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1. 25. 20:42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1:27~28)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하나님 창조의 절정은 바로 우리 인간 창조였다.
그 인간인 우리를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서 만들었다.
당신의 형상인 인간을 하나님은 어떤 목적으로 만들었는가?
그리고 그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1. 회복된 형상으로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신의 자녀로 회복 된 우리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결정한다.
우리 인간은 원래 이 우주 만물을 다스리도록 지음 받은 존재였다.
우주의 주인인 창조자 하나님으로부터 그 대권을 위임받아
생육하고 번성하며 만물들을 정복하고 다스릴 임무를 부여받은 것이다.
그래서 일찌기 인간을 일러 ‘만물의 영장’이라고도 불렀다.
물론 인간들이 지칭해서 만들어낸 수식이지만 창조 이유를 표현하기에 손색이 없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고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력으로 충만했기에
마땅하고도 충분하게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래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이름까지 처음 인간 아담이 지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하늘에 낮과 밤을 주관할 발광체를 창조하고
큰 광명 작은 광명이라 불렀던 것들에게 해와 달과 별이라 이름까지 지었다.
그러니 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해야 할 소명을 부여받은 인간은
다른 짐승이나 사물, 혹은 해와 달과 별을 신앙하거나 섬겨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죄가 들어오면서 인간은 오염되었고 그 위상과 능력이 추락하였다.
그 결과, 하나님의 생명력을 상실하게 되었고 이어 하나님의 보호마저 떠나갔다.
그렇게 되자 인간들은 자신들이 다스려야 할 것들에게 오히여 절하는 처지로 변질되었다.
다스리고 정복해야 할 것들에게 소원을 비는 어리석고 나약한 존재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땅과 바다를 섬기고 하늘까지도 섬김의 대상으로 삼아버렸다.
그래서 모세는 출애굽 한 이스라엘과 우리에게 이 창조 기사를 통해 말하였다.
‘너희들이 섬기는 신들은 모두 너희를 위해 만들어진 하나님의 소품일 뿐이다.
너희가 섬기고 의존해야 할 분은 오직 한 분 창조주 하나님이다.’
이집트에서 수백년을 살아온 이스라엘이었기에 그 땅의 종교 인습을 버리라는 말이었다.
인간의 가장 원시적 종교 형태인 토테미즘은 특정 동물을 숭배하는 모양으로 이어져왔다.
우리나라에도 단군 이야기 속에 웅녀 신화가 있다.
전형적인 토테미즘인데도 이 이야기를 실제 역시로 믿는 이들이 적지 않다.
뿐만 아니라 시골에서는 처마나 광에 사는 구렁이를 ‘지킴이’라 하여 신성히 여겼었다.
그래서 그 구렁이가 나가거나 죽으면 집안에 불길한 일이 생길 것이라고 믿어
그 구렁이에게 먹이도 주고 불편함이 없도록 섬겼으니 이 역시 토테미즘이었다.
2. 토테미즘 아래
인도에서는 아직도 소를 숭배하고 있다 하는데 이 역시 토테미즘이 한 형태이다.
인간들 사회에 이런 동물숭배 의식이 생겨남은 모두 인간의 나약함 때문이었다.
인도인들이 소를 섬기게 된 것에는 그들에게 소가 없으면 도저히 살 수 없는 현실 때문이었다.
인도에서 가장 중요한 연료는 소똥이었다. 나무나 다른 연료는 구할 수 없었다.
인도인들은 소똥을 잘 말려서 불을 지피고 음식도 해 먹었으며 난방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소똥은 인도인들이 집을 짓는데도 아주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집을 지은 후에 벽에 시멘트를 바르는 것이 아니라 소똥을 발랐다.
소똥을 물에 잘 개서 쓰면 인도인들에게 훌륭한 벽 마감재가 되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인도인들에게 소는 없어서는 안 될 너무도 중요한 짐승이었다.
약한 인간들이었기에 소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소와 협력을 해야만 했는데 그나마 소는 그리 흔한 짐승도 아니었으니
그것이 소의 숭배로 이어졌다. 소뿐이겠는가? 곰이나 사자, 독수리 숭배도 마찬가지였다.
포악한 짐승이라 힘으로 막을 수가 없었으니 나약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한 것이다.
자신들보다 힘센 짐승들과 나약한 인간들이 타협한 결과가 토테미즘이었다.
그래서 고대 이집트 같은 나라에서는 독사 코브라를 대대로 섬기기도 하였다.
투탄카멘을 비롯한 이집트 파라오들의 초상화나 부조에는 코브라가 새겨진 왕관들이 많다.
치명적인 독을 가진 코브라는 중동지방에 사는 그들에게 가장 두려운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약한 인간들이 그 두려운 짐승들을 달래기 시작하고 섬기기 시작하였다.
잘 섬길 터이니 해코지하지 말고 그 강한 힘으로 자기 원하는 것을 좀 도와 달라는 것,
이것이 토테미즘이었기에 짐승들에게 산처녀나 아기를 산채로 바치기도 하였다.
하나님은 모세의 창세기를 통해 출애굽 한 이스라엘에게 외쳤다.
‘너희가 애굽에서 섬기던 그 짐승들과 일월성신은
너희의 다스림을 받도록 내가 창조한 것들이다. 그러니 너희는 나만 바라보라.‘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그 우상 문화에서 한시도 빠져나와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바벨론 포로 이전까지 하나님께 제사 드리던 제단 옆에
우상에게 제물 바치던 제단을 함께 만들어 놓고 제사를 두 번 드리기도 했다.
하나님도 섬기고 하나님이 주지 않는 것들은 우상에게서 받아내겠다는 심보였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너희가 나를 버렸다‘고 말했으니 이 양상은 오늘이라고 다를까?
하나님을 찾아 예배당에 나오기는 하나 여전히 주 관심사는 자신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이나 예배당 출입을 자기 원하는 것 얻는 것에만 마음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인생들에게 하나님은 주저없이 ’너희가 나를 버렸다‘고 말한다.
3. 두 개의 제단
실상 지금도 예배당 안에 제단을 두 개 놓고 우상을 섬기는 인생들이 태반이다.
하나님의 걸작품이요 그분의 형상인 인간을 향한 마귀의 흔들기는 그만큼 집요하다.
그럼에도 정신 차리고 사는 우리가 섬겨야 할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이 주지 않으면 굶는 것이고 그 하나님이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야 한다.
우리는 만물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다스리고 정복하여 그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하나님이 창조했던 처음 아담은 그 역할을 잘 감당하였다.
그가 짐승들 이름 지을 때 모든 짐승들이 그의 명령 하나로 그에게로 나아왔다.
이름을 지어준다 함은 그 이름을 받는 대상에 대한 통치권과 소유권을 의미한다.
게다가 이름을 지어줌은 그것의 특성과 내용을 파악하고 관리한다는 뜻이다.
적어도 타락 이전의 아담은 만물을 그렇게 장악하고 다스리고 있었다.
타락 후에 인간이 퇴락했지만 그 다스림이 노아 때 잠깐 회복되었었다.
노아가 방주 안으로 온갖 짐승들과 새들을 어떻게 데리고 들어왔겠는가?
방주 안에 넣기 위해 노아가 새 잡으러 다니고 사자 잡으러 다녔던가?
노아와 관련된 성경 이야기 어디에도 짐승들을 사냥하러 다녔다는 말이 없다.
마치 아담이 짐승들의 이름을 지을 때 아담의 명령을 듣고 그에게로 나왔던 것처럼
노아의 명령에 짐승들이 방주로 줄지어 나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 방주 안에서 노아는 그 짐승들을 정복하고 보살피며 먹였다.
그러니 노아와 그 방주는 회복된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었다.
그렇게 회복될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는 표상으로서의 노아,
거기에다가 그 노아의 말에 순종하는 짐승들의 순종적인 그 모습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 그 질서를 모형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렇듯 인간은 짐승들을 비롯한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대리자였다.
그래서 원문 성경에 창조 여섯째 날에만 그날 앞에 ‘그’라는 정관사가 붙었다.
‘그 여섯째 날’, 즉 바로 그 여섯째 날이 왔다는 것이다.
이 여섯째 날은 다른 다섯 날들과는 다른 특별한 날이라는 뜻이었으니
마치 앞의 다섯 날들은 ‘그 여섯째 날’을 위해 존재한 듯한 문학기법의 표현이었다.
그 여섯째 날에 만물의 영장이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날에 그런 우리 인간이 어떻게 창조가 되었던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인간 외의 것들을 창조할 때 하나님은 단지 ‘무엇 무엇이 있으라’고 명령만 하였다.
그 명령에 따라 천지와 만물이 무에서 유로 창조가 되었다.
그리고 인간 이외의 자연의 모든 창조는 모두 ‘종류대로‘ 이루어졌다.
결론
오직 인간을 만들 때만 하나님이 ’우리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만들자 하였고
게다가 인간을 만듦에 있어 세 분 하나님이 서로 의논하는 장면까지도 보여주었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여기 ‘만들다’는 동사로 쓰인 ‘아싸’는 1인칭 복수형이다.
히브리어 문법에서는 동사가 주어를 품으니 ‘우리가 만들다’라는 의미이다.
여기 쓰인 ‘하나님’이라는 ’엘로힘‘도 단수 ‘엘로하’의 복수형으로서
’신들, 하나님들‘이란 뜻이니 세 분 하나님이 인간 창조를 의논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본질이 같기에 ‘의논’이라는 단어는 실상 하나님께 적합한 단어는 아니다.
그럼에도 바빙크나 캘빈, 카이퍼를 포함한 많은 신학자들이 이런 표현에 큰 의미를 두었다.
왜 성경은 하나님들이 의논한 것 같은 표현을 사용했음을 굳이 기록하였을까?
왜 세 분 하나님의 의논 모습을 상상하도록 의도적으로 기록하여 오늘의 우리에게 읽히게 했을까?
하나님 당신의 계획과 구원을 지금도 나와, 아니 우리와 기도로 의논하여 이루어감을 계시함이다.
그러니 내 주장, 내 뜻이 아니도록 기도하라는 것, 항상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소원이 나의 소원되고 하늘의 뜻이 여기 나의 뜻이 되기 때문이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5:1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