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22. 20:24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창3:1~7)
선과 악, 하나님과 사탄, 흑과 백, 마치 일대 일의 대등한 관계로 이해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그런 사고는 인식의 오류이다. 우선 선과 악이 그렇다. 무엇을 기준으로 선이고 어디까지가 악인가? 인간사는 보는 관점에 따라서 악이 되기도 하고 선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한 사람의 행위조차도 선이었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 악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기에 인간사 선과 악에 대한 정의는 모호하고 또 조심스럽다. 흑과 백이라는 이분법 논리 또한 마찬가지이다. 특히 무엇보다 사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그 부리는 영에 불과함에도 마치 사단과 하나님의 대결을 흑과 백의 전쟁, 선과 악의 경쟁 관계로 인식함은 무지의 극단이다.
그러면 악은 처음부터 악이었을까? 도대체 악은 언제부터 악이 되었을까? 미세한 이격이라도 시공간이 흐르면 큰 차이를 야기하기 마련이다.. 한강과 낙동강, 그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두 개의 큰 강으로서 시원은 모두 강원도 태백이다. 그런데 그 태백의 작은 배추밭 삼수령을 경계로 북쪽으로 흘러 한강, 남쪽으로 흘러 낙동강이 되었다. 작은 악을 방치하면 엄청난 악을 행하면서도 악에 대한 인식, 창조자에 대한 최소한의 눈치도 보지 않는 악의 화신이 될 수도 있다. 타락한 천사들의 수괴인 사탄은 뱀을 이용해서 그 작은 이격이란 방식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틈을 만들어 유혹하였다.
1. 작은 의심에서
마귀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깨고 들어왔다. 하나님은 아담을 세우시고 하와를 돕는 배필로 주셨고 그 아래 피조물들을 놓으셨다. 그런데 피조물 중 하나인 뱀을 이용하여 여자를 유혹했다. 여자는 남자를 유혹하였고 남자는 하나님을 거역하였다.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하시더냐.(창3:1-7) 교묘하고도 의도적인 비틀기 질문으로 시작된 창조질서의 붕괴였다. 그 비틀은 질문이 여자에게 의심이 들게 하였으며 섭섭함과 분노를 야기하였다. 그래서 여자가 이렇게 말하였다. '여자가 뱀에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여자의 대답에 이미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불신이 묻어 있었다. 분명 하나님은 '만지지도 말라'고 하신 적이 없다. 그럼에도 여자는 '만지지도 말라'고 했다고 분노에 찬 대답을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던 것과는 달리, ‘죽을까 하노라’ 하였다. 즉 '반드시 죽는다'가 아니라 '죽을지도 모른다'고 응답한 것이다. 사단은 흔들리는 믿음의 틈새를 놓치지 않았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뱀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려 ‘너희가 정녕 죽지 않으리라’ 하니 여자가 하나님을 불신하면서 사단의 말을 믿기 시작하였다. 바로 그 틈에 곧 마귀가 교만을 야기시켰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돋아난 교만으로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보았다. 탐심으로 보는 까닭에 그 열매는 더욱 보암직 하였다. 금단의 열매가 그녀의 욕망을 자극하였다. 그리고는 불순종으로 이어졌다. 사단이 우리를 미혹하는 경로가 이런 방식이다. 그 죄의 결과로 인간들은 수치심에 압도당하였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그 이전에는 그들이 벌거벗었지만 부끄러운 줄을 몰랐었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창2:25) 하지만 이제 인간들은 수치심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훗날에, 하나님께서 가죽 치마를 만들어 입히신 것을 보면 그들은 생식기를 부끄러워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왜 유독 생식기를 가리게 되었을까? 생식기관은 생명이 잉태되는 인간의 근본이요 샘이었다.
2. 훼손의 결과
이제 죄로 인해 인간의 근본적 원천이 오염되었다. 총체적인 타락이 찾아온 것이다. 그 죄의 결과로 인간에게 수치와 두려움이 들어왔고 그 후유증과 영향력은 오늘날까지 유효하게 작동되고 있다. 여전히 우리 인간들이 수치와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 훼손된 하나님의 형상들에게 곧 책임 회피라는 비겁함이 난무하였다. 아담은 하와가 먹으라 했다고 핑계를 대었고 하와는 뱀이 먹으라고 했다고 핑계를 댔다. 본래 아담은 에덴을 지켜야 하는 왕이요 제사장이었다. 그는 하와의 죄를 어깨에 짊어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책임 있는 존재였다. 그런데 자신의 면피를 위해 하와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졸렬한 존재로 전락해 버렸다.
물론, 훗날에 신약에서 또 다른 동산지기가 오셔서 그 아담의 실패를 회복하였다. 마리아가 예수의 무덤에 찾아왔을 때 예수께서 부활하여 그녀의 뒤에 서 있으니까 마리아가 동산지기인 줄 알았다고 하는 복음서 부분이 있다. 복음서 기자가 굳이 ‘동산지기’라는 단어를 사용함은 에덴의 동산지기가 실패한 제사장의 역할을 대신하여 죽은 예수의 모습을 읽게 한다.
첫 아담은 실패하였지만 두 번째 아담은 그렇게 성공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미 에덴동산의 그 창세기에서 원시 복음을 주셨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16) 한편이 된 뱀과 여자를 원수 관계가 되게 하시겠다 함은 인간을 하나님 편으로 만드시겠다는 말이다.
그리고 여자에게 저주하였다.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여기 ‘다스리다’는 ‘지배하다, 손을 뻗치다’는 ‘슈크‘에서 유래되었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 즉, 죄가 너를 지배하려고 할 것이지만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는 말이다. 과연 여자는 남자를 지배하려 한다. 이는 하나님의 저주 결과인 것이다. 그런데 남자 또한 여자를 다스려야 했다. 그러니 늘 부딪친다. 게다가 자연의 저주도 받는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3:17) 인간은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겨우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어버렸고 땅은 수고한 만큼의 결실마저도 주지 않게 되어 버렸다.
3. 저주에서 축복으로
그러나 인간에게 주어진 치명적인 저주는 이제 하나님과의 영적 교류가 끊어졌다는 사실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창3:22) 인간은 이제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 하셨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이 옳다고 하는 것을 옳다 하고 하나님이 그르다고 하는 것을 그르다고 순종하며 살도록 창조되었었다. 하나님 안에서 그 순종으로 행복과 기쁨을 느끼며 살게 되어 있었던 존재였다. 그런데 이제 인간이 하나님처럼 자기 스스로 옳다 생각하면 옳고 자기 스스로가 그르다고 생각하면 그른 것으로 판단을 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는 하나님 없이 지내려는 자가 되어버렸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긍휼을 잊지 않았다. 만약 인간이 죄로서 망가진 그 상태로 생명나무 과실을 먹었다면 그것은 저주의 상태나 다름없었다. 범죄 한 훼손된 모습으로 영원히 살아야 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 하나님은 속히 그들을 쫓아내어 그 생명나무로의 접근을 차단하였다. 이후에는 예수의 그리스도 사역을 영생의 새 몸을 얻을 기회를 주셨다. 단일한 신격 안에 본체와 능력과 영원이 하나인 세 위 하나님이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하나님으로서 예수는 하나님이다. 성부도 하나님이요 성령도 하나님인데 성경은 하나님은 한 분이라 하였다. 그것은 본질을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성경에서 곳곳에서 하나님이 당신 스스로 당신을 가리켜 ‘나’라고 단수로 쓰기도 하고 ‘우리’라고 복수로 쓰기도 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6:8) 당신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던 인간, 훼손되기 이전의 그 원초적 형상 회복을 위한 해법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다. 훼손된 당신의 형상을 회복시키려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려고, 영생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게 하려고 하나님이신 그가 우리에게 오셨다. 이 같은 신들의 구원 이야기가 성경 말씀이다. 그러니 그 말씀들 속에 약속하고 언약된 하늘 이야기, 구원 이야기, 그리고 영원한 이야기에서 믿음을 지켜야 한다. 작은 의심으로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그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사는 이들에게, 훼손된 형상이 회복된 이들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런 하나님에게 그 옛날 선지자처럼 우리가 삶으로 응답하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훼방하는도다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는도다 또 저희는 이성 없는 짐승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유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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