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9. 12. 19:58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 ...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 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왕상17:8-16)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가라사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 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막12:38-44)
머리를 감고 면도를 마친 후,, 거울 앞에 서 보았다.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고 아직은 꽤 괜찮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사람들의 말대로 정말 나는 괜찮은 사람일까? 하지만 내 속 마음은 어떻게 보일까? 우리는 겉만 보고 속은 보지 못한다. 사람뿐이랴? 한 사회의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큰 낭패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세월호 사건에 대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특조위도 구성되었으니 이제 진상이 규명될 줄 알았다. 그러나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니 역시나였다. 외형상 진척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 진척이 없었다. 전 정권 초기에도 법으로 만든 위원회니 월급은 주겠지만 진상규명 활동 예산은 줄 수 없다 했던 책임 당국자들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유족들의 요구는 분명했다. 수억의 보상금보다 우리 아이들이 왜 죽었는지, 해경은 왜 구조를 포기했는지, 그 진실을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 민주정부가 들어선 지금까지도 그 명확한 진상규명이 되지 않음은 여기에 얽힌 이해 관계자들의 복마전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느끼게 한다. 원인과 책임을 묻지 않으면 참사가 반복됨에도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면 이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기 이익과 돈을 위해서라면 이 세상 기득자들이 죽기 살기로 싸우기 때문이었다. 내게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타인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악에 지배되는 우리 자신과 사회가 이런 죄의 올무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참담한 사건, 억울한 일들은 언제든지 누구에게서나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이 우리 사는 세상의 맨 얼굴이다.
정말 신앙이란 무엇인가?
신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복 받는 길? 불행을 퇴치하는 보험? 정년 이런 것만이 신앙의 본질일까? 진짜 신앙은 인간이 누구인지, 내가 누구인가를 발견하는 일이다. 내가 신이 아님을, 절대자가 아님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저 짧은 생을 사는 피조물일 뿐이다. 그러나 그 피조물이 세상 어떤 것보다 소중한 신의 자녀인 것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신앙이다. 나라는 존재가 내 것이 아니라 신의 선물임을 깨닫는 순간, 새삼 겸손해지고 매 순간 감사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된다.
예수는 어느 율법학자의 삶과 가난한 여인의 삶을 비교하셨다. 누구의 삶에 점수를 주셨을까? 예수는 제자들에게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셨다. 이유가 있었다. 예수는 그들이 좋아하는 일들을 열거하였다. 예복 입고 다니기, 장터에서 인사받기, 드러나는 자리에 앉기 등. 이런 사람들이 경제적으로는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종교적으로는 위선을 떨었기에 질타하셨다. 이런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 함은 위선과 거짓으로 점철된 삶,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려는 삶에 전염되지 말라는 것이요 부러워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멋지게 보이고 칭찬받는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눈에 멋지게 보이는 것을 더 좋아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내가 누구인지를 성찰치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성전에서 사람들의 헌금 장면을 보았다. 헌금함이 있는 여인의 뜰에는 나팔처럼 생긴 13개의 헌금함이 놓여있었는데, 사람들이 직접 돈을 넣은 것은 아니고 사제에게 헌금액과 헌금 목적을 말하면 사제가 지정된 헌금함에 그 돈을 넣었다. 그러니 부자들의 헌금 액수와 목적, 그리고 가난한 과부의 헌금 액수와 목적을 예수는 다 들을 수 있었다. 가난한 한 미망인은 그녀가 가진 렙돈 두 개를 넣었다. 오늘로 환산하면 약 500원 정도 되는 금액이었다. 그녀는 렙돈 두 닢에서 한 닢만 내고 한 닢은 가지고 있을 수도 있었음에도 가진 걸 다 바쳤다. 예수는 그 모든 장면을 보고 있었다.
다른 것에 관심 두고 사는 인생들
당시 제자들은 다른 것에 관심하고 있었고 또 흩어져 있었다. 자기들의 선생 예수가 무엇에 관심하고 있는지, 무엇을 보고 있는지 그들은 알지 못했다. 예수는 그런 제자들을 곁으로 불러 모아 말했다.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헌금함에 돈을 넣은 사람들 가운데, 저 가난한 미망인이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헌금하였다." 미망인의 적은 헌금을 부자들의 많은 헌금보다 더 높게 평가하신 것이다. 이유는 "모두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떼어 넣었지만 이 미망인은 가난한 가운데서 가진 것 모두, 곧 자기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고 보셨기 때문이다. 예수가 보신 기준은 분명했다. 그는 헌금한 금액을 보신 것이 아니라 헌금하는 마음을 보셨다. 겉모양이 아니라 속마음을 보시고 기뻐하신 것이다.
예수는 이 여인을 가난하다고 평가했다. 대체 어느 정도 가난한 처지였을까? 여기 "가난하다"에 쓰인 원어 <프토코스>는 "극빈자"나 "빈민"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이다. 즉, 그 여인은 조금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구제를 받아야 할 극빈자였다는 말이다. 당시 사회에서, 미망인들은 법적으로 자기 재산권을 임의로 행사할 수 없었다. 서기관이나 바리새인 같이 사회적 명망가들에게 그 관리권을 맡겨야만 했다. 재산을 대신 관리하면 당연히 수수료가 붙게 되고 그중 고약한 명망가는 미망인 재산에서 부당이득을 취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심지어 재산 전부를 착복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서 예수가 그들 집단을 가리켜 과부들의 가산을 삼켰다고 책망했던 것이다.
당시의 부자들 중에는 그런 식으로 재산을 축적한 율법학자들도 많았다. 그런 자들이 부정하게 축적한 그 넉넉함에서 헌금을 하곤 하였다. 하지만 그 헌금액이 아무리 많은들, 설령 전부를 바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심이 분명하다. 예수가 미망인과 부자의 헌금을 비교한 초점은 돈의 액수가 아니었다. 그 사람의 삶과 인격, 돈의 성격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의 사람들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을까? 또 어떻게 살고 있을까? 겉으로 드러난 자신들의 모습을 좋아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런 자신들을 좋아하고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을까.
내일 염려는 내일로
여기 여인의 경우, 당장 먹을 것이 염려되어 보이는데도 무리하게 생명 같은 돈을 바쳐야 했나? 간절함이었다. 그녀는 가진 돈이 작았지만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무언가 드리고 싶었다. 예수는 이런 간절함을 높게 평가하셨다. 사렙다 미망인의 모습도 그렇다. 더구나 사렙다는 시돈에 있는 마을이니 그녀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이방 여인이었음에도 하나님의 사람을 위해 아들과 먹을 마지막 음식을 내놓았다. 이런 사람들에게 내일이 있을까? 전 재산을 모두 바치고 나면 내일은 어떻게 살라고? 이렇게 사는 사람들에게 내일은 어떻게 준비될까? 삶에 염려가 되기는 누구나 마찬가지이다. 가난한 두 여인들은 소유한 그녀들 재산 때문에 내일이 열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그녀들의 내일이 열린 것이다.
가난한 여인들처럼 있는 것 모두 털어 열심히 헌금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성전에서 물건과 돈을 사고파는 것에 분노하여 상인들의 좌판을 뒤엎었던 예수이다. 이 이야기는 그 일 이후에 일어난 일이다. 더구나 그는 고난의 길을 남겨두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성전에 헌금 열심히 하라고 가르쳐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돈이 필요치 않았다. 게다가 자신을 죽이려는 성전 기득권자들에게 헌금하라고 독려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헌금에 대한 말이 아니다. 자신의 체면과 멋, 자기 잇속을 채우는 율법학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이 가난한 여인, 하나님은 이들 중 누구를 더 기뻐하셨을까?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당신께 모두 드리는 삶을 살겠습니다.' 이런 삶이 귀한 삶이다.
하나님은 율법학자와 부자들이 드리는 제사와 제물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하나님을 희망하고 자기 모든 것을 내맡긴 가난한 여인의 제사를 칭찬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라.”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자.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삶이요 자신에게도 복된 삶이다. 소망을 품은 여인을 칭찬하신 그분께서 희망과 기쁨을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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