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8. 22. 20:09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혔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1-3)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 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3:8-9)
지은 지 3년 된 집을 수리코자 지붕을 뜯었는데 놀랍게도 도마뱀 한 마리가 꼬리에 못이 박힌 채 몸부림치고 있었다. 공사장 인부들은 그 도마뱀이 3년 전 지붕 공사 때 박힌 그 못에서 3년이나 살아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공사를 중단하고 사흘 동안 지켜보았다. 비밀은 곧 풀렸다. 다른 도마뱀이 어두운 지붕 밑에서 먹이를 물어다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극한의 상황에서 다른 도마뱀이 그 고통을 나누며 함께 지내왔던 것이다.
극한 상황
한낱 미물인 도마뱀이 이러할진대 만물의 영장이라 자처하는 우리 인간은 어떠할까? 극한 사항에 내몰리면 인간도 그럴게 할 수 있을까? 30대 말,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3년을 보내고 살아남아 쓴 책 내용에, 거기서 "나는 무엇일까?"를 고민했다고 한다. 나는 '누구'일까가 아니라 나는 '무엇'일까를 고민한 것이다. <죽음의 수용소>라는 회고록에서 그는 말한다. "수감자들은 매일 저녁 옷을 벗고 몸에 있는 이를 잡으면서 자기들 알몸을 바라보았다. 그때 산 송장이 다 된 자기들 몸뚱이를 바라보곤 하였다. 마지막 남아 있던 피하 지방층이 사라지고, 몸이 해골에 가죽과 넝마를 씌워 놓은 것같이 됐을 때 우리는 우리 몸이 자기 자신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낀다. 내장 기관이 자체의 단백질을 소화시켰고, 몸에서 근육이 사라졌다. 그러자 저항력이 없어졌다. 같은 막사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죽어 나갔다."
당시 상황은 모든 사람이 먹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었던 인간 이하의 처지였었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인정을 받지 못하는 세계, 자신들을 단지 처형 대상으로 전락시킨 그런 세계에 내동댕이쳐진 신세였었다. 그런데 그 극한적인 상황에서도 남을 배려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말 한마디와 빵 한 조각을 나누어 주는 고귀한 인간들이 있었던 것이다. 빅터 박사는 "그것은 나를 감동시킨, 빵의 의미를 뛰어넘는 것"이었다고 그는 회고하였다. 같은 인간인데도 수용소 안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는 하늘과 땅만큼 달랐고, 심지어 같은 피해자끼리도 하늘과 땅만큼 달랐다. 같은 피해자 처지에서도 금니나 신발 하나에 눈이 어두워 다른 피해자를 못살게 구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한 사람이라도 희생자를 줄이려고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끝내 입을 열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인간의 존엄성
인간이 지닌 자유 중에 최종적인 자유가 있다. 그것은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다. 인간 이하이기를 강요하는 세상에서도 인간은 그 존엄성을 잃지 않을 자유가 있는 것이다. 수용소에서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귀하디 귀한 빵을 나누던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물론 그런 사람이 극소수였지만,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인간의 이런 자유는 빼앗아갈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라도, 어떤 환경에서도 인간은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그러니 인간이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될 것인가는 전적으로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외적 환경이 아닌 것이다.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통은 동일하나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동일하지 않을 수 있다. 산다는 것은 이러한 고통과 시련을 감내하는 여정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 앞에서 무너지고 또 어떤 사람은 그것을 이겨낸다. 즉 고통과 시련 앞에서 어떤 태도를 지닐 것인가는 사람이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고통은 그 의미를 찾는 순간 더 이상 고통이 아님은 세상에 욥처럼 '이유 없는 고통'은 있어도 '의미 없는' 고통은 없기 때문이다. 소설가 박완서는 남편을 잃은 그해에 26살 자식을 연이어 잃었다. 자식을 앞서 보내는 고통을 겪었으니 그 참담이야 오죽했으랴. 시간이 흘러 어떤 이가 “그 고통을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라는 물음에 작가는 말하였다. "고통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견디는 겁니다" 누군가는 '고통 없는 삶은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 고통 앞에서 어떤 태도를 지닐 것인가는 나 자신에게 달려 있다. <이기적 유전자>의 책 요지처럼, 정말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기만 할까? 삶의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그것은 신화에 불과하다. 인간은 본성상 선함을 선호하는 존재이다.
배려는 기적을 낳는다
과거 로마인들은 연민, 즉 자비와 긍휼을 '영혼의 질병'으로 여겼다.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는 세상을 다스릴 수 없으니 무자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세상에서 예수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라고 가르쳤다. 그의 삶 자체가 그랬다. 사람에게 따뜻했고 겸손했으며 정중한 사랑의 삶을 사셨다. 그 단적인 예를 '오병이어 기적(요6:3~12)'에서 본다. 이 기적은 작은 것에서 시작되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온 이는 한 '아이'였다. 아이는 자기 배를 곪아가며 마음을 담아 예수께 그것을 가져왔다. 제자 안드레는 그게 '얼마나 되겠냐'라고' 시답지 않게 보았으나 예수는 아이의 정성을 보시고 그의 작은 것을 존중하여 기적을 행하셨다. 아이가 가져온 것을 그대로 받아 사용하심으로써 놀라운 역사에 그 아이를 참여시킨 것이다. 당시에 어린이는 인간 이하로 무시당했고 인격으로도 존중받지 못했던 존재였지만 예수는 그런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셨다.
훗날, 수제자 베드로는 비로소 예수의 이 미음을 체화하여 그의 편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 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3:8-9)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자유와 해방을 경험했다. 그는 비좁은 감방에서 날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는데 하나님은 꽃이 만발하고 새가 하늘을 나는 넓은 자유의 공간에서 그에게 응답하셨다. 그 자신의 삶에서 예레미야의 희망을 경험한 것이다.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에 그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1-2) 인간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극한적인 상황에서도 의미를 추구할 수 있는 존재이다. 내 목숨 하나 부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다른 이의 고통에 공감하고 은밀히 빵 한 조각 나누어 줄 수 있는 고귀한 존재가 바로 인간인 것이다.
결론
그러기에 코로나 팬데믹과 기후위기라는 전대미문의 오늘 상황이지만 희망은 있다. 영혼의 백신이라는 이 희망에서 고통과 시련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다. 그러니 그 자유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라. 그러면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시118:5)는 시인의 찬양이 우리의 고백이 된다. 새삼 인간과 삶이라는 화두로 생각에 골몰했던 철학자 키엘케고르의 오래전 독백을 호출해 본다.
-삶의 끝에 서면
우리 또한 자신이 했던 어떤 일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나니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하는 동안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뿐이라.
우리는 행복했는가? 다정했는가? 배려하고 이해했는가? 무엇보다도 사랑했는가?
우리 영혼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알게 되는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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