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않는 것과 못한 것

2025. 9. 17. 12:34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 향리의 거민, 다아낙과 그 향리의 거민, 돌과 그 향리의 거민,
이블르암과 그 향리의 거민, 므깃도와 그 향리의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에브라임이 게셀에 거한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하였더라‘(삿1:27~29)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 유아독존적 존재가 아니다. 서로 의존하여 살아가야 할 사회적 존재이다.

그런데 그 소속이라는 그 관계, 사회관계, 인간관계, 심지어는 가족관계가 좋기만 할까?

분명 좋을 때도 있지만 부담으로 와닿을 때도 있고 더러는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을 때도 있다.

더구나 종국에는 그 관계도 허망함을 잊게 하지 못하고 존재적 외로움까지는 해결하지 못한다.

 

1. 절대 의존적 존재

인간은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다.

그런 존재들이 다른 것들에 마음 두고 하나님을 경원할 때 삶의 질과 영적 감성이 천박해진다.

외투 한 벌과 약간이 금은덩이를 빼돌렸던 아간의 처사는 그런 인간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그런 인생에게 아골 골짜기를 쌓게 하였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면 복음이 아니다.

그 아골 골짜기에서 그런 인간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은 어떤 이가 있다는 것,

그래서 나의 아골 골짜기가 소망의 골짜기로 변하는 구원 사건, 즉 십자가라는 복음 이야기이다.

그러니 아간의 이야기는 ‘아간과 같은 인간이 되지 말자’는 도덕 이야기가 아니다.

십자가가 아니면 인간이라는 존재들은 아간의 돌무더기를 피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는 것,

사망의 돌무더기에서 은혜의 하늘 백성으로 창조되는 복음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


잘 아는 대로 유다 지파를 포함한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가나안 땅을 정복해 들어갔다.

그렇지만 어느 지파도 예외 없이 가나안 사람들을 남겨두었다.

(삿1:28)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남겨두지 말라 한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음에도 이스라엘은 그들을 남겨 두었을까?

종으로 삼아 그들 문명과 이기들을 사용하고 싶었고 가나안 풍요를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떤 곳에서는 ‘쫓아내지 못했다’라고 기록하고도 있다.

그러니 쫓아내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쫓아내지 않은 것인가?

(삿1:19)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 고로 그가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쫓아내지 못함은 불가항력적인 것이나 쫓아내지 않음은 다분히 자의적이다.

여호와가 유다 지파와 함께 했는데 골짜기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어 쫓아내지 못했다.

가나안의 철병거가 여호와보다 강했던가? 철병거는 이스라엘에게 무서운 것이었나?

아니었다. 오히려 매력적이었다. 실제로 훗날 이스라엘은 그 철병거들을 활용하였다.

결국, 이스라엘은 가나안 문명이 산물인 철병거를 탐했기에 그것 만드는 자들을 쫓아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왜 성경은 그런 사실을 굳이 ‘쫓아내지 못했다’고까지 표현하였을까?

이는 세상 힘과 가치가 주는 매력이 그만큼 강력함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인생은 결코 가나안, 즉 현실의 매력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 없다.

 

2. 그 실체를 알라고

그러니 ‘쫓아내지 않았다’가 아닌 ‘쫓아내지 못했다’는 성경 표현은 적절하다. 

이런 표헌들은 이 세상이라는 현실 삶에서 영적 전쟁을 치러 가는 우리 실상을 말해 준다.

세상의 성공들과 문명의 이기물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부하게 여기게 하니 쫓아내기 어렵다.

때로는 성경 말씀이 싫어지게 만들 만큼 그 매력이 너무도 강력하기에 ‘쫓아내지 못했다’는 말이 맞다.

결국 하나님이 진멸하라 한 이 현실의 것들이 좋아서 숨겨두고 사용하려 한다.

게다가 그런 것을 더 만들어서 여기 이 땅의 천국을 만들고자 적극적으로 나서기까지 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의지해야 할 민족이었다.

그런 그들이 그리 살지 않고 하나님보다 세상 다른 것을 더 의지할 때 하나님의 진노는 불가피하다.

가나안 전쟁을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려 했던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하나님의 목적은 단지 이스라엘의 도움으로 가나안 원주민즐을 축출하는 것에 있지 않았다.

만약에 그런 것이 목적이었다면 전지전능한 당신의 능력만으로 당신 홀로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또한 이스라엘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선물해 주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굳이 가나안 원주민들이 사는 그 땅까지 이스라엘을 데려와 전쟁하게 할 필요도 없었다.

당시에는 인간들이 살지 않았던 비옥한 땅들, 비어있는 좋은 땅들이 다른 곳에도 많이 있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철병거와 문명으로 무장되어 매력적으로 보이는 가나안 땅으로 끌어들였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은   매번 우리에게 진행되는 일들을 이렇게 어렵게만 풀어가게 할까?

그런 것들의 허구와 허망을 가르쳐 당신의 절대성과 그 의존적 필요를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저주받은 함의 땅을 상징하는 애굽과 그의 후예들이 세운 매력적인 땅 가나안을 경험하게 하는 것,

그 경험으로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지리멸렬하게 되는지를 경험하라는 것이다.

하늘 은혜를 입은 셈의 후예들은 왜 저주받은 그 세상 원리로 살면 안 되는지를 알라는 것,

이를 교훈하고자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굳이 가나안 정복이라는 과정을 허용하였다.

사실, 세상의 매력은 치명적이다. 그 유혹이 너무도 강력하기에 내 힘으로는 이겨낼 수가 없다.

셈의 후예들이라고 다르겠는가? 저주받은 함이나 그 후손 가나안 족속들이나 다 같은 인간들이다.

이 엄연한 사실은 다른 곳도 아닌 하나님의 성전, 바로 그 가나안 땅 정복 전쟁과정에서 드러났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십자가로 다가오는 현실 삶이고 그것이 가나안 정복 전쟁이다.

 

3. 다만 은혜를 알기에

그러니 우리는 세상 인간들과 다른 특별한 존재가 아니요 숭고한 삶을 목적으로 사는 이들도 아니다.

세상 인간이나 기독교인인 우리나 다 인간들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이 불가능한 존재들이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이들의 삶이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는가를 결과적으로 보일 인생일 뿐이다.

기독교인들은 삶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고 그분의 영광이라는 가치로 사는 존재들이기에

결코 내 성공이나 내 선한 행실을 보이는 존재가 아니요 나를 증명하는 존재도 아닌 것이다.

가나안 전쟁이라는 일상 삶에서 하나님 아닌 것에 대한 의존을 지워가는 이들이 기독교인들이다.

그리하여 내 마음에서 하나님 아닌 것들을 몰아내는 십자가의 능력을 경험해 나가는 것이다.

나를 그렇게 만들고자 하는 하나님의 열심이 마침내 온전한 당신 백성으로 완성시킬 것임을 믿는다.

이런 이야기가 여호수아서에서 나왔던 갈렙과 악사, 그리고 옷니엘의 이야기처럼 반복되곤 한다.

마치 여호수아 15장 내용을 후에 사사기에서 반복해 놓은 것 같은 일들이 우리에게서 반복 된다.

 

(삿1:11~13) ‘거기서 나아가서 드빌의 거민들을 쳤으니 드빌의 본 이름은 기럇 세벨이라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취하는 자에게는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 갈렙의 아우요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그것을 취한 고로
갈렙이 그 딸 악사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왜 이 이야기가 시간 순서를 무시하면서까지 여기에 갑자기 기록되어 있을까?

이 사건이 언제 적 일이었던가? 여호수아가 죽기 이전의 일이었다.

하나님은 모세가 죽자 그의 후계자로 여호수아를 앞세워 가나안으로 진격시켰었다.

(삿1:14~15) ‘악사가 출가할 때에 그에게 청하여 자기 아비에게 밭을 구하자 하고
나귀에서 내리매 갈렙이 묻되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가로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으로 보내시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 샘과 아랫 샘을 그에게 주었더라’

 

그 당시에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했던가?

(수1:4~5)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이 말씀은 마치 창세기 때 아담에게 했던 명령과 매우 흡사하다.

‘내 말을 잘 듣고 내가 지시하는 땅에서 네게 준 것들을 다스리고 정복하라.’

그렇게 주려는 땅으로 가서 그 땅을 밟으라는 것은 곧 아담에게 주었던 말씀이었으니

곧 ‘선악과를 손대지 말고 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말씀과 같은 명령이었다.

하지만 아담은 다스리고 정복해야 할 땅, 관리 대상에 불과했던 그 선악과에게 정복당했다.

 

결론

정복하고 다스려야 했던 땅, 그 관리 대상에게 어쩌다가 인간이 정복당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이 보암직했고 먹음직도 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런 것이 대적자라는 사탄의 힘이다. 사탄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 반대편에 서는 것이다.

믿음의 대적자들인 사탄의 무기는 혐오스럽게 생긴 흉물이나 무섭게 생긴 괴물의 모습이 아니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모습, 닮고 싶고 따라 하고 싶은 멋스러움으로 다가온다.

아간이 그 공격에 당했고 이스라엘 또한 가나안의 철병거와 문명 앞에 그렇게 당했다.

지금도 내 삶의 한가운데서 하늘 백성답게 하지 않은 것인지 못한 것인지를 고민하게 한다.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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