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비유의 비밀

2021. 6. 6. 18:59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때까지니라.'(사6:6~12)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마13:10-15)

 

최근 전직 장관의 회고록 출간과 관련하여 이슈가 뜨겁다. 출판되어 나오는 즉시 팔려나가면서 최단시간 베스트셀러 등 많은 새 기록들을 세우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많이 읽히기로 성경만한 책이 있었을까? 영원한 베스트셀러요 인류가 존재하는 한 그 운명을 같이 할 책이 성경이다. 그럼에도 그 성경만큼 오해되고 무시당해 온 책도 없다. 아마도 그 내용이 추상적이며 상징적이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성경 말씀은 하나인데 그 내용 해석은 수백 가지이다. 그 모호한 성경 내용들 중에서, 또 그 많은 성경 해석들 중에서 사람들은 자기가 듣고 싶어 하는 것만 취사 선택한다. 망하리라는 말은 싫고 흥하리라만을 복음으로 받는 것이다.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같은 구절은 백번을 들어도 은혜되는 진리이나 ‘네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망하리라같은 어절은 다른 사람들 이야기로 치부해 버린다.

 

나름의 열심과 나름의 믿음

교회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익숙한 어구가 있다. <한번 믿은 사람은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 또는 <한번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면 절대 그것이 지워지지 않는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이 말을 좋아한다. 그럼에도 성경은 분명하게 말한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더라도 탈락할 수 있음을 말이다. 실상, 예수 자신이 택하고 가르친 제자들조차도 우왕좌왕 방황하지 않았던가! 개중에 어떤 이는 부인하고 또 어떤 이는 배반도 하였다. 베드로나 가룟 유다나 나름 예수에게 열심을 다하였고 애정 또한 대단했었다. 문제는 그 열심과 그 애정이 그들 나름대로의 믿음이었다는 사실, 이것이 오늘의 사람들이라고 별반 다를까?

 

자기를 더 중히 여기는 사람을 향해 성경은 <그러면 망한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이런 저런 해석으로 <절대 망하지 않는다>고 해석해 주는 성직자들도 있다. 사람들은 그런 성직자 설교와 강론을 더 좋아한다. 그런 교회와 성당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니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하는 교회라고 선전한다. 성경은 왜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으로 우리를 헷갈리게 할까? 이런 저런 해석의 여지가 없도록 구체적이고 명료하게 말씀하셨더라면 좋았을텐데. 예수도 당신의 말씀을 모두 비유로 하셨다. 그래서 제자들이 물었다.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왜 말을 빙빙 돌려서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씨를 뿌린다고 말하지 말고 말씀을 전파한다고 하면 될 것을, 새가 와서 먹어버렸다 하지 말고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있는 말씀을 빼앗았다고 하면 될 것을 말이다.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는 대답하셨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케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이건 또 무슨 말인가? 누구에게는 천국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고 누구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이것이 공평의 하나님이 하는 일이란 말인가? 도무지 납득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는 더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함은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기 때문이라니? 말씀을 비유로 하니 사람들이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데 게다가 저희들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말까지 비유로 더 하여 버렸다.

 

보지 못하는 눈과 듣지 못하는 귀

제자들이 자신의 말을 이해하건 말건 예수는 거침없이 계속 말씀을 이어갔다.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문제가 이것이었다. 이사야 때부터 있어왔던 일이었고 예수 당시의 일이었으며 오늘의 일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마음이 악해져 자기 귀를 둔하게 만들고 눈도 감아 버린다. 둔한 귀와 감은 눈의 주체는 사람들이다. 몰려나온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을 듣으려는 의지가 없었다. 병을 고치고 생활 필요를 구하며 로마에서 독립되기를 원했을 뿐이었다. 이런 사람들에게 공중 나는 새를 봐라. 그들은 심지도 거두지도 아니한다.’는 말은 은유요 수수께끼였다.

 

사람들은 공중 나는 새처럼 살 수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사람이 어떻게 공중 나는 새처럼 내일에 대한 준비 없이 살 수 있나? 그것은 게으른 사람들이나 일하기 싫은 인간들이 할 짓이지,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그럴 수는 없는 일이고, 또 그래서는 안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 마음이 그러하였다. 그러니 예수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으며 눈길도 주지 않았다. 사람들의 눈과 귀는 세상에서 먹고 입고 사는 문제에 예민하다. 돈 버는 방법론에 시선을 집중하고 성공하는 방법론에 귀가 열려 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에 의하여 고침 받기를 두려워한다. 예수를 알아 예수처럼 인생을 살까봐 주저한다. 예수처럼 산다는 것은 공중 나는 새처럼, 들에 핀 백합처럼 세상을 산다는 말인데 그렇게 살기는 싫은 것이다

 

그러므로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한다는 비유에서 여기 못한다는 말은 안한다로 바뀌어야 한다. K.J 버전은 ‘they do not see’, ‘they do not hear’로 번역하였다. 이것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라는 것, 즉 ‘볼 마음, 들을 의지, 깨어 있는 상태로 살아갈 마음이 있느냐라는 말이다. 이런 마음으로 보고 듣는 모든 말씀이 비유이다. 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비유가 진리를 드러내기 위한 것임을 알고 또 실제로 그 비유를 통하여 실체를 본다. 이런 사람에게는 예수 말씀이 더 이상 비유가 아니며 상징도 아니다. 반면, 하늘 세계로 들려는 마음 없이 말씀을 듣고 보는 이들에게는 비유이고 상징일 뿐이다. 세상 보다 하나님 나라를 얻고자 하는 마음, 나타난 세계보다 감추어진 세계에 의지가 있는 자. 제도와 조직의 굴레를 벗어나 고독한 성찰을 하는 자, 이런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을 보고 들을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예수로 살아 간다.

 

예수의 인용과 이사야의 예언

예수의 인용문은 이사야 원문과 좀 다르다. 예수 인용문 대로라면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하는주체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사야 본문은 어떤가?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가서 전하라는 말씀이 좀 이상하다. 이스라엘을 구하겠다는 희망의 메시지도 아니요 하나님 세계를 보게 하겠다는 회복의 메시지도 아니었다. 오히려 돌이켜 고침을 받을까를 염려하는 말씀이었다. 마태에서는 고침 받을까 두려워하는 주체가 사람들로 묘사되고 있는 반면, 이사야에는 그 주체가 하나님이었다.

 

그래서 이사야가 물었다. ‘어느 때까지니이까?’ 이에 하나님은 대답하셨다.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겨져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황폐하여지기를 원하는 성읍은 하나님이 약속으로 주신 땅이었고 당신을 섬기는 이들의 거룩한 도성이었다. 그런데 그 성읍들이 부서지고 그 땅이 황폐할 때까지 그 땅과 사람들을 고치지 않겠다는 말이다.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한다는 말, 즉 지금 고치기에는 걸림돌들이 너무 많다는 말이다. 메신저가 가서 할 일은 바로 그 걸림을 제거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그들을 고칠 수 있도록 준비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이 거룩한 도성이요 가꾸고 지킬 약속의 땅이자 영원한 거처이셨건만 인간들이 보이는 현실에 미혹되어 그 땅을 하늘 예루살렘으로 여겼고 거룩한 장막이자 영원한 처소로 여겨 애지중지하였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현실을 우선시하였던 것이다.

 

북이스라엘이 망하고 남유다가 바빌론 포로로 끌러감도 모두 이런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었다. 사도행전의 그 번성했던 초대교회가 핍박으로 흩어지게 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며 유럽과 미국의 교회들이 빈껍데기로 전락하게 되는 것 또한 동일한 흐름이다. 어쩌면 오늘의 우리 교회들도 머잖은 장래에 지금의 번성을 회고하며 그때가 좋았지를 추억할 것이다. 이런 황폐와 이런 망함이 올 때까지 하나님의 고치심은 없다. 이는 하나님도 두렵고 믿는 사람들도 두려운 일이다. 한쪽은 영의 세계를 육신의 복으로 생각할까 하는 두려움이요, 다른 한쪽은 영의 세계가 뭔지 몰라 육적 세계를 잃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그러니 예수의 모든 말씀은 비유이다. 그 말씀을 비유 세계에 머물게 하느냐 실존 세계로 끌어 오느냐는 것은 인생들 각자의 몫이다. 성읍이 부서지고 삶이 황폐하게 됨도 우리들 각자의 문제이다. 이미 나타난 결과들과 진행되는 역사 또한 우리들이 보고 들은 것들의 반영물들인 것이다. 

 

결론

성경은 말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다고 말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님을 믿는 것이다.(히11:1~2)

'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 좋은 것으로의 삶  (0) 2021.06.23
새 영과 새 마음으로  (0) 2021.06.13
멈춤의 힘  (0) 2021.05.31
슬기로운 노인 생활  (0) 2021.05.31
마땅히 알 것을 가르치라  (0) 2021.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