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좋은 것으로의 삶

2021. 6. 23. 12:38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창17:15~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눅16:19-25)

 

유난히 누가복음에는 돈에 관련된 비유가 많다. 어리석은 부자 비유.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그리고 부자와 나사로 등, 이런 비유들은 누가복음에만 나온다. 그만큼 누가는 재물과 하나님 나라의 관계에 관심이 많았다. 신앙생활이란 궁극적으로 선악의 관념을 넘어 생명을 향한 여정이다. 이 과정에서 율법적 자기 의나 재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의 노력으로는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 없다. 의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가능하다. 수고의 대가도 아니고 계율을 어김없이 이행했다고 의로워지는 게 아니다. 그 의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냐가 아니라 우리의 신,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에 좌우되는 것이다.

 

하늘 생각과 땅의 생각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기들이 율법적이니 하나님도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자기들이 육신적이니 하나님 또한 그러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기준으로는 종일 일한 사람과 늦게 와서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을 동일하게 대우함은 불의한 처사이다. 아버지 재산을 방탕하게 말아먹은 탕자와 집에서 아버지 명을 어김없이 받들어 모신 큰 아들을 동일하게 대우함은 공의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은 사람과 다르다. 돌아온 아들 탕자를 위하여 송아지를 잡고, 한 시간만 일한 사람에게도 동일한 임금을, 그것도 먼저 와서 종일 더위와 싸우며 일한 사람들보다 먼저주었다. 하나님의 의는 이런 것이다. 십자가구원, 은혜와 칭의는 이런 하나님을 이해 못하면 알 수 없는 교의들이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로 예수는 이 화두를 던졌다. 여기 부자는 하나님을 알고 천국도 알았으며 하나님 앞에서의 의가 무엇인지도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아브라함에게 아버지라 하니 아브라함은 그를 얘야' 즉 '아들아’라 응대하였다. 당시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표현은 보편적이었다. 모든 유대인들이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말은 곧 그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이삭 외에도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이 먼저 있었다. 이삭이 태어나기 전까지 아브라함은 그 이스마엘이 약속의 아들이 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하나님 약속은 이스마엘로 이어지지 않고 이삭으로 이어졌다. 하나님의 관점과 아브라함의 관점이 달랐던 것이다. 세월이 흐른 한참 후에야 아브라함은 자신의 육체적 능력으로 이룬 이스마엘로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어지지 않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두 아들 탕자와 큰 아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모른 채 자신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기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자기 노력으로 아버지 뜻을 이룬다는 율법적 인간의 표상이 바로 이런 큰 아들이요 이스마엘이다. 반면탕자는 어떤가? 그는 아버지 재산을 다 날려먹었지만 그 사건으로 아버지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율법의 이행 여부를 감시하는 분이 아니라 은혜롭고 자비로운 분이심이 이 비유들의 핵심이다. 이삭이 상징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육체적 능력이 이루는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이루어가는 아들이라는 점, 작은 아들 탕자 또한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짐으로 의로워지는 것이요 다시 아들이 되는 것이다.

 

사는 날에 좋은 것들

반면, 큰 아들이 아버지를 향해 한 말에서는 수동성이 느껴진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왔는데" 즉, 말로만 아버지이지 실상 주인으로 섬겼다는 말이니 그는 아들로 산 것이 아니라 으로 살았다는 고백이다. 큰 아들은 아버지께로부터 염소 새끼 한 마리 받지 않았으니 철저함이라는 자기 의로 사는 이들의 표사인 것이다. ‘얘야,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아브라함이 이 부자에게 한 말에는 그가 하나님을 안 믿었다거나 율법을 어겼다거나 불쌍한 이웃을 도와주지 않았음을 책망함이 없다. 그런 논쟁은 하나님의 의가 무언지 모를 초기의 고민들이다. 진정 구원된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을 않는다. 율법 준수를 위한 노력도 새삼 않는다. 바울의 고백대로 은혜로 생명으로 사는 이들에게는 더 이상 <정죄>가 없으며 더 이상 <범죄>도 없기 때문이다.

 

부자를 향한 아브라함의 책망은 단지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다는 말이었다. 그러면 여기 <네 좋은 것>이 무엇일까? 은혜로 사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율법적 정죄는 없지만 그것이 완성은 아니었다. 이후의 삶에서 <네 좋은 것>이 무엇이냐를 수시로 묻기 때문이다. 신앙 여정을 떠나는 모든 아브라함들은 삶의 과정에서 필연,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얻는다. 이 이스마엘은 인간의 육신적 능력으로 이루어 온 지금이다. 아들이긴 아들 같은데 종의 삶을 벗어나지 못하는 신앙생활, 집에서 아버지 명을 지켜 어김없는 든든한 아들, 바로 이스마엘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만큼 성실한 사람이 없고 자기만큼 하나님 뜻을 헤아리는 사람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야말로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의무리요 한 번도 길 잃은 적이 없는 양인 것이다.

 

그러나 잃어버린 양 한 마리 비유나 탕자의 비유는 이런 자기 열심이나 자기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님을 말한다.  이런 것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이스마엘로도 충분한데 어느 날 오셔서 이삭을 통하여 당신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임을 말씀하신 하나님이다. 여러 해 동안 이스마엘을 약속의 자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동안 가만 계시던 하나님이 어느날 갑자기 그것을 부인해버리니 아브라함이 받은 충격 또한 컸으리라.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달랐다. 오늘 많은 이들의 신앙생활이 이삭으로 발전하지 못함은 이스마엘이 부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스마엘이 부인되지 못함은 집 안의 큰 아들이요 아버지의 명을 어김이 지키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는 구원이 없다. 참담하나 이스마엘을 끊어내야 하고 이삭으로 거듭나야 한다. 이것이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 방식이다.

 

좋은 것이 정말 좋은 것일까? 

하지만 약속의 사람이라는 이삭에게서도 훗날 에서라는 사람이 나온다. 그것도 한 어머니에서 쌍둥이로 나온 것이다. 우리의 지속되는 삶에서 신앙이란 에서 아니면 야곱일 경우가 많다. 본문의 부자는 에서와 같은 삶을 살았다. 아브라함이 부자를 향하여 너는 살았을 때에 네가 좋아하는 것을 받았다고 함도 그 이유이다. 에서가 좋아한 것이 무엇이었던가? 창25에 소개된 내용을 보면, 그는 육신적 삶, 즉 팥죽 한 그릇을 장자의 명분약속의 가치보다 더 좋아하는 삶을 살았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인 유대인들에게 있어 약속의 자손이라는 가치, 그것은 곧 하나님이 함께 하는 신앙의 가치였다. 부드러운 옷과 화려한 생활을 좋아하는 삶, 명품과 함께하는 삶, 오늘의 사람들은 이런 세상을 좋아하느라 천국이 침노하는 순간을 망각하고 영원으로 들어가는 삶을 놓친다.

 

그러면 나사로는 어떤 사람이었나? 그는 거지로서 헌 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먹으며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 데를 핥았던 삶을 살았다. 특이하게도 예수는 이 비유에서 나사로라는 실명을 언급하였다. <라사로>라는 이름의 기원은 히브리어 '엘아자르', ‘이 '하나님', 아자르가 '돕다'는 뜻의 합성어이니 <나사로>란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총칭이다.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말은 물질적인 풍요를 돕는다는 것 그 이상이다. 즉, 하나님 그 자체가 도움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여기 부자의 도움으로 사는 사람들을 말한다. 돈 없이는 하루도 못 사는 사람들이 부자인 것이다. 비룩 굶어도, 아파도, 삶이 곤궁할 지라도 하나님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 이 육적 삶은 한 순간’임을 제대로 보면서 사는 이들, 이런 사람들을 가르켜 소위 신자라 한다.

 

영원을 준비하는 사람은 순간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순간에 매여 사는 사람들의 눈에는 나사로가 가난한 자일 수도 있고 꿈속에 사는 몽상가일 수도 있으며 제 앞 가름도 못하는 미련한 인생일 수도 있다. 그러나 순간에만 매여 사는 눈에는 영원이 보이지 않는다. 무엇이 환상이고 어디까지가 꿈인지는 지금 있는 자리를 벗어나야 알 수 있다. 부자와 나사로가 죽어 장사되었다는 말은 그들이 현실이라고 생각했던 그 환경을 벗어났다는 말이다. 그랬더니 거기는 육신 세계의 능력이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제 부자는 더 이상 자기 능력으로 행복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돈의 도움은 육신이 있을 때까지 만이다.. 사람들의 생각은 여전하다. 다른 사람들은 다 죽어도 자기는 영원히 살 줄 알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빈손 들고 가더라도 자기는 화려하게 갈 줄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바꾸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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