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가 시작에 앞서니

2026. 2. 15. 14:23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9~14)

 

옛설날, 즉 구정 연휴가 시작되었다. 45일 전에 신설날이 있었다.

이 설날은 무엇이고 저 설날은 또 무엇이기에 이리 긴 연휴로 보내는가?

애매하고 명료하지 못하지만 모두가 원하고 전통이기에 엉거주춤 그냥 보내고 있다.

이런 애매함과 모호함들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성경 읽기에서도 자주 있다.

그런 애매함을 털어내고 모호함을 걷어내 깔끔하고 명료하게 이해하는 방법은 없을까?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를 때 우선 지은이를 보고 목차를 본다.

그 다음으로 서론과 결론을 대략 훑어보면 그 책 전체 내용이 대략 짐작된다.

이것이다. 성경 말씀도 그렇게 읽어보는 것이다. 

 

1. 종말이 창조를 앞서니

성경의 지은이는 성령이고 서론은 창세기이며 결론은 요한계시록이다.

그러니 성경도 서론과 결론을 잘 정리해 두면 그 중간 내용 이해가 수월하다.

무엇보다 결론인 요한계시록을 정확하게 읽고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서는 서론보다 결론, 즉 종말이 창조를 앞서기 때문이다.

이 말은 끝이 시작을 앞선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있다.

종말은 끝을 의미하고 창조는 시작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무슨 말인가?

물론 끝이 시작을 앞선다는 이 말이 시간 속에 사는 우리에게는 이해가 어렵다.

인간인 우리는 인과율, 즉 원인과 결과라는 규칙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을 벗어나 영원 속에서 살게 됨을 믿는 이들에게는 어려운 말이 아니다.

그 세계에서는 무엇이든 다 알 수 있고 어떤 것이든 다 할 수 있는 곳,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세상이기에 말이다.

시공간의 제한이 없는 그 영원에서 어떤 것을 계획하였다 함은 이미 그 일은 이루어졌다.

계획하는 즉시 그 일을 실현할 능력자가 시공간의 제한이 없는 영원 속에서

어떤 것을 계획했다면 그 일은 전혀 불가능한 사건이 아니라는 말이다.

창세전, 시공간의 제한이 없는 영원 속에서 창조라는 것을 계획했을 때,

이미 하나님은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을 계획했던바 그것을 이루어 놓았다.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은 이미 창세전 영원에서 완성되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종말이 창조를 앞서고 믿음이 구원을 앞선다는 말이 가능하다.

하나님은 완전함 분이다. 그런 하나님에게는 우연이나 우발적 사건이란 있을 수 없다.

계획도 목적도 없이 즉흥적으로 어떤 일을 한다 함은 전지전능한 분에게 불가능하다.

하나님 심중에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이 그려져 있었다면

창조는 그 목적지를 향한 첫 삽이었다.

그러니 창조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었다.

성경에서 묵시를 읽을 때 시간을 벗어나 이해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2. 시공간의 틀을 벗어나

하나님은 그 묵시의 완성을 설명하기 위해 시공간이라는 창조를 시작하였다.

그러니 엄밀히 말해 시간이라는 것은 물질이 존재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시간은 물질이 존재하는 방식인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인간들이 영원에서의 일을 시간이라는 틀로 이해하려니

성경 해석에서 빈번히 벽에 막히고 더 나아가 오해나 왜곡을 낳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최종 목적지인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 즉 종말을 먼저 읽고

그 종말이 어떻게 시작되어 완성점으로 가는지 그것을 기록한 처음 이야기,

즉 창세기를 읽는 것이 제대로 된 순서이다.

 

창세기를 읽으면서 요한계시록의 역사와 우주 종말,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진행되어 가는지를 배운다.

그러니 요한계시록을 모르고 창세기를 이해할 수 없으며

창세기를 모르고 요한계시록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

그렇게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성경은 창세기의 벌거벗은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요한계시록의 흰옷 입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창조되는가를 말해준다.

성경은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을 암시해 주고

요한계시록은 창세기를 완성하는 구조로 기록되어 있는 책이다.

 

그 중에서도 시작과 끝을 비교할만한 대표 구절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창2:9~10)

이런 창세기의 에덴 강과 생명나무 구절이 요한계시록에서는 이렇게 묘사된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계22:1~2)

 

3. 완성점을 향하여

여기 요한계시록에서도 강이 나오고 생명나무가 등장한다.

서론이 결론을 힌트 하고 묵시가 예언을 완성하는 구조인 것이다.

그런데 서론에는 있으니 결론에서 빠진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이 선악과였다.

왜 빠져 있을까? 실수였을까? 하나님의 말씀이니 빠진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결론인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었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즉 다시는 시험이 없는 완전한 회복,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기에 선악과나무가 없다.

이렇게 서론은 결론을 힌트 하고 결론은 서론을 완성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론인 창세기에는 아담과 하와의 결혼 장면이 나오고

결론인 요한계시록에는 어린양 예수와 교회의 혼인이 나온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창2:22~25)

그런데 아담과 하와의 결혼 장면에 대한 표현이 어색하다. 아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것이라’

분명 아담은 인류의 시조요 최초의 인간이었다. 그런 아담에게 부모가 있었던가?

그러니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이 표현이 이상하다. 이 또한 기록상의 실수였을까?

 

아니었다. 이 혼인 장면은 단순히 최초 인간끼리의 결혼을 묘사함이 아니었다.

다만 어떤 것을 상징적으로 그려갈 것임을 암시하는 것, 즉 하나님의 임재 표현이었다.

창세기의 이 혼인 장면은 하늘 아버지, 즉 부모를 떠나는 것,

이 땅에 내려와 신부인 교회와 혼인하는 것,

그리고 그들과 하나로 연합되는 신랑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리고 세상 끝 날에 하나님의 백성들과 하나 되는 사건,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완성할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천국에는 있지도 않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우리는 역사와 인생이라는 현실 삶에서 연합관계라는 것을 경험한다.

이미 출발점인 창세기에서 완성점인 우리와 그리스도의 혼인이라는 그림을 계시한 것이다.

 

결론

서론인 창세기에서 신부가 벌거벗고 있었다면 결론인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떻게 나오는가?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계19:7~9)

창세기에서 벌거벗었던 신부가 요한계시록에서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있다.

역시 서론이 결론을 힌트 하고 결론이 서론을 완성하는 구조이다.

이렇듯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은 긴밀하게 연결된 책들이다.

그러니 내 삶에 닥쳐오는 어려움, 오늘의 난관들이 암담하기만 하겠는가?

명료하고 분명하게 밝히 보게 될 날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으니 말이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계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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