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2. 27. 17:47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사람이 자기 죄를 고백하면 신의 은총과 사제의 권한으로 용서받는다. 하지만 죄로 인해 생긴 후유증은 남는다.> 여기 '짐벌'은 영원한 벌이 아니라 잠시간 받는 벌이다. 참회자는 그 짐벌을 없애기 위해 애써야 한다고 카톨릭은 오래전부터 가르쳐왔다. 금식, 기도문 암송, 성지 순례, 자선 행위 등은 그 '짐벌'을 없애기 위한 노력들이었다.
실로, 중세 사람들은 사후 세계에 두려움이 컸다. '내 지은 죄를 다 청산하지 못한 채 죽으면 어쩌나?' 항시 이 고민을 안고 살았다. 그 '짐벌' 문제의 해결 방식으로 제시된 것이 면죄부였다. 이미 죽어 연옥 고통에 있는 가족조차도 이 면죄부로 낙원에 이를 수 있다는 이 해법은 어찌보면 당시 신도들의 요구에 대한 교회의 응답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사람들이 안고 사는 고민과 두려움을 치유할 수만 있다면 그것도 은혜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선한 시작은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 치부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게다가 영생과 영벌 전매권으로 사람들을 겁박하는 교회의 못된 악습까지 생겨났고 그 협박은 자금도 유효하게 먹히고 있다. 교회의 타락이 시작된 것이다.
신성한 일을 한다는 것들이
대략 70년의 포로생활 끝에, 유대인들이 돌아왔고 돌아 온 그들은 종교공동체를 재건하였다. 처음에는 은혜롭게 시작된 공동체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점들이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회당, 즉 교회의 타락과 그 곳 주도권을 쥔 엘리트들의 부조리는 심각하였다. 말라기는 그런 상항에 대한 신의 경고였다. 그 경고는 대체로 종교 엘리트들에게 향했다. 제사장은 신 앞에서 백성들을 대변하고 백성들을 향해서는 신의 뜻을 일깨워야 하는 신분이었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경계인으러서 공정과 신뢰, 즉 몸과 마음이 다 정결해야 했던 직분이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 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1:7~11)
<제사장! 너희야 말로 바로 내 이름을 멸시하는 자들이라!> 칼의 날처럼 섬뜩한 말이다. 신의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이라? 형용모순이다. '둥근 네모꼴'이라는 표현이 가능한가? 그처럼 말이 안된다는 말이다. 신의 이름을 우습게 여기는 자가 그 신을 섬기는 제사장이라니? 그런데 그 형용모순적인 작태들이 유대 엘리트 집단들에게 있어 왔다.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자행해 온 것이다. 제단에 오염된 빵을 바치고 하자 있는 짐승을 바치면서도 부끄럼을 몰랐던 그들에게 이미 신에 대한 경외심이 없었다.
하나님을 욕보이면서
말라기 경고를 들은 제사장들은 항변하였다. 자신들은 규정에 따라 제사를 집행했다고! 신을 저주하거나 험한 말을 한 적도 없다고! 그랬겠지. 그러니 누가 봐도 경건한 사람처럼 보였겠지. 하지만 하늘 상식으로 사는 예언자 눈에는 아니었다. 그들의 겉은 깨끗해 보이나 그 속은 더러운 위선자였을 뿐이었다.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면서 자기들을 과시해 온 그 일련의 행각들을 '이게 다 하나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포장한 가짜들이었다. 신령한척 햇지만 실상 그들 속은 대중들에 대한 냉소와 혐오로 가득하였다. '네깟 것들이 뭘 알아? 내가 그렇다 하면 그런 거지' 그러니 그들은 사람들 앞에 교만하였고 약한 자들에게는 포악했으며 내심 신 앞에 무도하기까지 하였다.
거인욕존천리(去人欲存天理)
‘자기를 닦아 삿된 욕심을 덜어내고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지키는 것’, 이 말은 군자의 이상을 품고 살았던 조선 선비들의 정진 방향이었다. 이런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들은 함부로 살지 않는다. 또 그러게 살 수도 없다. 하물며 신성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러니 종교 엘리트들의 그런 태도와 생각은 신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아! 너희 가운데 누가 성전 문을 닫아걸어서 너희들이 내 제단에 헛된 불을 피우지 못하게 하면 좋겠다!>는 이 격한 분노! 제단에 타오르는 불이 헛된 불일 수도 있다니! 성전 문을 닫아걸었으면 좋겠다니! 두려운 경고이다. 차라리 교회문을 닫으라는 말이잖는가!
믿음은 삶의 방식이지 방편이 아니다
종교나 교회가 역사 발전의 걸림돌이 된 지는 오래다. 특히 코로나19 펜데믹에서 보인 교회의 자세는 이미 예견된 태도였다. 1차, 2차, 3차 확산에 종교단체와 교회들은 혁혁한 공헌을 하였다. 하여 교회가 반사회적인, 몰상식한 집단으로 매도 당함이 당연하였다. 교회는 그렇게 신을 욕보였다. 교회와 연관하여 사람들이 떠올리는 단어들도 대부분 부정적이다. 헌금강요, 배타성, 편협함, 거리 전도, 광신적 믿음, 타락한 성직자들, 교회 세습, 등. 이런 현실 꼬라지에서 '차라리 성전 문을 닫아걸었으면 좋겠다'는 신의 분노에 할 말도 없다.
은혜에 대한 생생한 기억에서 출발했던 교회와 예배가 어쩌다가 사람들을 억압하는 도구로 변질되어버린 오늘날, 종교는 깊이의 힘을 잃었고 예배는 경건의 능력을 상실하였다. 고루한 예배 풍습과 기도 만능만 고집하는 '라떼 집단'이 되어버린 것이다. 예수 당시 유대교도 그랬다. 성전체제로 누릴 것을 다 누리던 자들이 정작 사람들의 아픔과 슬픔에 주목하였던 예수를 배척하였다. 자기들 전통만을 고집하더니 마침내 그를 죽이기까지 하였다. 진리를 안다 하는 엘리트들이 진리 자체이신 그 분을 죽인 것이다. 오늘 현실도 별반 다르지 않다.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 (계2:5)
"주의 영광이 그룹들에게서 떠올라 성전 문지방으로 옮겨가더니"(겔10:4)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에게 회개하지 않으면 그 촛대를 옮겨버리시겠다 하신다. 급기야 당신의 영광이 사라지지는 광경까지 보이신다. 그러니 잃어버린 핵심을 되찾아야 한다. 그 핵심은 신의 성품이다. 공동체가 그 성품을 회복하면 독점이 아니라 나눔으로, 고립이 아니라 연대로, 혐오가 아니라 존중이라는 보편 가치가 되살아난다. 신앙은 삶의 방식이어야지 방편이 되어서는 않되잖는가. 신은 그런 세상을 함께 만들자며 우리를 부르셨다.
결론
우리는 왜 신앙생활을 하는가? 남들과 구별되기 위해서? 배타적 구원을 누리기 위해서?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목적은 단지 신의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이다. 신의 힘에 기대어 내 욕망을 이루려 함이 아니라 그 욕망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평화와 공존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이다.
예수가 추구했던 삶도 종교적인 이시비가 아니라 신 앞에서의 아름다운 삶이었다. 여전히 인간은 자기를 세상 중심에 놓으려는 구심력의 지배를 받지만 신앙은 그런 인간을 타자와 하늘로 향하도록 원심력으로 이끈다. 구심력이 이기심이라면 원심력은 은혜인 것이다. 그 은혜의 힘에 이끌릴 때 우리는 삶의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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