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27. 18:09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 발을 금하지 아니하므로 나 여호와가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고 그 죄를 벌하리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 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멸하리라"(렘14:10-12)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때에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마11:20-24)
감염병 코로나19 사태,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전대미문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생계형 경제 약자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매일매일을 지옥 같은 고통의 시간들이 2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다. 다행히 이 사태도 결국 그 끝을 보이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 모두가 바라마지 않는 이 재난도 그 출구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 코로나 이후 우리는 평범한 일상, 익숙한 이전으로 돌아가면 그만일까? 조만간 회복될 그 일상이 혹, 지금까지 겪은, 아니 그보다 더 혹독한 재앙을 잉태한 복귀라면? 싫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바이러스! 누구냐? 넌!
20세기까지 인류는 바이러스 존재조차 몰랐던 이 감염병이 빈번히 우리 삶을 위협함은 그것이 '인수공통 감염병'이었기 때문이다. 인간만 침범하는 천연두, 소아마비 같은 세균은 예방과 접종으로 이미 박멸되었다. 하지만 이 새로운 바이러스 감염은 지난 40년 동안 3천만 명 넘는 인류의 목숨을 앗아갔다. 게다가 이 바이러스성 감염병은 더욱 진화하면서 생물종 사이의 장벽을 넘나들고 있다. 설치류에서 박쥐로, 박쥐에서 인간으로, 감염을 종에서 종을 넘어 체에서 개체로 퍼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바이러스는 지구의 모든 동물을 없애지 않는 한 근절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바이러스가 지구의 생태계 균형에 중요한 역할을 함도 사실이다. 바이러스가 없었다면 지구는 탄소와 산소의 순환 시스템이 불가능해지고 그렇게 되면 지구는 다양한 생명체들이 살 수 없는 마른 행성이 되었을 것이다. 그 매개체가 된 박쥐는 거의 모든 바이러스에게 '대모'와 같은 존재이다. 박쥐는 137종의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 있으며 이 가운데 인수공통이 61종이나 된다고 한다. 이는 사람에게 전염병을 쉽게 옮기는 쥐보다도 더한 수치이다. 오늘의 코로나19 사태 원인으로 박쥐가 비난을 받고 있지만 실상, 박쥐는 사람에게 이로운 동물이다. 박쥐의 주식은 곤충인데 먹성이 좋아 몇 시간이면 인간에게 해로운 모기와 해충 수백 마리를 먹어치우니 말이다.
이런 박쥐가 가진 바이러스가 어쩌다 인간에게 넘어왔을까? 깊은 동굴 속에서 조용히 잠자고 있던 박쥐들을 세상으로 끌어낸 것은 바로 인간들이었다. 박쥐가 인간 세계를 침범한 게 아니라 인간이 박쥐 영역에 침입했던 것이다. 이윤이 된다면 무엇이든지 하는 존재가 인간들이다. 돈을 위해서 흙을 오염시켜왔고 물을 더럽혔으며 대기까지 탁하게 만든 게 인간들이었다. 다른 종의 서식지를 거리낌 없이 파괴하고 종간 접촉 기회를 폭발적으로 증가시키니 졸지에 병원체를 전 지구적으로 옮기는 조건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인수공통 감염병의 창궐은 바이러스가 특별히 인간을 표적으로 삼아서가 아니었다. 도리어 인간이 너무 많이, 너무 주제넘게 다른 생명 영역을 침범한 데에서 비릇되었다..
이제 삶의 방식을 바꿔야
차제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적 거리두기'만이 아니다. 이제는 '생태적 거리두기'도 필요하다. 이웃을 사랑하고 동료 피조물을 사랑하는 삶의 구체적인 방식으로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겪는 이 재난은 우리 욕망들이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매년 병든 닭을 10억 마리씩 소비하고 500만 마리의 가축을 살처분해 왔던 우리의 일상 삶들, 우리의 무한 착취로 지구 기온이 올라 얼음이 녹고 북극곰이 굶어 죽고 있다. 이대로 가면, 남극 기온 또한 영상 20도까지 치솟아 펭귄이 진흙투성이가 되는 세상이 올 것이라 한다. 그때는 더 치명적이고 지독한 감염병이 새로 찾아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항구적인 비상상황'의 일상을 살게 된다.
백신의 공급으로 코로나19 사태는 일단 한 고비를 넘기는 듯하다. 항체치료제도 개발되었다니 정말 다행스럽다. 하여 이 재난 또한 지나가리라. 하지만 이후의 일상 복귀가 단지 이전 삶의 방식 그대로의 복귀라면 더 혹독한 전염병이 올 것이다. '코로나24' 혹은 '코로나26'이 닥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그러므로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온 세계가 멈추었던 이 2년의 재난 기간은 무언가 특별한 의미가 있는 시간들이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이 또한 지나갔다'라고 생각하여 넘어간다고 다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온 인류가 겪었던, 아니 아직도 겪고 있는 이 재난은 탐욕과 죽음의 길에서 돌이키라는 하나님의 신호이다. 이제 그만 생명과 구원의 길로 돌아서라는 하나님의 경고인 것이다.
예레미야는 민족의 파멸 운명을 전해야 하는 하나님의 전령이었다. 그가 살고 활동했던 시대가 조금도 평화롭지 않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강력한 대국 바빌론의 위협 앞에 민족은 풍전등화의 위기였다. 당시 대부분의 예언자들은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지키신다고 왕에게 말했고 야훼께서 구해주신다고 백성들을 위로했었다. 하나냐 같은 예언자는 하나님께서 2년 안에 이 나라와 이 민족을 구원하신다고 기간까지 특정했었다(렘28장). 반면, 예레미야의 예언은 그런 예언자들과 달랐다. 나라는 망할 것이요 70년간 적국 바빌론의 속국이 그 기간 동안 포로로 잡혀갈 것이라 예언하였다. 그 바빌론 왕을 하나님이 당신의 심판 도구로까지 쓰신다 전하였으니 권력자나 백성들이 듣기에 불편했다. 왕과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비롭고 오래 참으시니 자기들을 용서하고 '이 난국 또한 지나가리라'라고' 자기들 편한 대로 생각하였다.
하나님은 우리로 살기를 원하신다
그런 그들에게 예레미야는 외쳤다. <백성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들 발을 멈추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다른 예언자가 그들에게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기근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이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리라>고 말할 때, 예레미야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선포하였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 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내가 그들을 멸하리라.> 극한 진노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이 극한 심판의 끝은 어디일까?
예레미야 예언자가 바빌론 침공을 하나님 심판이라고 말한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그들, 그러니까 위로 왕으로부터 아래 말단 백성들까지의 가득한 죄 때문이라는 말이다. 한 사회의 건강함, 한 공동체의 건전함을 위한 장치로서 언론의 비판이 있고 최후 보루로서 종교가 있다. 사회가 잘못 나가면 언론이 이를 비판하고 그럼에도 계속 엇나가면 최후의 보루인 종교가 그 역할을 해야 했다. 더구나 유다 왕국은 야훼의 신정국가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 언론이 부패하고 종교가 타락했으며 고위 관료들과 부자들이 오염되었으니 이런 이들의 죄로 순진한 백성들마저 악한 길로 들어섰다. 그 죄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셨다.
그럼에도 예레미야의 외침은 누군가를 꾸짖고 정죄하기 위한 선언, 그 이상이었다. 이제 돌아서라는 회개 촉구였던 것이다. '남을 향한' 심판이 아니라 ‘자기를 향한,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향한 태세 전환 요구였다. 정녕, 하나님은 우리가 살기를 원하신다. 우리에 대하여 오래 참으사 누구도 망하지 않고 다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이 땅의 모든 생명과 친구로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공동체가 살고 나도 산다. 지구는 사람만의 것이 아니다. 만물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어찌 만물의 영장일 수 있으랴?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세계 안에서 각자도생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공존을 추구해야 한다. 이런 생태적 회심을 하나님은 원하신다. 이 같은 우주적 회개를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명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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