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2. 19:41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과 그 자손이 기름 부음을 받는 날에 여호와께 드릴 예물은 이러하니라.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일을 항상 드리는 소제물로 삼아 그 절반은 아침에, 절반은 저녁에 드리되 그것을 기름으로 반죽하여 번철에 굽고 기름에 적시어다가 썰어서 소제로 여호와께 드려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라. 이 소제는 아론의 자손 중 기름 부음을 받고 그를 이어 제사장 된 자가 드릴 것이요 영원한 규례로 여호와께 온전히 불사를 것이니 무릇 제사장의 소제물은 온전히 불사르고 먹지 말지니라.(레6:19~23)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2:14~17)
이스라엘의 제사장 계급은 특별하였다. 아무나 되는 직분이 아니었다. 야곱의 여러 아들들 중 레위 지파, 그중에서도 아론의 집안만이 담임토록 선별되었다. 너무도 구별되고 특별한 직분이었기에 아침저녁으로 자기들의 정체성을 잊지 읺도록 소제 예물을 태워 바쳤다. 그런데 예수의 출현으로 예배 전담 직분로서의 제사장 구별이 무너져 버렸다. 예수는 선언하였다. 그리심 산도 아니요 예루살렘도 아니라고! 누구든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그 사람이, 그 장소가 제사장이요 예배처라고 선언한 것이다. 소위 만인제사장설이 탄생한 것이다. 오늘의 신자들은 그 자신 제사장으로서의 역활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페르소나, 그리고 인생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는 한 배우가 있다. 금년 오스카상을 받은 여배우 이야기이다. 그녀가 받았다는 오스카 상도 대단한 것이지만 그보다 산전수전 겪은 노배우의 입담과 그 인간적 매력에 세계의 언론들까지 관심을 보였다. 그 관록에 거만할만함에도 그녀에게 어떤 권위감이나 우월감을 느낄 수가 없다. 어른들, 특히 나이 많은 교수나 성직자들에게는 꼰대끼가 있기 마련이다. 대체로 이런 꼰대들은 도덕적이고 모범적이며 성실하지만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이 유연하지 못하고 유머감과 경청 자세가 부족해 젊은 사람들로부터 따분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그런데 세계의 여배우상을 수상한 그녀에게서는 그런 것을 느낄 수가 없었다.
<인생이란 한 편의 알 수 없는 드라마이고 모든 인간은 배우이다>.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한 말이다. 배우란, 대본에 충실하고 연출자 의중에 맞게 행동하는 극 중 인물이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배우의 연기와 그 배우의 성품은 별개라 생각해 왔다. 물론 배우의 연기 활동 역시 먹고 살기 위한 직업중 하나이다. 하지만, 진짜 배우는 작품 촬영 동안은 밥벌이를 생각하지 않는다. 연기자로서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자기의 직업적 존재 의미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때가 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순간이고 삶이다. 진정한 배우는 연기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지 살기 위해서 연기하지 않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연기할 때, 극 중 인물의 얼굴에 마스크를 씌웠다. 그들은 그 마스크를 페르소나라 불렀고 그 단어에서 한 사람의 인격과 그 성품을 나타내는 단어 Person이 나왔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이런 가면극이다.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그리고 아들로서 딸로서, 또 명령하는 자로서 명렴 받는 자로서, 변호사로서 목사로서 교수로서 등 알고 보면 다들 각자의 '페르소나'이다. 모두가 나름의 Person 연기에 몰입하듯 자기 역할을 충실하게, 깊이 있게 하는 것이 인생이고 삶이며 드라마이다. 그런 면에서 모든 인간은 각기 자기의 인생 드라마를 펼쳐가는 배우들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향기
집을 떠나 객지에서 고생해본 사람들은 안다. 가족이 기다리는 집, 설령 그 집이 작고 초라한 집일지라도 얼마나 귀중한가를 집 떠나보면 절감하는 것이다. 요즘,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체험의 기간들이다. 매주일 교회에 모여 예배에 참여했었기에 1년이 넘어서는 기간 동안 희한한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모여서 찬송 부르고 기도하며 서로 안부를 나두던 일들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고 있다. 물론, 영상 매체를 통해 비대면 설교를 보고 성경공부도 할 수 있지만 느끼는 감정과 받는 은혜의 깊이가 다르다. 새삼 신앙 공동체라는 교회의 소중함을 절절히 느끼는 시즌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얻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그 1년의 기간 동안 신자들은 <홀로 있음>의 시간까지 경험해 보았다. 교회 공동체가 흩어지고 예배가 무너져 홀로 남아도 내면 깊은 곳에서 생겨나는 신앙 정체성에 대한 갈증을 느낀다. 성령이 내주 하여 신령한 빛으로 다가오는 영적 허기를 재발견하는 것이다. 본래, 종교란 것이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었다. 한 개인이 자신의 고독함에 진지하게 대면함, 그것이 종교의 출발이었다. 사실 누군가와 함께 있노라면, 특히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가 힘들다. 예의를 차려야 하기 때문이고 또 가정과 교회와 사회가 씌어 준 역할의 페르소나 때문에 홀로 정직하고 당당하게 존재할 수 없었다. 그간 교회는 이 개인적인 대면의 시간을 간과해 온 면이 있다. 무엇을 하든 교회 집단의 이름으로, 구제도 집단으로 선교도 집단으로, 하다 못해 기도까지도 집단 통성 기도로 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 왔다.
그러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세상으로부터 기독교가 외면당하고 비판받았다. 기독교인들에게서 풍겨 나는 교회 냄새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기대했건만 기독교라는 종교 냄새가 너무 강하여 역겨웠던 것이다. 젊은이들이 꼰데들을 싫어하듯, 일반 사람들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기독교 꼰데로 느꼈다. 기독교인들에게서 정직과 성실과 배려 관용에서 일반 사람들보다 더 높은 수준을 기대해 왔는데 그 신망도 무너져버렸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스카상을 받은 여배우에게 호응함은 그녀가 도덕적이거나 봉사적 삶을 살아서가 아니다. 그녀가 자기희생적 인간이어서는 더더욱 아니다. 그저 소탈하고 부담 없이 어울림직함이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예수의 페르소나
예수의 공생에 3년 삶이 당시 사람들, 특히 도덕적이고 모범적인 종교 엘리트들에게는 어떤 인상이었을까? (마11:19)"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라는 인상이 데세였다. 요즘 말로 하면, 시장바닥 허름한 선술집을 드나들며 아무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순댓국에 막걸리를 마셔대는 괴짜 랍비였던 것이다. 그의 파격적인 언사와 촌철살인 같은 말들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지 않다>는 말로 대표된다.. 당시로서는 폭탄 같은 말이었다. 이 언급에서 그의 인격과 인품을 느낀다. 그에서 꼰대 냄새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곤란케 하려고 난해해한 질문을 해온 이들에게 위트와 재치로 당혹함을 안겼다. 이런 예수가 정말 싫어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위선적이고 권위적인 사람들, 자신들만이 사회 질서를 수호한다고, 자신들만이 하나님을 지켜드리는 호위병으로 행세하는 사람들, 예수는 이런 이들을 정말 싫어하였다.
하나님 앞에서 예수는 철저히 인자, 즉, <사람의 아들>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인간이란 바로 이런 피조물임을 보여주는 탁월한 인류의 <대표 배우>였다. 동시에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바로 이런 분이라고 투명하게 보여주는 하나님 <대표 배우>였다. 초기 교부들은 헬라 철학을 차용하여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설명한답시고 어려운 교리 신조를 만들어 냈으나 이해가 더 어려울 뿐이다. 언제 어디서나 그렇듯 진리는 단순하고 명료하다. 명품 배우는 맡은 배역에 스스로 몰입하여 자신과 극 중 인물을 최대한 동일시한다,, 그런 연기가 배우의 생명이고 배우로서 존재하는 의미이며 배우 그 자신에게도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이다.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 처형 집행 책임자였던 백부장이 혼잣말로 중얼거린 장면은 예수의 배우 역할이 얼마나 명품이었는지를 보여 준다.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15:39).
신자는 구원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 즉 예수의 페르소나이다. 신자의 이 페르소나적 삶이 어떤 사람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 어떤 사람에게서는 생명에 이르는 냄새이다. 억지로나 가식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신자는 그 인격과 삶과 언행에서 이런 냄새를 풍긴다. 그래서 그 냄새로 어떤 이에게는 역겨운 죽음의 냄새, 어떤 이들에게는 향기로운 '생명의 냄새' 곧 생기가 된다. <기독교인 냄새'>가 아니라 <예수의 향기>를 내고 싶다. 신자로서의 삶은 그 예수의 페르소나로 산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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