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영과 새 마음으로

2021. 6. 13. 20:53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겔36:24-28)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1-6)

 

루아흐와 프뉴마

성령은 구약에서 히브리어로 '루아흐'. 신약에서는 헬라어로 '프뉴마'이다. 루아흐는 '영, 호흡, 바람'으로 사용되었다. 전능자의 천지창조에 이 성령은 함께 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성령은 수면 위에 운행하셨었는데(1:2) 여기 '운행하셨다'라는 원어 '메라헤페트'의 뜻은 '계속 알을 품다'이다. 어미 새가 따뜻하게 알을 품듯이 성령이 혼돈스럽고 무의미하며 깊디 깊은 흑암의 땅을 따뜻하게 품어 생명 기운이 돌도록 하셨던 것이다. 이 성령은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사람이 생령이 되게 하실 때 그 코에 불어 넣으신 하나님의 숨결이기도 하였으며 대홍수 이후 방주 생명들을 기억하여 물이 마르도록 불어 다녔던 바람이기도 하였다.

 

바로 그 성령이 예수를 잉태케 하셨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비둘기같이 위로부터 임하였으며 광야로 이끌어 40일 시험을 받게 하셨는가 하면 승천 후에는 한 다락방에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으로, 그리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양태'로 임하였다. 성령은 '창조주의 영'이요 '그리스도의 영'이며 창조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자 생명의 바람이었다. 바울은 말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전12:3)'고 말이다. 그러니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사람은 이미 이 성령을 받은 사람이다. 말씀을 지키며 살려 애쓰는 사람은 그 안에 이미 성령이 내제된 것이다. 예배를 그리워 하거나 각 처소에서 온라인 예배에 접속함은 어쩌다 그리 된 것이 아니고 우연히 일어 난 일도 아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았기 때문이다.

 

성령 충만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방언이 성령 증거라 말하는 이들도 있고 특별한 영적 체험만이 성령이 함께 한 증거라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성경적이지 않은 단언들이다. 바울은 단호하고도 분명하게 말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영을 따르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중요한 변화는 <생각의 변화>이다.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는데 이 영의 생각이 생명이요 평화이다.

 

육의 삶과 영의 삶

이원론적 오류가 있었다. 육체와 물질세계를 경멸하고 영혼과 천상의 세계만 바라본 영지주의적 관점이 그랬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영지주의자가 아니었다. 그에게 <육신대 영혼>의 문제는 예수를 만나기 <이전과 이후>의 의미일 뿐이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릴 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나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라'(롬7:5-6) '육신에 있을 때''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영의 새로운 것'이란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를 말한다. 영의 새로움으로 사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생각과 가치관의 변화이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우선이 된 삶이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를 기도하며 사는 삶이다.

 

<코이>라는 일본 잉어가 있다. 이 잉어를 작은 어항에 넣으면 5~8cm 길이로 자라고 연못에 넣으면 15~25cm까지 자라며 큰 호수에 놓아주면 1m까지도 자란다고 한다. 이 잉어의 크기는 그가 자라는 공간 크기에 비례하는 것이다. 인간의 사유역시 그의 세상 크기와 비례한다. 가족만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 가족 이상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 지역만 생각하는 사람은 그 지역 경계를 넘어가지 못한다. 한 국가, 한 인종, 한 전통만 생각하는 사람은 그 국가, 그 인종, 그 전통의 경계 안에 갇히는 것이다. 강남구 대치동의 한 대형교회 문구는 볼 때마다 의아스러움을 느낀다. <독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땅!>, 정말 이 문구가 교회에 어울리는 문구라 생각해 저렇게 높은 곳에 써붙여 놓은 것일까? 그러니 자기들의 주관과 기준에 따라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를 가름한다. 자기 생각대로 되면 성공이고 그렇지 않으면 실패라고 여기는 것이다.

 

루아흐로 말미암아 사는 사람들, 프뉴마가 내제된체 살아가는 사람들, 소위 신자라 하는 이들은 이런 경계를 넘어선 사람들이다. 시야를 넓혀 땅의 기초를 놓으시고 골짜기에서 샘물을 솟아나게 하시며 날마다 땅을 새롭게 하시는 창조자를 생각해 보라. 그러면 인생의 성공과 실패, 단맛과 쓴맛의 정의가 달라진다.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영광과 부끄러움의 잣대가 달라지는 것이다. '육신의 일'이 아니라 '영의 일'을 생각하면 '이것이 나에게 이익인가?'가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묻게 된다. 생각의 기준과 크기가 바뀌기에 작은 어항을 넘어 저 넓은 은혜의 바다로 나가 보라는 것이다.

 

성령의 교통하심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예수는 선언하셨다.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4:18-19) 인간 예수에서 공적 메시야의 삶, 그리스도의 삶을 이제 시작할 터인데 그 전제가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였다. 약한 자, 억눌린 자, 제대로 보지 못하는 자를 안스럽게 여기는 마음은 어쩌다, 우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 마음은 성령이 임하셨기에 받은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인 것이다.

 

5G시대, 4차산업, 통제할 수 없는 큰 변화가 오니 교회도 이 변화에 준비하고 적응해야 한다. 5G산업은 디지털 혁명에 기반하여 물리적, 공학적, 생물학적 공간의 경계가 희석된 기술융합이다. 이전에는 분리되어 있는 다양한 과학기술들을 융합해서 사회, 경제, 문화의 패러다임을 전환시키는 것이다. 이 기술을 토대로 '초연결' 사회가 이루어지는 것이 4차 산업혁명이다. 하지만 이미 우리 사회는 <언컨택트> 시대로 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불편한 소통' 보다 '편안한 분리'를 택하여 왔던 것이다. 이것은 코로나19 때문에 갑자기 만들어진 새로운 트렌드가 아니었다. 재택근무, 원격근무 등 이미 있었고 확장되려는 트렌드이었다. 오늘날, SNS24시간 연결된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더욱 고립되어 가고 있다. 지구 뒤편의 모르는 사람과는 연결되어 있으나 바로 옆집의 이웃과는 소통하지 않는다. 디지털 소통의 시대에 오히려 끼리끼리 문화는 더 강화되어 가는 듯하다.

 

성령은 '교통하시는' 하나님이다. 바울은 교회에 보낸 편지의 마지막을 축복 인사로 마무리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13:13)  그리스도에게 '은혜', 하나님에게 '사랑'을 속성으로 대표하였다면 성령을 '교통하심'으로 표현하였다. 신자들에게는 서로 교제하고 사귀어 막힘이 없는 관계를 창조하심, 즉 소통하시는 하나님이 내주하신다. 그래서 자신과 불화한 인생들에게, 타인과 높은 장벽을 쌓고 사는 사람들에게, 더구나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와 디지털 양극화로 깊이 갈라진 이 세상에 요청하신다. 사물의 초연결만이 아니라 사람과의 연결, 사랑의 소통으로 생명과 평안을 나누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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