊지는 않았는지? 하나님이 선물로 준 것들을 스스로 쟁취한 것인 양 거만해 있지는 않았는지? 내 잔이 넘칠 때 날 위해 묵묵히 일한 이들을 기억하며 살자. 나의 잔이 비었을 때, 내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할 때, 내 부족함, 우리의 약함을 돕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간구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잊지 말자. 그것을 감사하며 사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12:9)
일하는 자가 그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 할 수도 없고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전3: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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