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31. 19:42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 은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어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지고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12:1~7)
고령사회로 가는 오늘날, 잘 살고 잘 죽는 것만큼이나 만큼이나 '잘 늙어가는 것'도 중요하다. 늙어감을 비참해하는 어느 옛 노인의 주절거림이다. ‘낮에는 꾸벅꾸벅 졸지만 밤에는 잠이 오지 않고 곡할 때는 눈물이 없고 웃을 때는 눈물이 나며 30년 전 일은 기억하면서 눈앞의 일은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고기를 먹으면 뱃속에는 없고 이빨 사이에 다 끼고 흰 얼굴은 검어지는데 검은 머리는 희어지는구나.’ 그런가 하면 어떤 현명한 노인은 나이 들어감의 '즐거움'을 이렇게 주절 거리기도 한다. ‘대머리가 되니 빗이 필요 없고 이가 없으니 치통이 사라지며 눈이 어두우니 책을 안 봐서 편안하고 귀가 안 들리니 세상 시비에서 멀어지니 좋기만 하구나.’
1. 늙어감에 대하여
노아 시대 이전 사람들은 오래 살았다. 아담 930세, 므두셀라 969세, 노아 950세로 정말 오래들 살았다. 하지만 인간의 악으로 그 수명을 120세로 줄더니 급기야 70세, 강건해야 80세가 되었으며 그나마도 수고와 슬픔의 연속 속에 신속히 지나가 버렸다. 구약에서 늙음은 부정적이었다. 늙으면 힘이 쇠잔해지고 맛이나 소리의 좋고 나쁨조차 판단키 어렵게 되니 생의 덧없음을 토로했던 전도자는 청년들에게 충고한 바가 있다. "사는 것이 즐겁지 않다고 할 노년에 이르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전12:1).
드물기는 하지만 노년에 대하여 긍정적인 성서 구절들도 있다. 몸의 힘은 약해지나 늙은이에게는 세상사 인간사의 본질을 통찰하는 지혜가 있다 하여 "젊은 자의 영화는 그의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움은 백발이라"(잠20:29)고 묘사하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고 노인이면 다 지혜로운 사람일까? 외경 집회서에는 나이 든 사람이 해야 할 의무와 경고가 언급되어 있다. "젊었을 때 아무것도 모아두지 않으면 늙어서 무엇을 할 수 있으랴?"(집25:3) 여기 '젊을 때 모아둘 것'은 재물이 아니다. 생의 경험이다.
젊어서 풍부한 인생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이 어찌 늙었다고 젊은이에게 지혜로운 충고를 해줄 수 있으랴? 그러니 나이가 들었다고 모두가 어른은 아니다. 삶의 아픔과 시련, 인내의 시간, 무너지고 다시 일어선 경험들이 없는 사람은 젊은이들에게 삶의 안내자가 되어 줄 수 없다. 어른이라 모든 것에 지혜롭고 노인이라고 모두 정의를 깨닫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지혜는 창조자에게 있고 명철도 그에게 속해 있다. 그러니 노인들은 자기 경험에서 비롯된 지혜를 항상 옳다 여기지 말아야 한다.
2. 지혜의 근원을 알아야
<장로들의 전통>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명>을 범했던 바리새인들 같은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수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시71:18) 이 시인처럼,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도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마땅하다. 베드로는 노인이 되어 경험과 연륜이 풍부한 연장자들에게 권면하였다. 복잡하고 긴 말 같지만 요약하면 세 가지를 권면하였다.
공동체 원로들이 맡은 무리는 특정인의 무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무리'라는 것. 그 무리를 돌보는 일에 기꺼이, 자발적인 헌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 지시하고 훈계함이 아니라 <본이 돼라>,>, 즉 <삶으로 보이라>는 것이었다. 바울 또한 노년의 자기 삶을 돌아보며 교인들에게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을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2-14)라는 말로 고백하였다.
늙어가면 배움을 놓아버리려 하고 신앙생활에서도 자기 경험담으로 하나님을 가리려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노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바울에게서 본다. 자기 삶의 무용담을 밤새도록 펼쳐도 모자랄 그였지만 그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을 향하여 달려가노라"라고 했다. 그는 신앙 안에서 날마다 새로움을 경험했고 과거 자랑을 배설물처럼 여겼다. 자기의 부족을 알기에 여전히 달린다는 말이다. 그에게 노년은 이생과 이전의 자랑과 추억에 사는 삶이 아니라 닥친 그날 하루를 새 경험, 새 존재가 살아가는 여정이었다.
3. 나이를 먹는다는 것
지구상에 3천여 종의 언어가 있지만 나이를 밥처럼 '먹는다'라고 말하는 민족은 우리밖에 없다. 나이가 '들다'는 말도 '먹는다'에서 나왔다. '들다'의 높임말이 '드시다, 잡수시다'이니 이 역시 '먹는다'와 연관되어 새해가 되면 떡국을 먹는다고 하고 그래서 나이도 한 살 더 먹는다고 하였다. 밥과 나이만 먹는 게 아니었다. 마음도 '먹는다'고 하였다.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무엇이든 먹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돈도 먹고, 욕도 먹고, 때로는 챔피언도 먹는다고 한 적이 있다. 전 세계가 '한 점 잃었다' 고 하는 축구 경기에서도 우리는 '한 골 먹었다'라고' 하였으니 가히 <만사먹통>, 먹는다는 말로 다 통하였다.
심리에서 '겁먹고' '애먹는다', 소통에서 '말이 먹힌다' '안 먹힌다', 경제에서 경비가 '얼마 먹었다', '먹혔다', 사회에서 연륜을 ''짬밥 좀 먹었다'라고' 말해왔다. 우리 선조들이 배고픈 삶을 겪다 보니 먹는다는 말의 적용이 많았지만 이런 표현들에서 인생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나이를 먹고 마음도 먹는 것이라면 나이 듦은 곧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어떻게 나이를 '먹는가'는 어떻게 마음 '먹는가'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모세가 죽을 때 나이 120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신34:7). 그렇다. 사명을 가진 자는 죽지 않는다. 인간이 죽는 것은 늙었을 때가 아니라 사명을 다 했을 때이다.
늙어감은 막을 수 없지만 추억 속에서 살 것인지 위에서 부르신 소명으로 살 것인지는 여전히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신앙으로 사는 인생은 늙어도 빛이 청청한 의인으로 살 수 있고 또 그렇게 살아야 한다. 겉사람은 낡아가나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져 가는 믿음 생활의 비밀, 그것이 슬기로운 노인생활이다. 젊은 날에는 바빠서 하나님과의 시간에 소홀하였다면 한가함으로 다가오는 노년은 전능자를 더 가까이할 기희의 시간들이요 은혜의 시간들이다. 출생과 젊음 못지않게, 노년 또한 나를 더욱 그분, 그 하나님에게로 다가서게 하는 축복의 시간들인 것이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 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돼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벧전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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