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8. 1. 18:04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그 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 아비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지 아니하였고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삼상18:1-4)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15:9-15)
코로나 방역이 길어지고 생활 반경의 제약이 지난하니 사람들이 치쳐간다. 사람들마다 불평 불만이 팽배해 가고 분노와 적개심도 높아져 가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 자기들 이득을 꾀하고자, 진영적 이해득실을 계산하여 분열을 조장하고 분노를 부추기는 이들이 등장한다. 안타깝게도 이상한 교회들이 이 대열의 앞장 서고 요상한 기독교인들이 참여하고 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고 예수의 가르침도 한마디로 사랑임에도 말이다. 잡히기 전, 비장함으로 제자들에게 마지막 남긴 유언도 사랑하라는 명령이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라"(요15:12).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고 '말'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여라’가 아니다. 행동하는 사랑을 말하였다. 그는 말로 사랑하지 않았다. 기득권자들의 방해와 권력자들의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 사랑으로 살았다.
가장 큰 사랑
그런데 좀 이상한 선언을 하셨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가 아니라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니? 뒤이은 말은 더 놀랍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친구란 평등한 관계이다. 위아래 상하 관계로는 친구가 될 수 없다. 모든 관계 중 친구 관계만큼 동등하고 자유로운 관계는 없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 그런 관계가 친구이다. 이런 상대가 존재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서로가 즐겁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전 이야기는 그 한 예이다.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가 죽이려는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은 사랑"이라 했다. 이런 친구 요나단이 전장에서 죽자 훗날 다윗은 애가를 지어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다"(삼하1:17-27)며 슬퍼하였었다.
세상에는 엄격한 위계사회가 작동되고 있다. 오죽하면,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는 말까지 있겠는가! 이는 고대로 갈수록 더 심하였다. 예수 당시에도 엄격한 가부장적 질서는 여전하였다. 그런데 그런 사회에서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셨다. 가히 혁명적인 선언이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단지 위에서부터 주어지는 수직적이고 일방적인 시혜로 여겨왔던 그 사회에서 이제는 그렇지 않다 하셨다. 아니 더 나아가 신의 그 사랑이 평범한 친구간의 사랑과 같다고까지 하였다. 친구가 되면 상하가 사라지고 귀천의 장벽도 허물어진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그 이유는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종들은 그 신분이 종이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하지만 친구는 다르다. 종이 부득이하게 한다면 친구는 기꺼이 한다. 예수는 우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친구라 부르겠다 하신 것이다.
친구로 오신 하나님
성서에는 인간이 하나님의 친구가 된다는 묘사들이 많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나의 벗"이라 부르셨고(사41:8) 모세를 자기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대면하여 말하셨다.(출33:11) 예수는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사람들이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도다" (마11:19)라고 말하셨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이신 예수는 나사로의 죽음 소식을 들으셨을 때에도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11:11)고 하셨다. 제자들을 향해서는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눅12:4)고 했다. 심지어 제자 유다가 배신하여 겟세마네 동산으로 무리를 이끌고 와 입을 맞출 때에도 예수는 그를 일러 "친구여! 네가 하려는 일을 행하라"(마26:47-50)고 말하였다.
<사랑은 서로를 바라보는 데 있지 않고 같은 방향을 함께 주시하는 데 있다> 이 멋진 말은 생텍쥐베리가 언급한 말이다. 친구들은 나란히 서서 공동의 관심사를 공유하는 관계이다.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계약도 공동의 비전에 기초한 관계였다. 예수는 우리를 당신의 비전을 공유하는 친구, 즉 동반자로 부르셨다. '너희는 나의 종이 아니라 나의 협력자다. 나는 너희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였다. 내가 하고자 하는 모든 것과 어찌하여 그것을 하고자 하는지를 모두 말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모든 비밀을 너희에게 말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에 파트너가 되는 영예를 주신 것이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 이 사랑은 감정의 사랑이 아니다. 행동의 의지로 표현되는 사랑이다. 행동으로 표현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감정도 소중하지만 행동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사랑이라
바울은 말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혹, 어떤 이들은 예수를 향하여 말한다. '당신에게 무슨 권리가 있어 우리에게 서로 사랑할 것을 요구합니까?' 그러면 예수는 이렇게 답하실 것이다. '어느 누구도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을 보일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렸노라.' 주님은 당신의 친구인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 당신이 먼저 행동하신 그 사랑을 오늘 우리에게 요청하신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시면서 말이다. 성서 66권을 줄이고 또 줄이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로 압축된다. 이를 더욱 한 단어로 압축하면 '사랑'이다.
인도의 간디가 어느 날 막 출발하려는 기차에 올라탔다. 순간 그의 신발 하나가 벗겨져 플랫폼 바닥에 떨어졌다. 기차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기에 간디는 그 신발을 주울 수가 없었다. 그러자 간디는 얼른 나머지 신발 하나를 벗어 그 옆에 떨어뜨렸다. 그 이유를 묻는 동행자에게 간디는 말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바닥에 떨어진 신발 하나를 주웠다고 상상해보십시오. 그에게는 그것이 아무런 쓸모가 없겠죠. 하지만 이제 나머지 하나마저 갖게 되면 유용하겠죠?"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사는 이들은 부지부식간에 그 사랑이 표출되는 것이다.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는가? 말과 혀로만 사랑함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 각팍하고 매몰찬 세상에서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이루기 위해 사랑하며 살라고 지금도 그 사랑으로 부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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