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31. 20:52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너는 육 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 년 동안 그 포도원을 다스려 그 열매를 거둘 것이나 제 칠 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며 너의 곡물의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고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나무의 맺은 열매를 거두지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 임이니라....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그 오십 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레25:1-12)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4:16-19)
<Silent Spring>, 우리말로 <침묵의 봄>이라는 책이 있다. <레이첼>이라는 작가가 죽어가고 있는 지구를 고발한 책이었다. 무분별한 살충제 사용으로 병들어 가는 자연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이 책의 출판을 막으려 화학업계의 무지막지한 방해 공작과 로비가 있었음에도 출판되어 사람들에게 생태환경의 중요성을 각인시켰다. 인간은 지구 생물 중 유일하게 자기 사는 환경을 파괴하는 존재이다. 스스로를 창조주와 동급이라고 여긴다. 광활한 우주에서 생명 현상이 관찰되는 유일 행성, 그 지구가 푸른색으로 보임은 바다 때문이다. 표면 70% 바다, 30%는 갈색 흙이다. 하나님은 이 특산물로 사람을 지으셨다. ‘사람’이라는사람’ 단어 '아담'은 흙을 뜻한다. 인간은 생명 활동에 필요한 영양 성분을 물과 공기 이외에 모두 흙에서 공급받는다. 흙이 생명의 기본재료인 것이다. 하지만 콘크리트 문명의 출현으로 흙과 사람의 연결고리가 끊겼다. 인간과 땅의 교감이 상실된 것이다.
약속의 땅
노예들이 약속의 땅으로 향했다. "그 땅은 너희가 살던 이집트 땅이 아니다. 이집트에서는 너희가 밭에 물을 대느라고 고생하였으나 약속의 그 땅은 빗물을 흡수할 수 있는 산과 계곡이 많은 땅이라. 야훼께서 살피고 지켜주시는 땅이라."(신11:10-12) 그런데 정말 그런가? 히브리인들이 노예로 살던 나일강 삼각주는 천혜의 땅이었다. 물이 규칙적으로 차고 범람하기에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었지만 가나안 땅은 낙원이 아니었다. 정말 힘들게 일해야만 열매를 거둘 수 있는 땅이었다. 다만 열심히 일하고 가꾸는 그 과정에서 새 방법을 찾아 향상을 도모할 수 있었다. 그들은 땅을 지나치게 혹사하니 이후 어려움을 겪게 됨을 깨달았다. 땅은 세월이 흘러야 회복되니 그때 가서야 다시 이용할 수 있음을 알아 땅과 지속 가능한 관계를 깨달은 것이다. 그 관계는 생태적 평화로 나타났다.
그래서 그들에게 땅에 대한 규칙이 생겨났는데 안식년과 희년이 그 제도이었다, 7년마다 땅을 쉬게 하는 것도 모자라 그 7년이 일곱 번째 닥쳐오는 49년과 그다음 해 50년, 그 2년간은 땅을 쉬게 하였다. 안식년과 뒤이은 50년째 희년에도 쉬어 유대인들은 2년간 비축한 식량으로 살아야 했다. 그러고도 어떻게 살까? "만일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만일 일곱째 해에 심지도 못하고 소출을 거두지도 못하면 우리가 무엇을 먹으리오 하겠으나 내가 명령하여 여섯째 해에 내 복을 너희에게 주어 그 소출이 3년 동안 쓰기에 족하게 하리라"(레25:20-21). 유대인들은 그 말씀을 믿고 실천했다. 고고학자들이 연구한 자료에 의하면, 고대 유대인들의 수확량은 당대 세계 최대였다고 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오??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5:13)" 소금이 자기 맛, 즉 짠맛을 잃어버리는 일이 있을까? 그 소금이 식염이 아닌 거름, 즉 염화나트륨이 아닌 질산나트륨이라면 그럴 수 있다. 유대인들은 지중해 연안에서 유일하게 퇴비를 사용했던 민족이었다. 이 퇴비에 요르단 계곡에서 얻은 질산나트륨을 첨가하였던 것이다. 이것에 오랫동안 공기가 공급되지 않으면 미생물 유기체가 질산나트륨을 가스 같은 질소 화합물로 분해시킨다. 그렇게 되면 질소 거름으로 고유 성질을 잃으니 쓸모를 잃어 밖에 버려진다. 안식년과 희년 법을 주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퇴비 사용 지혜를 주셔서 그 척박한 땅에서도 풍성한 생산을 가능케 하셨다.
멈추는 힘으로
나무는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서 있는 듯 보이나 실상 바삐 움직인다. 햇볕을 받아 잎에서 영양분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뿌리와 몸통 여려 곳에 운반하고, 뿌리로부터 다시 물을 받아 이를 가지 끝까지 옮긴다. 그렇게 1년 내내 열심히 살면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런데 그런 나무에게 한 가지 엉뚱한 면이 있다. 어느 해가 되면 갑자기 열매 맺기를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병충해를 입은 것도 아니고 토양이 나빠진 것도 아닌데 꼭 '삐친 사람'처럼 꽃도 열매도 시원찮다. 이유는 '해거리' 때문이다. 열매를 맺지 않고 해를 거르는 것이다. 어느 해에 열매를 너무 많이 맺고 나면, 다음 해 가을에 어김없이 빈 가지만 덩그러니 남는다. 살아남기 위해서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나무의 자생력이 사라지고 기력을 소진하게 되기에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지속가능성을 유지하기 위한 시스템이다. 그 해거리 동안 나무는 오직 재충전에만 신경 쓴다. 그렇게 1년의 휴식이 끝난 다음 해에 나무는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하고 실한 열매를 맺는다.
인간 사회에서 <포화 상태>에 이른 사람들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손에 잔뜩 쥔 채 하나도 놓지 않으려 하고 남보다 먼저 도달하기 위해 앞만 보고 달리는 인생들이 너무도 많다. 그런 사람들은 그 숨소리조차도 다급하고 그 다급한 삶에서 풍기는 냄새도 역하다. 마치 기계를 과하게 돌리 때 나는 그 고약한 냄새만큼이나 역하다. 백무산의 <멈춤의 힘>이라는 시를 모르고 살아가는 인생들이다. "기차를 세우는 힘, 그 힘으로 기차는 달린다 / 시간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미래로 간다 /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 그로 인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안다 / 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 그 힘으로 나는 내가 된다 / 세상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달린다 / 정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달리는 이유를 안다 /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이스라엘이 안식년 희년법과 같은 땅의 계율을 지키지 않았다면 몰락했을 것이다. "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4-5)" 맥락 없이 읽으면 화를 낼만한 구절이다. 왜 부모의 죄로 자식들이 벌을 받아야 하나? 하지만 '생태파괴의 범죄'라면 이해가 된다. 환경파괴는 자식과 그 자식의 자식이 또 그 자식의 자식이 대가를 치른다. 유대인들이 욕심으로 땅을 과도하게 사용했다면 자손 4대까지 내려가서야 그 땅의 회복됨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도시에 사는 우리들 현실은 쓰레기가 될 물건을 무한 생산하고 무한 욕망을 충족받으려는 문명이다. 멋대로 쓰고 맘대로 버리는 플라스틱과 각종 폐기물은 우리 자녀들과 자녀들의 아이들에게 막대한 고통과 피해를 준다. 우리는 잠시 이 땅을 살면서 너무 깊게 땅에 '생체기를 내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들의 회복
유대인들에게는 많은 음식 계명이 있다. 레11장에는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언급, 먹지 말라 한 부정한 육지 동물들로 낙타, 말, 돼지, 소. 이들의 공통점은 땅의 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데 기여하는 동물들이다. 낙타와 말은 수송에 쓰이고 돼지는 인간의 음식을 먹으나 소는 인간에게 쓸모없는 풀을 먹는다. 물속에 사는 것 중에서도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 개구리였다. 고대 이스라엘은 말라리아 지역이었다. 70년대 말 방글라데시에서 개구리를 대량으로 잡아 그 넓적다리를 프랑스에 팔고 큰돈을 벌었지만 말라리아가 창궐을 피하지 못하였다. 본래 방글라데시에는 말라리아가 없었던 지역이었는데 모기를 잡아먹는 개구리를 모조리 잡아 파니 말라리아 역병이 기승을 부렸던 것이다.
새 중에는 독수리, 솔개와 같은 매 종류와 까마귀, 올빼미, 부엉이, 학, 박쥐 같은 것들을 먹지 말라 했다. 이들은 모두 '위생 경찰'로 불리는 새들이었다. 썩은 고기를 먹는 것들이요 들쥐나 집쥐를 먹는 새들이니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이다. 위생에 관한 규율은 더 엄격하였다. 쥐의 사체나 어떤 주검이 질그릇에 떨어지면 그 그릇을 깨뜨리라 했다. 또 어떤 것의 주검이 화덕이나 화로에 떨어지면 그것들도 즉시 깨뜨려버리라 했다. 당시 질그릇이나 화덕은 집안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음에도 죽은 사체 등을 통해 한번 집기가 오염되면 다시 원상으로 돌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유대인들은 당시 주변 민족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삶을 살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고 약속 때문이었다.
공생애 사역의 시작에서 예수가 먼저 하신 일은 자기 동네 나사렛에 들러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심이었다. 거기서 이사야의 글을 읽으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주의 은혜의 해! 구약의 희년이다. 땅과 땅의 사람에게 자유와 해방과 쉼을 선물하는 해인 것이다. 하나님은 신자적 삶으로 만물이 건강하고 평화롭기를 원하신다. 그러니 피곤한 자는 쉬고 달리는 자는 멈추며 생산과 업적에 지친 자는 과감히 해거리를 하라. 사람도 쉬어야 하고 땅도 쉬어야 피차 평화롭고 지속 가능한 관계로 살 수 있다. 그렇게 그 계명을 신실하게 지키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천대까지 생명의 은혜를 베푸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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