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렵기에 더욱 믿음

2021. 7. 11. 20:25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막4:35~41)

 

코로나 팬데믹이 심상치가 않다. 델타 변이 확대가 심각한 국면으로 치닫더니 급기야 방역 최종 조치인 4단계가 내일부터 발동된다. 몰지각한 사람들, 유흥가를 들락거리는 사람들 때문에 대략 잡혀가던 감염 사태가 다시 중대 국면에 직면하니 모임이나 여행이 통제되어 나라 경제가 엉망이 되어간다. 늘 그렇듯이 일부 개념 없는 사람들 때문에 그 피해와 고통은 항상 다수의 선량한 시민들 몫으로 또 돌아왔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두렵다. 그래서 더 불안하다. 기도한들, 신실하게 산들, 다 필요 없다는 생각까지 치민다. 이런 생각 자체가 더욱 혼란스럽고 무섭다. 다잡자.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자. 이럴 때일수록 더 기도하고 더 말씀으로 다가가자.

 

1. 주무시는 하나님

하루 종일 무리를 가르치신 예수는 피곤했다. 그래서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 휴식을 취하고자 하였다. 배 안에는 네 명의 숙련된 어부들이 있었다. 그 바다에서 어부 생활을 했던 베드로와 형제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었다. 그런데 출발한 얼마 뒤큰 광풍이 일어나 배가 침물할 위기에 처하였다. 그 호수 바다는 해수면보다 180m 낮은 곳에 있고 고원과 협곡으로 둘러싸여 있기에 갑작스러운 돌풍이 종종 몰아치는 곳이었다. 이 심각한 사태 앞에 숙련된 어부들도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우왕좌왕하였다. 이 와중에 예수는 곤히 주무시고 계셨다. 베개까지 베고 말이다. 바다에서 잔뼈 굵은 어부 출신 그들을 믿었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육지에 있을 때나 바다에 있을 때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 하심을 믿으니 태연히 주무실 수 있었다. 이런 예수의 모습과 제자들의 태도가 너무도 대조되고 있다. 다급했던 제자들은 주무시는 스승을 흔들어 깨우며 절규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비난 짙은 탄원이었다. 평소 우리가 하나님께 자주 던지던 절규였다. 거친 바다의 항해 같은 인생에서 큰 폭풍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를 의심하며 '하나님이여! 내가 죽게 되었는데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라며 흔들어 깨우곤 했었다. 내 고통에 침묵하고 있는 것 같은 두려움과 배신감에 제자들처럼 항의했었다..

 

그 옛날 믿음으로 살았던 어떤 시인들도 자신의 곤궁한 처지에서 그 믿는 하나님께 항의하곤 했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시10:1). 시인들뿐이겠는가? 이유 없는 고난을 받은 욥도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를 주의 원수로 여기시나이까?"(욥13:24) 라며 항의했고 외국군의 침략으로 나라의 멸망 앞에 선지자도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애5:20) 라며 절규했었다. 이렇듯 성경 곳곳에는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고통에 침묵하냐'는 항의들이 널려 있다.

 

2. 두려움과 믿음

곤한 잠에서 깬 예수는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를 향해 단 두 마디만 하셨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 순간, 바람이 그치고 바다는 잔잔해졌다.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실 때에도 예수는 그 귀신을 '꾸짖으시며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막1:25)고 하셨었. 그는 자연을 다스리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셨다. 그 예수가 뒤이어 제자들에게 물었다. "어찌 이렇게 무서워하는가?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는가?" 풍랑 속에서도 자신이 곤히 잘 수 있었음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자들은 풍랑 앞에 어찌할 바를 몰랐으니 그들에게는 그런 믿음이 없었다. 사실 마가복음은 곳곳에서 '두려움인가? 아니면 믿음인가?'라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의 빈 무덤을 보고도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여인들의 이야기(16:8), 눈 앞의 증거를 보고도 확신보다 두려움에 떨던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차고 넘친다이것은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갈릴리 바다에서 큰 폭풍을 만난 쪽배는 약한 인생의 배다. 항해는 늘 위험하고 그 바다 위의 쪽배는 부서지기 쉽다. 밖에서 몰아치는 바람과 마음에서 소용돌이치는 두려움, 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우리 인생들은 주님을 흔들어 깨웠었다.

 

사노라면 세상에 무서워할 것들이 많다. 고독, 고통, 허무, 무의미, 중독, 실연, 실직, 실패, 거부, 비난, 배신, 이별, 질병, 죽음 등. 다만 주님은 그런 것들을 '무서워하지 말라'라고' 하셨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어찌하여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즉, '두려움''믿음'은 상반 관계에 있음을 말했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다. 제자들이 두려움과 공포에 떨었던 이유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들에게 던진 질문은 '하나님이 저 광풍보다 더 강함을 믿지 못하느냐?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통치하심을 믿지 못하느냐? 그 하나님이 언제나 너희와 함께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는 안타까움이었다.

 

3. 내가 너와 함께 하리니

성경은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않으리라"(시96:10)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믿음, 이 믿음 하나가 삶의 불안과 역병으로 고통받는 지금의 우리에게 희망이다.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에 부합하지 못하고 있다. 불법과 편법과 요령에 능한 이들이 이기고 이득을 보고 있으니 말이다. 아니 그런 사람들 때문에 다수의 선한 이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가 말하는 신앙은 그런 세상, 그런 이들의 폭주 속에서도 하나님이 세상 끝까지 우리와 함께하심을 신뢰하는 것이다.

 

사실, 성경의 처음과 끝은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이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사41:10) 부활하신 예수도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이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이었고 밧모섬에 유배된 요한이 환상 중 들은 말씀도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계1:17)는 내용이었다. 두려움과 염려는 믿음이 없거나 작음의 반응이다. 길고 긴 역병으로 내일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인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은 물으신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믿음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고 오늘의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어 예수는 깨어 있을 때 깨어있었고 잠잘 때 잠을 잘 수 있었다.

 

하지만 믿음이 없는 제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오히여 그 반대였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가 깨어 있어 기도하기를 원했을 때에 그들은 잠을 잤고, 갈릴리 바다에서 그가 주무실 때 도리어 그들은 깨어 있었다. 마음과 삶이 소란하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 삶의 소음들이 방해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잡음과 씨름할 때가 아니라 주파수를 하나님의 음성에 맞출 때이다. 두려울 때, 외로울 때, 흔들릴 때, 막막할 때, 모든 것이 혼란스러울 때 더욱 귀 기울여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리고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라고 조용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자.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영히 버리지 마소서.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고 우리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우리 영혼은 진토에 구푸리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우리를 구속하소서.'(시44:23~26)

'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알지 못하는 곳으로의 초대  (0) 2021.08.01
다시 너를 세우리니  (0) 2021.07.18
죽 한 그릇의 장자 명분  (0) 2021.07.04
고라신이여! 벳세다여!  (1) 2021.06.27
제 좋은 것으로의 삶  (0) 2021.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