돕는 자

2026. 1. 30. 12:54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3:8~13)

 

선하게 산다는 것, 모든 인간들이 추구하고 권하는 삶이다.

하지만 진짜 ‘선한 삶’이라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적확한 삶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행하는 모든 것은 선하다.

그 분이 살인을 지시함도 선이고 홍수로 모든 생물들을 몰살시킴도 선이다.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해서 이스라엘을 학대하게 한 것도 선이었다.

아니 더 나아가 처음 인간 아담이 선악과를 도발하도록 허락한 것도 선이었다.

 

1. 사단 조차도 도구로

그 선한 당신의 뜻을 이루어감에 하나님은 사단까지도 도구로 사용하였다.

그것을 알려주고자 성경에 사단의 유혹과 인간의 타락이라는 이야기를 전개하였다.

솔직히 말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 외 다른 것에는 안중에도 없다.

그 우리를 당신이 요구하는 수준으로 만들기 위해 지금도 이 역사를 경륜해 가고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그러니 믿음으로 사는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선한 일이다.

하고 있는 일들이 꼬여가도, 자녀가 속을 썩여도, 몸에 병을 달고 살아도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바라보는 한 모두 선한 일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선한 뜻에 따라 선한 결과를 이루어내기 위해 우리 삶에 개입한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그런 하나님이 인간을 에덴동산에 두고 그 동산을 다스리고 지키라 하였다.

그런데 무엇을 다스리고 어떻게 지키라는 말인가?

그 명령과 함께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도 함께 내렸다.

이는 다스리고 지키는 일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과 관련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인 인간을 만물의 제사장으로 세웠다.

그러니 인간은 그것들을 다스리고 지키며 하나님께 순종해야 했다.

 

에덴동산의 삶이라는 원리에서 떠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

그것은 곧 아담을 그 에덴동산의 제사장으로 세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살고자 하는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창조 목적으로 돌아가 그분께 순종하고 의존하며 그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모든 피조물들이 장조자의 창조 목적으로 돌아감에 기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창세기 여기 이야기를 읽으면 하나님의 선함이 더욱 돋보인다.

하와가 뱀의 미혹으로 선악과를 도발하였

이내 남편 아담에게도 그 선악과를 주어 함께 오염되었다.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딤전2:14)

 

2. 돕는 배필로

성경은 분명 하나님이 여자를 '돕는 배필'로 주셨다 하였다.

그런데 여자가 남자를 도와 그가 하나님의 생명에 이르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저승사자가 되어 남자를 죽도록 돕는 모양이 되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여자를 가리켜 ‘돕는 배필이라’ 기록케 한 이유가 무엇일까?

정말 아담의 죽음을 돕는 배필이라는 의미였을까?

이 이야기에서 돕는 배필은 남자인 아담의 자리에 예수를 대입시키고

여자인 하와의 자리에 교회인 우리를 넣어보면 그 상징적 의미를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남자인 아담 자리에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인간을,

여자인 하와 자리에 아담의 갈비뼈로 창조된 인간인 여자를 넣어서 읽으면

여기 돕는 배필 이야기가 역사 속에서는 주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읽을 수 있다.

 

하나님이 아담을 만들고 그를 에덴동산에 둔 목적이 무엇이었던가?

그로 생명나무 실과를 먹고 당신의 창조 목적에 맞는 삶을 영위하게 함이었다.

아담을 돕는 배필로서 하와는 바로 그것을 도와야 했다.

처음 인간들은 그렇게 서로 도와가며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있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이었던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6~17)

여기 ‘명하여 가라사대’라고 번역된 ‘짜바’ 동사는 강조 피엘형이다.

생명나무 실과를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반드시 먹어야 하고 선악과는 절대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처음 인간에게는 생명나무실과를 반드시 먹고 도달해야 할 목표지점이 있었다.

하나님의 최종 목표는 생기를 소유한 아담이 아니었다.

생명나무 실과를 먹은 영생이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해 돕는 배필을 지었다.

그런데 그 돕는 배필이 아담에게 생명나무실과를 먹도록 도운 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먹게 만듦으로써 오히려 아담을 죽게 만들었다.

‘여자‘라는 돕는 배필의 등장과 그녀의 실패를 통해 주려는 메시지가 있었다.

생명나무실과를 먹고 영생 얻음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

인간들에게서 나오는 그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 속 사건들에서 영적 메시지와 역사적 메시지를 구별하여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아담에게 있어 진짜 돕는 배필은 누구였어야 했나?

 

3. 에제르, 곧 파라클레토스

여기 ‘돕는 배필’이라는 단어에 쓰인 히브리 원어 ‘에제르’는 시편에서도 쓰였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시115:9~11)

여기 쓰인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라는 어구가 바로 ‘에제르’이다.

그러니 이스라엘, 즉 우리의 돕는 배필은 하나님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 ‘에제르’라는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바꾸면 곧 ‘파라클레토스’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14:16)

여기 ‘보혜사’라고 번역된 단어가 원문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이다.

결국 창세기의 ‘돕는 배필’은 ‘성령 하나님‘이어야 했던 것이다.

과연 우리를 영생으로 이끌 유일한 돕는 배필은 성령 하나님 뿐이다.

그러니 생명나무 실과를 향한 인간의 모든 시도와 수고들이 허사인 것이다.

하와라는 여자는 그런 인간의 약함과 한계를 드러내 보여주는 기재,

즉 진짜 돕는 배필의 필연성을 주지 시키기 위한 ‘돕는 배필’이었다.

 

이제 구원받은 돕는 배필은 그 안에 성령이 있기에 진짜 돕는 배필이 될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기 뱀을 수식하는 형용사로 ‘아룸’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한글개역성경은 그 단어를 ’간교하다‘라고 번역하였기에 뱀에 대한 인식이 왜곡되어 왔다.

하지만 '아롬;이라는 히브리어의 본래 뜻은 ‘현명하다, 지혜롭다’이다.

예수도 마태복음에서 열두 제자를 파송하며 그들에게 ‘뱀처럼 지혜로워라’고 말하였다.

이 말에 쓰인 헬라어 ‘프흐로니모스’가 여기 ‘아룸’이라는 히브리어와 같은 의미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이 기록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이겠는가?

 

결론

하나님을 떠난 지혜와 명철은 인간에게 ‘득’이 아니라 ‘독’이다.

그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라는 어구가 히브리어로는 ’아마르‘라는 동사인데

계속형 동사이기에 오래도록 서로 말하면서 지내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와는 현명하고 지혜로웠던 뱀과 자주 함께 했었다. 친밀하게 지냈던 것이다.

사단은 그렇게 하와와 친밀한 관계였던 뱀을 이용하여 인간을 미혹하였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태초의 뱀이 지금처럼 징그러운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라 추측했다.

아니 처음에는 뱀에게 다리도 있었을 것이라고도 추론까지 하였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서야 뱀이 땅을 배로 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스스로에게 묻는다. 선이 무엇인가? 착하게 산다는 것이 어떤 삶인가?

성령 하나님, 즉 보혜사가 함께 하지 않는 것은 그 어떤 위대한 행실도 선일 수 없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빌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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