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8. 1. 16:59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거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를 삼았었나니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 달려올 것은 나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사55:1~5)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눅14:12~14)
웬일로 바리새파 두령이 예수를 초대하였다. 대중에게 영향력 있고 율법에도 통달한 예수, 그를 부한 이웃으로 초대하였던 것이다. 그를 청하여 자기편으로 만들거나 틀어지면 제거할 속샘도 있었다. 앞선 안식일 논쟁에서 자기들 견해를 거부하지 않고 합류했더라면 예수는 그들의 부한 이웃이 되어 함께 기득권을 누리며 더욱 유명 인사가 되었으리라. 그러나 그들의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았으니 피차 함께 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렇다면 결별이 불가피했고 십자가는 그 결별의 결과였다. 예수는 세상에 부한 이웃으로 오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렇게 오지 않으리라. 오히려 지극히 작은 자를 자신을 동일시하셨다.(마25:40) 신자가 현실 삶으로 간증해야 할 예수는 구원과 천국 메시야 이전에, 연대로 함께 해야 할 작은 자들이었다.
인간들이 원하는 나라
하지만 현실의 사람들은 반대로 산다. 예수를 믿고 성경을 사랑한다면서도 예수와 반대로 살고 성경과 다르게 산다. 신앙생활은 투자가 되어버렸고 헌금은 구원 상품을 사는 대가가 되어버렸다. 구원 판매와 천국 거래로 사람들을 미혹는 작금의 거래소(교회)를 향한 경고는 준엄하기 그지없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땅의 상고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 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계18:10~13) 사람 영혼을 돈으로 계산하는 바벨론 성, 크고 견고한 성, 현실의 인생들이 사로잡혀 부역하고 한숨 쉬게 하는 도성 바벨론을 질타하고 있다.
이 도성의 실체를 아는가? 존재하는 사탄은 사람들을 속이되 본명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광명의 천사로, 신의 일꾼으로, 폼나는 명품으로, 사회사업가로 미혹된다. 이 분별을 하지 못하면 신앙은 무지가 되고 종교는 독이 될 수도 있다. 이미 칼 맑스같은 이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 했으니 제대로 된 통찰이었다. 종교가 자기 역할, 순기능을 하지 못한채 오남용, 나아가 악용으로 역기능에 이르면 이는 아편인 것이다. 그럼에도 구원일 수 없는 것을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팔아먹는 현실이다. 하기야 잠시나마 그 아편이 근심을 잊고 고통을 모르게 해 준다. 그러니 장사가 되는 것이다. ‘네 장막 터를 넓히라'고, '불우이웃을 돕자’고 현수막으로 요란을 떨고 교회당 건축에 몰입하여 왔다. 교회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벌어지는 현실들이다. 크고도 견고한 성, 바벨론은 이 땅에 교회라는 별명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 큰 도성 바벨론에 오는 손님들은 구매력이 있어야 했다. 통용되는 구매력이 돈이니 가히 돈은 이 시대의 교회를 만들기도 하고 키우기도 하며 그 반대로 죽이기도 한다. 당연히 돈 많은 회장님과 막노동하는 일꾼이 교회에서 차별을 받고 인격과 신앙 수준까지 액면 헌금으로 평가를 받는다. 새삼스럽지도 않다. 초대교회에도 인간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일반적인 일들이었으니 말이다.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이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을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던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약2:2~3) 교회가 아니라 장사꾼들의 시장바닥이요, 돈이 곧 인격이요 신앙수준이라는 지적이 그때도 있었던 것이다.
신이 원하는 나라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초대하심은 어떤 것이었을까? 우리는 하나님의 벗도 아니요 형제나 친척은 더욱 아닌데, 그렇다고 하나님과 견줄만한 부한 이웃은 더 더욱 아니다. 실은 우리의 빈곤 극치에서의 조우였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은 바 되었으며 우리가 경건치 아니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롬5:5~9). 이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주고받는 거래원리이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 아니 이미 죽은 우리를 살리고자 하나님이 초대하셨다. 그렇다고 우리를 키워서 섬김 받으려함도 아니었다. 순전히 갚을 것이 없는 가난한 자, 자신에게 철저히 절망한 자였기 때문에 부리신 것이다.
갚을 능력이 전혀 없는 우리를 초대하신 하나님,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도 그리하라는 것이다. 은혜가 감사하다면 그 감사를 하나님께 하지 말고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삶을 나누고 고통을 나눠지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바벨론 도성을 지향하는 오늘의 교인들은 자기들 도움이 없어도 잘 지내시는 하나님을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한다. 정작 자기들이 관심가져야 할 약한 자에 대하여는 침묵하면서 부득이한 성의 표시라도 했을라치면 온갖 생색으로 자랑질 한다. 이런 신앙 행태는 은혜의 원리에 근거함이 아니라 투자에 기초한 거래였기 때문이다. 강한 자 앞에서는 약하고 약한 자 앞에서는 강해지는 세상 원리가 오늘날 교회에서도 그대로 작동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초대하심은 도리나 윤리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도리로 보자면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부르지 않으셔도 상관없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기들 도리와 수준에서 이해하고 있으니 오래전 노자의 인간 이해가 오늘날까지도 통하는 것이다. ‘六親不和, 有孝慈. 國家昏亂, 有忠臣. 육친이 불화하니까 효도다 자애다 하는 것이 있게 되었고, 나라가 어지럽게 되니까 충신이라는 것이 있게 되었다.(도덕경18장)’ 육친이 불화한다 함은 관계, 즉 그들 각자가 있어야 할 자리가 깨졌다는 뜻이다. 신앙은 깨진 관계의 회복과 그 이후에 회복된 자기 자리를 지키는 문제이다. 관계의 구성원 모두가 자기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만 하면 효도 필요 없고 자애도 필요 없으며 열심도 충성도 필요 없다. 아버지가 아버지의 자리를 지키고 아들은 아들의 자리를 지키는 것, 그것이 조화이며 평화이다.
알지 못하는 그 나라로
그럼에도 사람들은 늘 아들의 자리를 지킨다는 의미를 아버지께 섬기는 효의 개념으로 집착하여왔다. 세상이 시끄럽고 싸움이 그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들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 아버지를 섬김에 있지 않다. 아버지를 섬기는 아들은 더 이상 아들이 아니다. 아들에게 섬김을 받음이 마땅하다고 여기는 아버지도 더 이상 아버지일 수가 없다. 아버지는 언제나 권위와 능력이어야 하며 아들은 아무리 큰 성공자라 한들 아버지 앞에서만은 언제나 미숙한 자요 살펴주어야 하는 여린 것이다. 이래야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가 깨지지 않는다. 이렇듯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입은 사람은 자기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에게 아버지처럼 계산없이 주는 삶을 살기 마련이다.
슬퍼게도 많은 부모들이 기껏 자식 키워 놓고는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고 실언을 한다. 정말 어떻게 키웠는가? 나이 들어 오갈 데 없는 신세될 것이 염려되어 키운 것인가? 정녕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누일 때 나중에 이 모든 것을 되돌려 받을 생각으로 키웠던가? 혹, 그런 마음으로 키웠다면 그 사람은 부모라 할 수 없다. 말만 부모이지 실제는 장사꾼과 무엇이 다른가? 부모는 자식을 키우는 그것이 곧 그들 삶이었다. 그런 삶이 그들의 기쁨이었고 존재의 의미였던 것이다. 키워가는 그것이 즐거움이요 어려움 속에서도 한 생명의 자라감에 감사와 경외심으로 사는 이들이 부모이다. 이런 부모들은 자식에게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자기 자식들도 자신처럼 살아주기를 바랄 뿐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계시도 여기에 있다. 당신이 우리를 초대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기를 원하신다. 이런 하나님, 이런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을 섬기려고 애쓰지 않게 된다.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그렇다. 되돌려 받을 것이 없는 사람, 내가 주기만 하고 끝내야 되는 사람에게 해야 한다. 마음의 가난과 처지의 곤란함에서 이미 이런 하나님을 경험해 본 신자들, 이런 이들로 하나님은 다른 이들을 고치고 부유하게 하신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행복이고 우리의 생명이다. 오늘도 하나님은 약하고 곤한 처지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을 보고 싶어 하신다. 당신께가 아니라 그들에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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