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시간으로

2021. 8. 23. 00:15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시는도다.(셀라) 그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의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 그의 공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의 손에서 나오니 그의 권능이 그 속에 감추어졌도다. 역병이 그 앞에서 행하며 불덩이가 그의 발 밑에서 나오는도다. 그가 서신즉 땅이 진동하며 그가 보신즉 여러 나라가 전율하며 영원한 산이 무너지며 무궁한 작은 산이 엎드러지나니 그의 행하심이 예로부터 그러하시도다."(합3:2-6)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22~27)

 

신자로서 평화를 사랑하지만 일상 현실은 전쟁터 같다. 어두운 시대를 살았던 하박국 예언자의 시절도 그랬었다. 그 와중에 그의 경고는 우리가 어디에 희망을 두고 살아야 하는지를 일깨워준다. 주전 612년에 앗수르가 무너지고 바벨론이 등장한 이후 시대를 살았던 하박국, 이름 뜻은 '포옹하다', '씨름하다'였다. 불의가 일상이 된 세상살이에 그는 이미 지쳐버렸다. 약탈과 폭력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다툼과 시비가 그치지 않았으며 율법은 해이해졌고 공의는 시행되지 않았던 세월이었기에 하염없는 상심의 세월을 살았던 것이다.

 

경이를 상실한 세상에서

악인이 의인을 삼키는 현실을 보노라면 하나님은 대체 무엇을 하고 계신가를 묻고 싶고 싶다. 늘 그렇듯,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함축적이었다. "자기 힘이 곧 하나님이라고 여기는 이 죄인들도 마침내 바람처럼 사라져서 없어질 것이다."(합1:11) 정의는 반드시 시행된다는 것, 비록 더디더라도 그때를 기다리며 살라는 말이다. 부당한 이익을 탐하는 이들, 피로 마을을 세우고, 불의로 성읍을 건축하는 이들의 수고가 다 헛수고가 될 날이 속히 왔으면 좋겠다. 그날과 시간을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아침저녁의 시원한 바람으로 곧 가을이 다가오듯이 하나님의 시간은 어김없이 다가오고 있으리라. 그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합2:4)고 하지 않았던가. 하박국의 탄식시는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탄식, 악인들에 대한 심판 요구,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기억의 회복, 찬양과 기도였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놀란다고 고백하는 하박국, 그 놀람은 거룩함 앞에 선 이들의 공통된 경험이다.

 

일상이 놀라워 찬양하는 시인의 영적 감수성이 영혼이 굳어버린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무덤덤한 인생들과 비교된다. 새로 돋는 나뭇잎이나 꽃을 보고 경탄하는 사람에게 '웬 호들갑? 때가 되니 꽃이 피는 게 당연한 것을 가지고!'라고 핀잔을 놓지만 실상 가엾은 인생들이다. 오늘의 사람들에게 부족한 점이 바로 이런 것이다. 놀라움이라는 정서가 부재되어 있다. 경이로움으로 사노라면 하나님의 무한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경험하거늘 그것에 무감각하니 안스럽다. 일상의 놀라움, 또는 경이로움은 말씀으로도 경험되었다. 유대인들은 가정회당성전에서 낭송되는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의 역사 속에 동참하였다. 낭송되는 그 사건들을 과거에 완료된 일이 아니라 지금도 지속되고 있음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그런 경험이 있기에 예언자 하박국은 "주의 일을 우리 시대에도 새롭게 하여 주십시오"(합3:2)라고 기도할 수 있었다. 그가 말한 '주의 일'이중적 의미이다. 이방 압제자들로부터의 벗어남, 그리고 악인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바로잡힘이다

 

그때를 기다리며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내다보며 노래하기를 "하나님이 데만에서 오신다. 거룩하신 분께서 바란 산에서 오신다. (셀라) 하늘은 그의 영광으로 뒤덮이고, 땅에는 찬양 소리가 가득하다"(합3:3)고 하였다. 뭔가 기세가 휘몰아치는 느낌이다. 데만은 에돔의 중심 도시이고 바란 산은 이스라엘 남쪽 지역으로 가데스바네아 인근이었다. 데만까지 언급하였으니 하나님의 통치가 이스라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현현을 실감 나게 설명하기 위해서 특정한 장소를 거명하곤 했던 고대인들의 전통어법을 따라 표현한 이 어법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빛, 그 밝기가 햇빛 같고 두 줄기 불빛이 그의 손에서 뻗어 나온다는 표현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을 빛으로 표상하는 기법 또한 오랜 전통이었다. 이사야 예언자도 "주님께서 백성의 상처를 싸매어 주시고, 매 맞아 생긴 그들의 상처를 고치시는 날에, 달빛은 마치 햇빛처럼 밝아지고, 햇빛은 일곱 배나 밝아져서 마치 일곱 날을 한데 모아 놓은 것 같이 밝아질 것"(사30:26)이라 이 전통 어법을 사용한 바 있다.

 

그렇다. 하나님은 약음과 편법이 난무하는 현실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오신다. 진군하듯 다가오신다. 하늘은 그분의 영광으로 덮이고 땅은 찬양 소리로 가득하다는 이 장대함, 그 광경을 그리고자 예언자 하박국은 시각적, 청각적 이미지를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 하나님이 질병을 앞에 세우시고, 전염병을 뒤따르게도 하신다. 그분의  심판 두려움을 나타내기 위한 문학 표현으로서 더 크고 어머 무시한 일들까지 펼치실 분이나 인간의 이해 범주로 표현한 기법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간이 어찌 다 헤아리랴? 욥은 하나님께서 혼돈의 괴물인 베헤못과 리워야단도 다스리신다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정녕 하나님은 자비로운 분이시다. 하지만 결코 불의를 적당히 넘어가시는 분이 아니다. 사자가 포효하면 온 숲 속 짐승들이 떨듯이,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면 오만한 인간의 자부심은 속절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가 멈추시니 땅이 흔들리고, 그가 노려보시니 나라들이 떨도다. 언제까지나 버틸 것 같은 산들이 무너지고, 영원히 서 있을 것 같은 언덕들이 주저앉는도다. 그의 길만이 영원하도다"(합3:6). 예언자의 장대한 역사의식에서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이 느껴진다.

 

길이 아니면 일찍 끝나니

현실에서 제국의 능력은 거대하게 느껴진다. 가진 자들의 능력이 대단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 속에 등장했던 모든 제국들이 사라졌다. 그 많던 능력자들도 다 무너졌다. 어느 사회든 약자들에 대한 폭력과 착취를 용인하는 체제는 이미 그 속에 시한폭탄 하나를 품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제국은 전체주의를 지향하기 마련이다. 다름을 용납하지 않기에 다른 목소리 내는 이들을 핍박하고 몰아내려 한다. 조직이나 집단의 이해를 개인보다 우위에 두기 때문이다. 전체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개인의 자유를 유보할 수 있음을 당연한 미덕이요 의무라고까지 여기기 때문이다. 한 때의 독재자였던 무솔리니는 말했다. "국가 안에 모두가 있고 국가 밖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으며 국가에 반대하는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전체주의는 하나님 나라와 무관하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작은 이들이 더 존중받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모든 지체가 다 소중하지만 특히 연약한 지체가 소중하다고 말한 바 있다. "몸의 지체 가운데서 비교적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들이 오히려 더 요긴하니 우리가 덜 명예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지체들에게 더욱 풍성한 명예를 덧입히고 볼품없는 지체들을 더 아름답게 꾸며주나니."(고전12:22-23) 우생학적으로 보면 이런 자세는 어리석어 보인다. 효율적이지도 않아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효율성을 따지지 않는다. 포도원에 맨 마지막에 온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게 하나님의 마음이다.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을 품에 안는 게 하나님의 마음인 것이다. 우리는 이런 질서로 부름 받은 신의 자녀요 그 거룩한 성품으로 살아야 할 성도이다. 사랑의 길, 진리의 길, 십자가의 길, 이 길만이 영원하다. 길답지 않으면 일찍 끝나버린다는 노자의 말처럼, 길이신 주를 따라 걸어야 한다. 그런 삶이 하나님의 시간을 사는 삶이요 그것이 곧 영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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