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7. 4. 23:09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인고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종용한 사람인고로 장막에 거하니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부터 돌아와서 심히 곤비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창25:27~34)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 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16:24~31)
세상 현실은 하나님보다 돈이 더 힘을 쓰는 곳이다. 주야로 율법을 묵상하는 것만으로는 밥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기에 신앙인일지라도 이 경제적 현실을 무시할 수 없어 갈등이다. 천국 생각하면 말씀을 무시할 수가 없고, 돈을 위해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먹고 살 일이 막막하다.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는 이런 고민이 없다. 돈으로 안 되는 게 없으니 돈만 많이 벌면 된다. 현실은 돈 많은 이가 능력자이다. 세상의 정의라는 것도 그 힘 위에 기초하니 힘이 있으면 정의와 권위는 따라온다. 수사권을 내세운 반란이나 무력을 앞세운 쿠데타도 과정이야 어떻든 힘을 가지니 하극상이 우국충정이요 쿠데타가 국난극복을 위한 혁명으로 미화되어왔다. 하지만 힘이 있을 때는 정의요 애국이었던 것이 힘이 빠지면 하루아침에 불의가 되고 패륜으로 추락해 버리기도 한다.
현실 힘의 정체
이 힘의 위력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불의를 정의로 만들 수도 있고 도둑을 대통령으로 만들 수도 있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 있으며 멀쩡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이런 힘이 없다. 밤새워 기도한 학생의 시험 답안이 밤 새워 공부한 학생의 답안을 따라가지 못한다. 불의한 권력에게 항거하는 의인들을 그 고통에서 건져내지도 못한다. 세례 요한의 사건을 보라! 분명 헤롯이 불의였고 요한이 정의였다. 그럼에도 그 정의가 하나님 눈앞에서 목 배임을 당했다. 반면 헤롯은 자기 할 짓 다 하면서 잘 먹고 잘 살았다. 그러니 믿는다면서도 세상 힘에 미련을 두는 것이다. 신자라면서도 돈이 없으면 불안해한다. 그러다 배가 고프면 에서처럼 죽 한 그릇에 장자 명분을 넘겨버린다. 죽 한 그릇의 효능은 구체적이나 장자의 명분, 신앙적 이상은 당장의 허기를 채우기에 먼 관념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솔직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믿어봐야 현실적으로 득 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득을 봤다고 간증하는 이들의 얘기도 그것이 굳이 ‘하나님’을 믿은 결과인지 누가 알랴? 안 믿는 사람들에게서도 그와 같은 결과를 얼마든지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 대신에 철저하게 현실을 믿는다. 자기가 보는 것, 경험한 것만 철저하게 믿는 것이다. 그럼에도 자기 삶을 세상 현실에만 두기에는 뭔가 불안하니 하나님이든 부처든 적당히 걸쳐두려 한다. 일종의 절충이다. 현실의 힘도 잃지 않고 영원의 가치도 버리지 않는 묘한 타협이다. 하나님도 놓칠 수 없고 돈도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상당수 신앙인들의 삶이 이런 식이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말한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그런 일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그럼에도 하나님도 좋고 재물도 좋은 사람들은 기발한 논리를 개발하여 이렇게 말한다. <성경은 돈 그 자체를 나쁘다고 한 적이 없다. 다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하여 우리가 가진 돈으로 하나님의 일에 선용한다면 돈도 좋은 도구이다. 정당한 노력과 수고로 벌어들인 ‘의로운’ 돈을 하나님의 일에 쓰고 또 약한 이들을 돕는 데 쓴다면 천국은 당연히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돈을 멸시하지 말 것이되 돈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해결한 논리이다. 돈을 벌되 의롭게 벌면 그것도 하나님을 믿는 길이라는 논리이다. 그렇게 번 돈으로 내가 호화롭게 살아도 내 집 문 앞의 거지를 쫓아내지만 않으면, 그래서 내 밥상 부스러기로 그가 연명하게만 한다면 그것도 하나님을 믿는 삶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돈의 위력이 영원할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영원한 것이 없다는 사실만 영원하다. 세상 힘에 취하여 살던 사람들이 그런 힘이 사라지게 되면 어찌 될까?
생각의 차이와 사유의 간격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솔직히, 지옥이니 고통이니 하는 것들은 관념일 수도 있다. 지옥이 불꽃 속의 삶인들 그 불꽃에 영향받을 육신이 없으니 무슨 고통을 느끼겠는가? 육신을 벗어난 세계에서는 물로 서늘하게 될 혀도 없고 그 물을 찍어 줄 손가락도 존재치 않는다. 단지 <목마름>이라는 관념만 존재한다. 인간에게 영적인 세계에서도 적용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생각’이다. 사람이 죽어 흙이 된다고 생각까지 같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만일 같이 사라진다면 신앙, 양심, 하나님, 구원 등이 소용없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다 사라진다면 삶의 표준은 철저히 세상 현실에 두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신앙 없는 사람들조차도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래서 제사를 드리고 정안수 앞에 머리를 조아리곤 한다.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예수의 이 비유에서 위로와 고민은 세상 삶의 고통에 대한 보상적 위로가 아니며 세상 즐거움에 대한 대가적 괴로움도 아니다. 부자가 받는 고통은 그가 세상에서 누렸던 힘, 그 힘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괴로움이요 나사로가 받는 위로는 더 이상 부자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가 없어도 상관없다는 위로이자 더는 아프고 병들 육신이 없다는 위로이다. 육신이 사라지고 없기로는 부자나 나사로나 같았다. 하지만 그 육신에 즐거움을 두고 살았던 사람에게는 그 육신이 없어지니 즐거울 일이 없고 ‘즐거움의 관념’만 남아 그것이 채워지지 않는 고통이 따른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를 육신에 두지 않았던 사람은 어떨까? 오히려 육신이 사라지고 없음이 마치 거추장스러운 짐을 벗은 것처럼 개운했으리라. 신자로서 순례자의 삶이 바로 그런 것이다.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오고 감은 공간 개념이 전제된다. 그 공간이란 육신이 존재할 때의 이야기이지 육신을 벗어나면 공간적 제약이 없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왜 오고 갈 수 없다고 말했을까? 육신 없는 영혼의 상태인데도 왕래가 불가능하다고 말했을까? 이 왕래는 공간상의 이동이 아니었다. 하나님과 인생에 대한 ‘생각’의 간격, 사유의 차이였다. 생각의 간격이 크면 큰 만큼 교류는 불가능하다. 사유의 차이가 확연하다면 그만큼 교감도 불가능하다. 한 이불을 덮고 한솥밥을 먹는 사이일지라도 생각의 간격이 너무 크면 서로 멀게 느껴짐과 같으니 여기의 큰 구렁도 이런 성질인 것이다.
음부적 생각과 지옥적 삶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케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부자가 삶과 죽음의 실상을 알게 되니 아직 모르고 있는 형제들이 걱정되었다. 혹, 나사로가 환생하여 이 고통 받는 곳의 실상을 전해 준다면 그들이 마음을 고쳐먹고 내 전철을 밟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아브라함은 말한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그래서 '약속의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굳이 나사로가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인생들은 자연을 거스르는 일들이 일어나야만 신을 떠올리는데 사실, 이런 마음 자체가 음부이다. 초자연 기적을 보아야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는 그 삶이 곧 지옥인 것이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 무덤에서 걸어 나온 것을 본 유대인들 중 하나님을 믿은 사람들은 없었다. 오히려 그렇게 살아 나온 사람을 죽이려 했고 또 그를 살린 예수까지 함께 죽이려 했었다.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 하리이다.' 죽은 자가 살아서 거리를 활보하며 천국에 대한 증거를 하면 사람들이 그것을 듣고 믿을까? 아니다. 그것은 착각이다. 사람들은 그 증거가 자기 생각에 맞을 때만, 그것도 겨우 듣는다. 사람들은 ‘진리’를 원하지 않는다. 오직 자기 생각을 지지해주고 자기 원하는 얘기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부활이 없다는 사두개인들 앞에 죽은 사람이 살아 나왔다면 그 한 사람의 부활 때문에 사두개인들 모두가 자기들 교리가 틀렸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니 어림없다. 오히려 그 부활했다는 사람을 거짓말쟁이로 매도하거나 은밀히 제거하려 들 것이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나사로가 문전걸식할 때, 부자는 그를 도와주려고는 했을지언정 그에게 도움받을 생각은 어찌하지 못했을까? 아브라함이 언급한 모세와 선지자는 바로 이런 나사로 같은 사람들이다. 그런 나사로가 그 집 문 앞에 그렇게 앉아 있었음은 부자에게 둘도 없는 기회였었다. 하지만 부자는 그 기회를 자선이나 구제 같은 자기 선행으로 바꾸어버렸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생각은 않고 자기 선행을 베풂으로써 자기만족에 빠져 사는 이들에게 죽은 사람이 살아나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살아 있는 예수의 말을 듣고도 천국 실체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가 수백 번을 부활한들 영생을 이해할까?장자의 명분을 귀하게 여길까? 이는 아브라함의 입을 빈 예수의 말씀이다. 아니, 예수의 입을 빈 하나님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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