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8. 22. 21:17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 이에 저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취하였더니 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그날에 내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 하시니라. 고멜이 또 잉태하여 딸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사하지 않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저희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고멜이 로루하마를 젖뗀 후에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호1:2-9)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7:15~17)
광복절 주일이면 교회 강단에서는 의례 출애굽 배경의 설교를 많이 한다. 아마도 이집트 압제로부터 해방, 자유한 내용이다 보니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벗어남을 기리는 절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성서의 해방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이기 이전에 인간의 실존적이고 본원적인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인간의 그 본원적 해방, 실존적 자유는 죄와 관련된다. 이 연관관계에서 고군분투 했던 한 예언자가 있었다. 주전 8세기에 활동했던 북이스라엘의 예언자 호세아였다. 대체로 예언자들의 삶은 인간적으로 불행했는데 그중에서도 호세아는 유독 더 불행하였다. 한 여자와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자식도 셋이나 얻었지만 바람기 많았던 아내는 정부를 따라 집나가기를 밥 먹듯 하였기 때문이었다. 어느 남자가 그런 여자를 용서할 수 있을까?
납득되지 않는 하나님
그런데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납득할 수 없는 명령을 하였다. 정욕에 이끌려 다른 남자를 따라간 아내 고멜을 다시 데려 오라 하였다(호3:1~3). 불쌍한 여자이니 두 눈 감고 받아들이라는 정도가 아니라 사랑하라는 말이었다. 아무리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이는 분명 불합리하고 사람 감정을 고려치 않은 명령이었다. 종종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이런 터무니없는 명령을 하실 때가 많다. 그러 때마다 우리는 반문하였다. "이게 뭡니까? 하나님! 이건 아니지요." 그런데 초기 교부 터툴리아누스는 이런 말을 한 바가 있다. "나는 불합리하기에 믿노라" 즉, 인간의 이성과 지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앎의 대상이지 신앙의 대상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에게 있어 신앙이란 지금 내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어도 하나님에 대한 전적 신뢰에 바탕하여 그분의 뜻을 따름, 그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하나님의 불합리한 명령들은 성서 곳곳에서 볼 수 있고 또 그 말도 안 되는 명령들을 신앙적으로 받아들여 이행한 이들이 있었다.
아브라함에게 100세라는 늙은 나이에 얻은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가 잘 아는 그 한 예이다. 그럼에도 당시 아브라함은 그 명령을 수행하려 했다. 이행 당시 그의 심정은 얼마나 두려웠고 전율스러웠을까? 하기야 어떤 신학자는 바로 이런 감정, 즉 두려움과 떨림이 종교 체험의 본질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출애굽 한 히브리인들에게 큰 물결로 넘실대는 검푸른 홍해 바다로 뛰어들라는 명령도 부조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모세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 부조리한 명령을 이행하였다. 이런 명령, 또 이런 이행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에서만 가능하다. 그렇게 하다가 죽으면 '그 또한 하나님의 뜻이니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리이다'하는 믿음 말이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인간의 지혜보다 낫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의 강한 것보다 낫다는 신뢰가 있었기에 신자가 더욱 신자다워지고 그런 신자들로 인하여 하나님이 더욱 하나님다워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정 이해하기
호세아 역시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행하여 정부를 따라 달아난 아내를 찾아갔다. 좋은 말로 이르고 위로하며 비싼 선물까지 주었다. 이제까지의 일은 다 털고 가정생활을다시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가슴이 쓰리고 분통 터질 일이었지만 아내의 배신을 끌어안은 것이다. 마침내 아내 고멜은 호세아에게 돌아왔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기는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다시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정부를 따라가 버렸다. 육체의 달콤한 삶을 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환락의 끝이 뻔했다. 몸이 망가지고 마음이 피폐해지며 빚까지 늘어 옹색한 처지가 되자 사람대접받지 못할 만큼그녀의 상황은 악화되어 있었다. 이번에도 호세아는 아내를 찾아가 빚을 갚아주고 그녀를 집으로 데려왔다. 참으로 대단한 열부였다. 그런데 호세아는 자신이 겪은 그 쓰라린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읽었다. 툭하면 배신을 때리는 당신의 백성들로 괴로운 하나님의 심정을 경험한 것이다.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때문에 속상해하시는 하나님, 자초한 일들로 인해 그들이 겪는 고통 때문에 마음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예언자는 자기 고통을 통해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호세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화해 매개자가 되고자 했다. 하지만 화해라는 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가족 간일지라도 한번 삐지면 일주일간이나 말 한마디 없이 버티는 게 사람들이다. 불편하게 함으로 상대에게 보복하겠다는 심보 때문이다. 남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려면 먼저 자기 마음을 뾰족하게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자기 마음이 날카로워지면 가장 먼저 상처를 입는 것은 자기 자신임을 모른 채 말이다. 하여 예언자는 위, 즉 하나님을 보기보다 아래, 즉 현실만을 보고 그것에 집착하려는 이스라엘을 일깨우고자 외쳤다. 그는 하나님께 잘못하였음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라고 설교하였다. 삶의 안전을 보장해줄 것이라고 믿는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신뢰는 그 근본부터가 잘못된 것임을 강해하였다. 당시 상황에서 그 백성들이 신뢰하였던 구체적인 것은 외세였다. 앗시리아의 도움으로 복잡한 국제 정세의 혼돈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생각들을 집권자로부터 중산층, 귀족, 일반 백성들 모두가 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니 신앙은 방편이 되었고 돈과 인맥만이 현실을 지탱해줄 힘이라 여겼던 것이다.
품이 넓으신 그분께
예언자 호세아는 외쳤다. 하나님은 돌아오는 이들을 내치지 않는다고. 품이 넓은 분이라고. 돌아오면 다른 삶이 시작된다고. 무엇보다 고질병을 치유받는다고 말이다. 고질병이란 오랫동안 낫지 않아 고치기 어렵게 된 병이다. 낳을 듯하다가는 다시 재발하곤 하는 일종의 중독이다. 중독은 웬만한 의지로 벗어나기 어렵다. 알코올 중독, 일 중독, 약물 중독, 폭력 중독이 그렇듯이 말이다. 중독 중에서도 가장 광범위하게 만연되어 있는 중독이 죄 중독인데 하나님께 반역하곤 하는 인간의 고질병이 바로 그런 것이다. 바울 역시 이 고질병 때문에 시달렸던 사람으로서 자기 실존적 고민을 다음과 같이 되뇐 바가 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롬7:15-17) 그는 속에서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어두운 정열을 '죄'라 했다. 그래서 "나는 비참한 사람이라.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는가?" 하고 탄식했던 것이다. 그러나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선언할 수 있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노라.”(롬7:25)
하나님은 우리의 고질병을 고치고자 하신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고자 하신다. 우리 속에 사랑받을만한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당신 스스로 우리 속에 사랑을 심어놓으시고 사랑해 주셨다. 호세아 예언자의 파탄난 가정, 그 과정에서 거듭하여 회복을 꾀하도록 참음과 화해를 도모하게 하신 하나님, 더럽고 미운 것일망정 사랑하여 아름다운 것으로 변화시키시는 역사, 이것이 구원이다. 호세아는 이런 사랑을 받은 이들의 행복을 식물적 상상력을 통해 표현하였다. 나리꽃처럼 피어나는 삶,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든든한 삶,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는 삶(호14:5~7), 이것이 기도를 들으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삶이다. 오늘날, 쓰레기 같은 삶을 살면서 다른 이들의 삶에 악취를 풍기는 줄도 모른 채 사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그런 세상에 하나님의 자녀들 또한 살아간다. 섞여 살면서 물들기도 하고 더러는 더한 분탕질을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을 유심히 보는 이가 있다. 사람의 눈길은 물론이요 하나님의 눈길이 우리를 향하고 있다.
결론
요즘 내 삶, 우리 삶의 처신을 생각하면 마음이 착잡할 때가 많다. 말이 좋아 신앙인이지 나리꽃처럼 피어나는 삶은커녕,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곶게 뻗어오르는 삶도 못되고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는 삶에도 이르지 못하니 부끄럽기만 하다. 우리의 이 고질병을 고쳐주실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천관녀의 집으로 향하는 말의 목을 자름으로써 습관적 삶을 청산했던 김유신의 검처럼, 일상의 관성으로 길들여진 미련과 욕심으로 반역하는 우리 고질병을 고쳐주시는 하나님께로 돌이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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