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알 것을 가르치라

2021. 5. 30. 23:09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 내가 선한 도리를 너희에게 전하노니 내 법을 떠나지 말라. 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었으며 내 어머니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었노라.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이르기를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무릇 너의 얻은 것을 가져 명철을 얻을지니라.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였느니라.(잠4:1-9)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고전8:1~3)

 

삶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세테에 순응해서 살아가는 방식과 자신을 지켜 세태에 역행하는 방식이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방원의 何如歌는 세상 흐름에 순응하는 것이 지혜라 여긴 시였다. 쓰러져 가는 고려에 집착 말고 뜻있는 사람들이 힘을 합해 새 세상을 열자고 정몽주에게 건넨 말이었다. 하지만 실상 그 속에는 추악한 권력욕이 숨겨져 있다. 하여 정몽주 또한 이에 시조로 답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 비장함이 느껴지는 시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삶의 지조를 지킴이었다현실에서는 처세술에 능한 사람이 승자이고 포은 같은 이들은 융통성 없는 패자미련한 사람으로 보인다

 

마땅히 품어야 할 것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여기 '''지혜'로서 잠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 하였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과 약속을 존중한다는 말이다. 그런 삶은 배움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 바울은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 했다. 하나님 경외와 연결되지 않은 지식은 독이 되어 사람들을 해치는 경우기 많다. 솔직히,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소위 지식인들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다.

 

어떤 이는 부동산이나 은행 잔고를 품고 살고, 어떤 이는 자기 학위를 품고 산다. 또 어떤 이는 야망을 품고 살고, 어떤 이는 복수심을 품고 산다. 그런 세상 와중에도 아름다운 뜻을 품고 사는 이들이 있다. 신앙! 지혜! 바로 그 예수를 품고 사는 이들이다. 예수는 자신을 가리켜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라 하셨다. 지혜의 현현이신 예수를 품고 살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지혜자가 말했다. 훈계를 굳게 잡으라고. (13)"훈계를 굳게 잡아 놓치지 말고 지키라. 이것이 네 생명이니라."

 

예언자, 지혜자들을 통해 주신, 그리고 예수께서 보이신 삶을 놓치지 말라. 간디는 인도 식민치하에서 신음하던 민중들 사이에 진리를 굳게 붙잡자는 운동을 일으켰다. 그는 진리는 결코 지지 않음을 믿었기 때문. 법정에 선 예수에게 빌라도가 던진 질문 "진리가 무엇이냐?". 진리를 몸으로 구현한 예수를 바로 자기 앞에 두고도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은 것이다. 진리는 세상에서 무력해 보이지만 궁극적 승리는 진리 편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는 사람은 이미 승리한 사람이다. 호랑이 등에 올라탄 사람이 살아날 길은 죽을 힘을 다해 그 호랑이 등을 매달리는 것뿐인 것처럼 진리의 길에 들어선 이들이 살 길은 하나님의 가르침에 올인함에 있다.

 

지혜의 길과 악의 길

 

두 개의 길은 대조된다. 주의 길을 걷는 사람은 그 걸음이 곤란하지 않고 달려가도 실족하지 않는다? 정말 그럴까? 주의 뜻대로 사는 길이 쉽지 않은데, 그 길이 험하고 좁은 길인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면 힘겨운 일 투성이다. 걸려 넘어질 때도 많다. 그런데도 주님의 길을 걷는 자들은 걸음이 곤란하지 않고, 달려가도 실족하지 않는다니? 산길은 울퉁불퉁하다. 방심하면 돌부리에 차여 넘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길을 주께 맡기고 리듬을 타다 보면 어느새 그 험한 길, 위험한 과정을 지나와 있게 된다.

 

실은, 자신 스스로가 뭐를 해보려고 힘을 쓰다 보니 지쳤던 것이다. 주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내가 걷는 게 아니라 주님이 나를 통해 걸으심이다. 우리가 할 일은 다만 주께 온전히 나를 맡기는 것. 일제강점기에 오산학교를 세워 민족의 지도자들을 길러내셨던 이승훈의 일화. 돌아가시기 닷새 전에 제자들이 세운 동상 제막식에 참석해서 연설을 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기대한 그의 말은 뜻밖에도 간단했다. “저는 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시키셨을 뿐입니다.” 그렇다. 나의 삶, 우리 삶을 하나님이 다 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걸으신다면 험한 산 길, 불편한 좁은 길에서도 우리가 실족할 수가 없다!

 

그러나 악인의 길은 보기에 지름길 같아 보여 유혹된다. 노력도 하지 않는데 쉽게 돈 벌고, 성공하고 인지도를 쌓아 유명세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힘 있는 사람 주변을 맴돌고 윗사람에게 때마다 인사 잘하고 아랫사람에게는 뇌물을 받고 적당히 뒤를 봐주기도 하는 사람들, 세상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잘 나간다. 그런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서 착하게 살면 손해 보는 현실이기에 어차피 더러운 이 세상이라는 포기와 타협이 종용된다. 처음부터 악인은 없었다. 죄에 이끌리는 인간의 성향이 그 뿌리에서부터 깊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에서 '원죄'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가인을 보고 선을 행치 않으면 죄가 네 집 문에 엎드린다면서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리라"(창4:7) 하셨다.

 

죄에게 기회를 주지 말아야 

 

죄는 호시탐탐 우리를 사로잡을 기회를 엿본다. 적당히 살라고, 원만한 삶을 위해 어느 정도 타협하라고, 그래야 너도 편하고 상대도 답답해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한번 우리를 잡으면 놓아주질 않는다. 여기에 맛을 들이면 사람들은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어렵지 않다. 죄에게 한번 길을 터주고 나면 죄는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한다. 수면제를 자주 복용하다 보면 수면제 없이는 잠을 이룰 수 없는 것처럼, 죄인의 길에 선 사람들은 악행을 밥 먹듯 하고 불의의 떡을 먹고 강포의 술을 마신다. 그렇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살면 좋을까? 그것이 행복일까?

 

이스라엘의 지혜자는 중요한 진실을 밝혀주고 있다. 의인의 길은 마치 돋는 햇볕과 같아서 점점 밝아져 원만한 광명에 이르게 되고, 악인은 어둠 속을 걷다가 무언가에 걸려 넘어져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살다가 뭔가에 걸려 넘어지면, 내가 무엇에 걸렸구나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하늘 음성에 귀를 닫고 살기에 자기 삶의 징조를 해석할 줄 모른다. 죄는 우리를 무지몽매의 어둠 속에 빠뜨린다. 여전히 악인의 형통이 부러운가? 진리이신 주님을 가슴에 품고 살자. 5월 가정의 달, 진리를 위해 부름 받은 젊은이들을 찾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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