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7. 18. 22:52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때에 내가 이스라엘 모든 가족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얻었나니 곧 내가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러 갈 때에라.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로 너를 장식하고 즐거운 무리처럼 춤추며 나올 것이며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들에 포도원을 심되 심는 자가 심고 그 과실을 먹으리라."(렘31:1-5)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2-8)
주변에 보면, 자존심은 센데 자존감이 약한 사람들이 있다. 자존심과 자존감은 비슷한 것 같으나 엄연히 다르다. 자존심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나를 높이려는 마음'으로 핵심은 경쟁이다. 그러니 무인도에 혼자 사는 사람에겐 이런 마음이 없다. 반면에, 자존감은 '타인의 평가에 상관없이 나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다. 대체로 자녀의 자기애적 욕구에 공감하여 건강한 자기애로 승화시키는 부모에게서 자신의 소중함을 아는 자존감 높은 자녀가 나온다. 하지만 그런 역할을 않는, 엄격한 기준에 도달치 못한다고 책망하는 부모에게는 자존감 낮은 자녀들이 나올 수 밖에 없다.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 하나님
엄격한 하나님 이미지를 가진 신앙인들에게는 하나님이 두렵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도망하고 피하고 싶은 존재이다. 그런 하나님에게서는 내가 누구인지, 또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인지 알게 해주는 공감이 없으니 자존감 낮은 사람이 된다. 대체로 사람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징계의 하나님'이고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란 오해해 왔다. 그래서 한때 구약을 버리고 신약만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자는 종파도 있었다. 이는 구약 전체가 증거하는 온전한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무지에서 기인한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을 포함된 고대 근동 세계에는 징벌적인 신 관념이 있었다. 지극히 높은 신은 자기의 뜻을 거역하는 죄인을 징계하고 복종한 자에게 포상하는 이 신은 죄인에겐 정의롭지만 순종한 자에겐 자비롭다. 이 신에게 순종하느냐 아니면 불순종하느냐가 한 백성의 운명을 좌우했었다.
구약 성경 곳곳에서도 이런 신 관념은 볼 수 있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신30:15-18) 순종에는 상, 불순종에는 벌이라는 동등 갚음의 원칙을 명료히 하고 있다. 예언자의 심판 선포에도 이 원칙이 나온다.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 거기 사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호4:1-3)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은 가혹한 징벌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심지어 율법서도 아니고 예언적 선포와 거리가 먼,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 잠언에도 이런 원칙은 적용되었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여름에 거두는 자는 지혜로운 자녀이나 추수 때에 자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는 자녀이니라."(잠10:4-5) 특정한 행위는 반드시 특정한 결과를 낳는다는 이런 신학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들의 패망이 역사 내내 반복된 하나님에 대한 반역과 불순종 탓이라 해석되게 하였다. 이런 보응 원칙은 오늘까지 우리들 의식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 내가 사회적으로 실패했다면 그것은 열심히 하지 않았으니 신의 징벌을 받은 것이요 내가 성공을 누리고 있다면 그것은 신의 뜻에 순종했기에 복을 받은 것이라는 의식으로 말이다.
그 광야로 오신 하나님
그런데 유다가 패망하여 바빌론 포로로 끌려간 이후부터 구약에서 이런 신학은 찾아볼 수가 없다. 다윗이 받은 하나님의 약속이 실패하면서 이스라엘은 모든 희망을 상실했고 이제 절망과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들만 남았던 그때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선포처럼, 이는 구약 하나님 이해의 대전환점이다. 광야는 포로로 끌려감을 상징하는 곳으로 아무런 기대가 없는 장소였다. 당연히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는 곳이로 여겼었다. 그런데 포로로 끌려갔던 그 광야가 하나님이 다시 시작하시는 희망의 장소로 변한다. 하나님이 '먼 곳으로부터 와서' 이스라엘 앞에 나타나신 것이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더 이상 보응의 원칙에 매이지 않겠다 하신다. '만약 ~하면 ~될 것이다'라는 조건문도 없고 심지어 이스라엘의 순종 여부와도 상관치 않으신다. 단지 일방적으로 사랑과 복을 선포하셨다.
두 번째 기회를 주시는데 조건이 없었고 저주의 경고도 없었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이 신실하게 응할지 아닐지도 개의치 않으셨다. 단지 돌아오기만 애타게 호소하였다. 포로기의 예언자 이사야도 같은 메시지를 선포한 바 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사55:6-7) 하나님의 간절한 기다림, 그 기다림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었다. 이로서 죄악과 징벌로 이어지던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졌다. 동등 보응의 사슬이 끊어진 것이다. 이스라엘이 끊은 게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끊으신 것이다. 자식과 같은 이스라엘을 위해 기꺼이 자기 규칙을 위반하신 하나님, 이스라엘이 바뀌지 않으니 하나님 당신이 스스로 바뀌셨다.
이스라엘의 포로기 이후, 하나님은 사고뭉치 십대 아이를 둔 부모와 같았다. 그 부모는 자녀가 깨치기를 기다려야 하고 때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애간장이 녹는다. 그러다 결국 아이 행실을 고치겠다는 기다림을 접는다. 다 내려놓고 그저 안아 주어야만 했다. 하나님은 이런 부모를 닮은 것이다. 사람이면 이걸 못한다. 하나님이니 하셨다. 하나님이 자신을 돌이키신 것이다. 아직 이스라엘이 잘못을 고백하지도 않았는데 그에 상관치 않고 일방적으로 용서를 선언하신다.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이 일방적인 용서, 조건없는 포용, '가혹한 하나님'이 '은혜의 하나님'으로 스스로 변하신 것이다.
진노를 덮은 자비
왜 이렇게까지 하셨을까?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께도 불명예스러운 일 아닌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도다."(시23:1-3) 여기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한다'함은 하나님의 높은 자존감을 표현한 말이다. 보응 원칙대로 거역한 죄인을 징벌해야 하는 하나님이 용서와 은혜의 하나님으로 바뀌신 이유는 당신이 자존감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주 야훼의 말씀이라.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님을 너희가 알리라."(겔36:22, 32)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저지른 가증한 짓거리들로 인해 이미 모욕을 당하셨다. 그들의 악이 하나님의 명예를 땅으로 떨어뜨려 열방의 조롱거리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악한 이스라엘을 악하게 대응치 않으셨다. 바빌론의 먹잇감으로 던지는 방식으로 당신 명예를 회복하려 하지 않으신 것이다. 오히려 그들을 회복시킴으로써 당신 명예를 회복하려 하셨다. <이스라엘이 더럽힌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당신이 변하셨다. 일찌기 당신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출3:14), 즉 자존자라 밝힌 하나님이셨다. 이 하나님은 누구와의 경쟁이나 비교로 자신을 높이는 존재가 아니었다. 어떤 상황과 변화에서도 당신의 영원한 사랑과 긍휼로 신실함을 다 하시는 분, 하나님의 그 성실하심이 그분의 자존감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질책보다 사랑과 용서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고비가 있고 혼자 넘기 어려운 고통과 외로운 시간이 있다. 그때 단 한 사람이라도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믿어 주는 그 단 한사람으로 인해 그 사람은 다시 일어선다. 장발장을 변화시킨 것도 자베르 경감의 체포나 구금이 아니었다. 그를 뼛속까지 변화시킨 힘은 그가 훔쳐 간 은그릇들을 자기가 준 것이라고 감싸준 신부였다. 사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다. 단지 긍휼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가능성 있는 존재가 되었다. 이는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진노로 들끓는 하나님은 없다. 모성애를 품은 어머니같은, 긍휼의 격정을 지닌 아버지같은 하나님이 계실 뿐이다. 이 자애로운 하나님은 내가 누구인지, 또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인지를 알게 하는 내 영혼의 거울이요 자존감의 근원이시다.
'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사랑으로 살기 (0) | 2021.08.01 |
---|---|
알지 못하는 곳으로의 초대 (0) | 2021.08.01 |
두렵기에 더욱 믿음 (0) | 2021.07.11 |
죽 한 그릇의 장자 명분 (0) | 2021.07.04 |
고라신이여! 벳세다여! (1) | 2021.06.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