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내 가족들인가?

2021. 5. 9. 16:29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시127:1~5)

 

때에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대답하시되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둘러 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막3:31~35)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아

 

가정의 달 5월에 부모님에 대한 논어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나뭇가지가 잠잠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효도를 하고자 하나 부모님이 기다려주지 않는다>. 곁에 있을 때는 몰랐다가 정작 떠나고 나면 귀하게 느껴지는 존재가 부모이다. 신인 정호승은 벽에서 빼낸 구부러진 못에서 늙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 구부러진 못을 옛날처럼 망치로 펴서 다시 벽에 쾅쾅 박지 못함은 그 못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었다. 가족의 희망과 절망의 무게를 온몸으로 견뎌내고 이제 세월의 뒤안길로 퇴장하는 늙은 아버지의 구부러진 등은 가족들을 위해 평생 감당해야 했던 희생과 헌신의 징표였다.

 

한때 벽에 박혀 녹이 슬도록

모든 무게를 견뎌냈으나

벽을 빠져나오면서 그만

구부러진 못이 되었다.

 

도대체 가정이 무엇이리고? 가족이 어떤 존재이기에 부모들은 이렇듯 희생적인 사랑을 할까? 좁은 의미에서 가정은 가족이 살아가는 공간적 장소이고 넓은 의미에서 가정은 인간관계로 주어지는 가족으로 구성된 관계이다. 한 에서 함께 살며 공동의 생산 소비 활동의 가계가 가정인 것이다. 다소 건조한 개념이지만 실제로는 정서적 유착이 상당한 정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가정에 대한 사람들의 감정은 상반되기도 한다. 어떤 이들에게 가정은 둥지혹은 으로 여겨진다. 세상살이에 지친 자신을 품어주고 삶에서 받은 상처와 스트레스를 해독해주는 공간인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 가정은 벗어나고픈 감옥이. 권위적인 부모에게서 자란 사람들이 대개 그렇다. ‘하라‘하지 말라는 말이 다반사인 환경에서 하루라도 빨리 탈출하고픈 것이.

 

가정에 대한 예수의 양가감정

 

시대 발전과 역사 변화를 위해 위험을 각오하고 사는 이들이 있다. 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이들을 존경한다. 하지만 정작 내 자식만은 이득도 되지 않는 그 위험하고 부담스러운 일에 끼지 않기를 바란다. 대부분의 부모들 마음이 그러하리라. 예수 자신은 결혼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정 꾸리는 것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 참석해 새로 탄생하는 가정을 축복하셨고 포도주 공급으로 잔치 여흥이 깨지지 않도록 배려도 하셨다. 육신의 가족에 대한 애착도 컸다. 30세까지 가정에 충실하였다. 하지만 그 가정이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방해한다면 단호한 입장을 취하였다.

 

그래서일까? 먼저 가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해 달라는 어느 제자의 요청에 예수는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라고 하였다. 참 매정한 말이다. 심지어 마10:36에서는 이렇게까지 말했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이리라" 사실, 가정은 사사로운 인정과 안정을 무기로 보편적 가치나 공공성을 추구하지 못하도록 할 때가 많다. '끈끈한 정'이 좋은 말이기는 하지만 그 끈끈한 정이 불의를 합리화하는 데 활용된다면, 그것은 극복되어야 할 정서이다. 반칙을 해도 내 가족이니까 봐주고 잘 아는 사람이니 눈감아준다면 사회 공의는 무너진다. 사회 공정성에 '패거리 의식'은 위험한 것이다.

 

예수는 공생애 시작 시점에서 가정을 떠났다. 오늘날에도 여전하지만 당시 유대사회에서 그것은 더욱 부덕한 행위였다. 한 집안의 장남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가족들을 건사할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장남에 대한 소문이 가족들에게 큰 부담이었다. 병자를 고치고 악귀를 퇴치하는 모습에 사람들이 그를 미쳤다’, ‘귀신들렸다’하니 그 소문이 고향까지 들려 가족들로서는 불안했다. 그래서 걱정된 마음으로 가족들이 예수 있는 곳으로 찾아왔다. 그들은 예수가 있는 집 안에 들어갈 생각도 못하고 사람을 보내 그를 불렀다. 보소!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으오.”(3:32).  이때 예수는 뜻밖의 말을 하였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3:33). 그러면서 주변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3:34~5).

 

예수의 가족과 하나님의 가정

 

예수는 가족에 대한 새 기준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혈연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태도가 가족의 기준이었다. 하늘 아버지를 가장으로 모든 사람이 가족이 되고 형제가 되는 세상, 이것이 예수가 꿈꾼 새 가족, 새 가정이었다. 세상은 사람이 가진 영향력이나 힘의 크기로 그 사람들 서열을 매겨 왔지만 믿음의 공동체인 하늘 가정에서는 모든 이들이 서로 지체가 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해 나가는 공동체인 것이다. 힘과 재능의 크기는 역할의 차이일 뿐 서열이 아니며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 또한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풍성하게 하라고 주신 것이다. 세상은 쓸모를 가지고 사람들의 우열을 매기지만 믿음 공동체는남보다 앞서가는 열 걸음을 경축하기보다 남들과 함께 걷는 한 걸음을 더 귀하게 여긴다

 

폭력이 다반사이고 부패가 당연한 세상에서 인간에 대한 무례함이 도를 넘고 있는 요즘이다. 힘없고 주목받지 못하는 이들의 가슴에 거침없이 대못을 박아대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 예수는 새 가족을 만들라 하셨다. 서로 배려하며 책임지는 공동체, 나눔과 친절함을 경험할 수 있는 사회, 약한 사람도, 무능한 사람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중받고 받아들여지는 그런 현실을 만들라 하셨다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가족이다. 이런 가족으로 사노라면 절대 기쁨을 경험한다. 하나님이 약한 사람들 속에 값진 보석을 숨겨 두셨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다가서야 그 보석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이란 강한 것 같이 보이지만 실상 약하다. 넘어지지 쉽고 깨지기 쉬워 아슬아슬한 존재인 것이다. 그러니 약한 서로에게 다가가 서로의 가슴 깊은 곳에 묻혀있는 보석들을 캐내어 보자.

 

우리 부모들의 사랑은 따뜻하였다. 눈을 감고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포근하고 애잔해진다. 하지만 그런 부모를 경험치 못해 냉랭한 인생을 살아온 이들도 많다. 혈육의 어머니 아버지를 공경하는 일도 마땅한 일이지만 차가운 세상에서 각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따스함을 전하는 일도 소중하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가족들이다. 그러니 복을 빌어주는 자로, 생명을 살리는 가족으로, 가정의 외연을 넓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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