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2. 14. 11:41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에녹은 육십 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 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1~24)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은 모든 인간들의 로망이었고 지금도 추구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속에 죽음을 보지 않고 영원히 사는 나라로 들어간 인물들이 종종 나온다.
인류 초기 시대의 에녹과 이스라엘 남북 왕국 시대의 예언자 엘라야였다.
그중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동행했던 에녹이 땅에서 받은 상이 무엇이었던가?
400년 가까운 장수의 축복이었나? 당시 족장들은 대부분 1,000년 가까이 살았었다.
그런 이들에 비하면 에녹은 오히려 그 삼분의 일도 안 되는 인생을 살다 갔다.
그렇다고 그가 사는 동안 엄청난 부자로 살았다는 기록도 없다. 대체 그는 어떤 상을 받았나?
1. 상 주시는 분을 믿어
히브리서는 에녹이 하나님은 상 주는 분임을 믿고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묘사하였다.
상이 아니라 그 주시는 분에 방점이 있었으니 정작 그가 받은 상은 영생, 즉 영원한 삶이었다.
메시아의 재림과 심판을 믿고 동행의 삶을 살았던 에녹은 하나님께 영생을 상으로 받았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에녹의 삶은 메시아를 믿고 기대하며 영생을 상으로 얻은 자의 삶이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그렇다면 그는 이미 이 땅에서 영생을 살았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 영생은 단지 시간적으로 영원히 사는 것만을 말함이 아니다.
하나님 통치 아래에서 그 뜻을 분별하여 그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삶이 영생이다.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암3:3)
이런 삶은 하나님과의 뜻과 합치하지 못하고서는 나올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런 영생을 살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살펴야 하고 그 통치 아래로 들어가 순종하는 삶에 힘쓰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인가?
예수 사후, 엠마오 마을로 내려가던 글로바와 마리아가 부활 예수와 동행하게 되었다.
부활 예수와의 그 동행에서 그들에게 먼저 나타났던 특징이 있었다.
그것은 예수가 성경 말씀을 풀어 줄 때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어서 나타난 특징은 그 길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 예수를 증거 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들은 말씀이라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
그런 일을 즐거워할 뿐만 아니라 에녹처럼 그 말씀 속의 하나님을 전하는 증인이 된다.
바로 그것이 하늘나라의 삶이고 영원한 삶, 즉 영생의 삶이다.
왜 성경은 굳이 아담의 7대손 에녹 때에 사망이 이기지 못하는 장면을 묘사했을까?
‘7(칠)’이라는 숫자는 안식의 숫자였다. 하나님도 당신의 창조 7일째에 안식하였다.
그래서 성경에서 ‘7’이라는 숫자는 항시 안식의 수, 완전수, 신의 숫자로 쓰여왔다.
2. 안식의 삶으로
아담의 7대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산 것은
곧 하나님이 완성하고자 하는 안식의 삶으로 들어갔음을 암시한다.
그러니 아담의 후손인 우리도 이 땅 현실 삶에서 이런 안식을 경험해야 한다.
사망을 이기고 죄를 벗어나 거기서 얻는 충만한 행복을 느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상하고 무지한 이들은 성경의 이 에녹 이야기에서 야릇한 기대를 한다.
그가 이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사실보다는
그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승천한 것에 더 관심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는 ‘어떻게 하면 에녹처럼 죽지 않고 승천하는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를 열망한다.
그러나 육신의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함이 정말 그렇게 중요한 사안인가?
우리에게 육신의 죽음은 영생으로 들어가는 문에 불과한 것이기에
그런 육신의 죽음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그만인 사소한 사안일 뿐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여기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죽음 뒤에 이어지는 영생을 이 순간 살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여기서 예수를 믿고 살아나 영생을 경험해야 하늘로 이어지는 승천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는 주일날 예배당에나 다니며 살다가
죽어 천국에 가서야 온전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여긴다.
그러나 아니다. 영생은 여기서부터 이미 시작되어야 한다.
즉 하나님 나라의 삶은 땅에서부터 이미 시작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삶의 원리인 십자가 삶을 세상이 방해한다. 결사적으로 막아선다.
이 현실 세상에 그 나라의 통치가 임하는 모양을 마귀가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삶에 나타나는 이 방해 양상을 가리켜 성경은 '성도의 고난'이라 하였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많이 언급되는 책이 데살로니가전서이다.
바울은 이 책에서 예수의 재림을 말하면서 직장을 포기하라 하지 않았다.
가정을 버리고 재림에 대비하라든가 기도원으로 모이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재림을 말하면서 그의 다른 그 어떤 책 보다현실 삶을 강조하였다.
즉 에녹처럼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고 기다리는 이들은
바로 여기서 그 재림 후에 완성될 영생을 미리 살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3. 하나님과 동행
영원한 삶은 단순히 시간적 영원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다.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과 동행하는 하늘 삶을 살아내는 것이 곧 영생인 것이다.
그래야 죽음 이후에 맞게 되는 본격적인 영생도 어색하지 않다.
그럼에도 어떤 이상한 이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
가정을 버리라 하고 직장도 정리하라 하며 심지어 수도원이나 기도원에 올라가 칩거하며
더 나아가 자기들끼리 집단생활을 하기도 하며 이런저런 해악들을 사화 공동체에 끼친다.
그런 이들은 나름 그런 것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 여겨 도모하는 것이겠지만
그런 처신과 결단들은 무지한 행동들이고 성경을 오해하는 맹종일 뿐이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고 300년 동안 자식을 낳으며 하나님과 동행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그렇게 일상에서 시작되어 영생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에녹은 자식도 없고 가정이나 직장도 없는 수도사가 아니었다.
그는 아이들의 아버지였고 한 여자의 남편이었으며 한 집안의 가장이었고
한 부족의 족장이었으며 패역한 죄인들 사이에서 열심히 전도했던 한 인간이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그렇게 내 일상생활에서 시작되어 가는 것이다.
결국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하늘 백성들이 그 나라 삶의 원리를 여시서 살아냄이다.
내 일상에서 영생의 삶,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면서
그 삶이 주는 은혜와 의미를 공감하고 경험하면서 소망이 든든해져 가는 것이다.
약속의 땅 입성을 두려워했던 이들에게 가나안 정탐꾼들이 가나안 땅의 실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그 맛을 보여 주자 그들이 가나안을 향해 진군할 수 있었다.
인간이란 맛보지 않은 것을 소망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하늘 삶을 이 세상에서 경험하며 사는 삶,
성경 말씀은 그런 삶을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삶'이라 부른다.
그 삶은 내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이 나를 항복시켜 이끌어 가는 삶이기 때문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땅에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인생의 주인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자기 이익만을 위해 살다가는 큰 것, 즉 영생을 볼 수가 없게 된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동행의 삶이니 그런 삶은 꾸준히 한 발 한 발 내딛는 하루하루에 있다.
결코 건너뛰거나 지름길로 가는 것이 아니요 그것도 혼자 갈 수 있는 삶이 아니다.
현실이 다급한 세상 현실은 모든 것을 단기와 속성으로 완성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신앙생활마저도 단기 속성으로 하고 싶어 하는 듯하나 신앙은 속성이 아니다.
결론
오늘의 현실 교회당들은 어떤가? 40일 특별기도, 100일 철야기도 등
단기로, 그리고 속성으로 승부를 보려 하는 경향들이 너무도 다분하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한 발 한 발 걸어가는 하나님과의 동행이 설득력도 없고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별하게 신령한 은사를 받아 단기간에 위대한 신앙인 반열에 오르려 한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신앙의 선진들 삶 그 어디에도 그런 신앙생활은 없다.
하후 하루, 매 순간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인생을 꾸준히 걸어가는 것,
그렇게 하나님과 함께 한 걸음씩 꾸준하게 동행하다 보면
어느새 그분과 함께 하늘에서 걷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세상에서 엄연히 살아 있던 에녹이 이 땅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그런데 그는 죽지 않았다 한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 나라에 있다. 세상에서 한 발 한 발 매일매일 하나님과 함께 걷다 보니
그 길로 에녹은 하나님과 함께 평상시와 똑같이 동행을 하면서 하늘나라로 걸어 올라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삶이어야 하니 믿음으로 사는 이들은 그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 누구와 동행하고 있는가? 돈인가? 명예인가? 우리는 지금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가?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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