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과 교만

2025. 8. 31. 13:01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인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왔도다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되었었도다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겔28:12~15)

 

누구나 성경에서 예수의 겸손과 마귀의 교만을 보게 된다. 마치 등식같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겸손한 자가 되고 믿지 않으면 교만한 자가 된다고들 말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예수는 누구이고 또 마귀는 누구인가? 내 좋은 것은 모두 예수 덕분이고 내 나쁜 것은 모두 마귀 때문일까? 대부분의 인생들, 특히 신앙의 사람들 조차도 그렇게 예수와 마귀를 타자화 함에 익숙해 있다. 그렇게 타자화한 하나님과 마귀를 서로 대등한 존재로 생각하는 오류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창조자 하나님은 마귀의 창조자리기도 하다. 그래서 당신의 필요에 따라 그 마귀를 사용하기도 한다.  

 

1. 위대한 창조자

이런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놀랍다. 우주를 보고 세상을 보노라면 이 놀라움을 부인할 수가 없고 감출 수도 없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시19:1) 우주는 광대해서 인간의 머리로 그 크기를 짐작하기 어렵다. 우리 은하계 하나만 해도 엄청난데 그런 은하계가 수천억 개로 온 우주에 늘렸다. 우리 은하계 끝에 도달하는 것만도 빛의 속도로 달려 수 십 억년을 가야 할 거리이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마이크로 세계에도 하나님의 창조 솜씨의 정교함에 놀랄 뿐이다. 현미경으로 미세한 물질 속이라는 원자나 전자 세계로 들어가 보면 거의 한 우주가 통째로 들어있다고 할 만큼 끝이 없으면서도 엉성함이 없다.

 

그러니 이런 모든 세계를 창조한 하나님은 얼마나 위대한 분인가! 그런데 이런 우주의 위대함보다 더 크고 놀라운 위대함이 예수에게서 볼 수 있다. 창조주인 하나님이 당신을 비워 유한자, 피조물 형체로 탁한 우리와 동일시한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사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요1:14) 창조자가 피조물 되는 그 사건은 우주의 위대함이나 세상의 그 어떤 영광보다 더 크다. 하늘 왕이 인간으로 세상에 왔는데 그것은 마지못해 억지로 자기를 낮춤이 아니었다. 이 하찮은 세상에 사는 인생들이 불쌍하여 거만하게 돌봐주는 임금의 행차도 아니었다. 모든 면에서 우리 인간과 똑같은 모양으로 온 것 그 자체가 겸손이었다.

 

대체로 교회당 출입자들은 예수가 행한 놀라운 기적들을 보고야 ‘영광’이라 생각한다. 물론 거기에도 영광이 나타난다. 하지만 그 보다 더 큰 영광은 예수의 성육신 자체이다. 그것은 예수가 일으킨 물 위를 걷기, 병자 치유, 오병이어 기적보다 더 큰 영광이었다. 그런 예수가 세상에서 자기 몫의 삶을 살 때는 진실했고 감정에 충만하였다. 아니 그 이전에 출생 처지에서부터 자신을 낮추어 약한 아기로 이 세상에 왔다. 그러니 겸손은 그 예수의 첫 번째 발걸음이었다. 이는 곧 우리의 첫 발걸음이야 한다. 예수가 세상에 오기 오래전에 그처럼 하늘에서 떨어져 세상에 온 존재가 있었다. 소위 ‘루시퍼’라 불리는 사탄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예수와는 완전히 반대적 존재였다.

 

2. 스스로 높아지려는 자

성경에서 묘사하는 사탄은 천국에서 뛰어났다. 지혜에 있어서나 외모에 있어서 완전한 존재였다. 그는 원래 천사장, 즉 모든 천사들 중의 우두머리였다고 성경은 증거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지혜, 그 완벽한 때문에 교만해져 자기 위치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를 높였고 또 높이려 했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그렇게 스스로 높아지려 했고 스스로 교만했던 존재가 루시퍼, 즉 사탄이었다. “너는 완전한 도장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되었었도다.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겔28:12~13)

 

그러나 그런 천사도 결국 피조물이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천국에서 내쳐졌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 (사14:12~15) 교만의 죄는 이 우주에서 모든 죄의 뿌리요 기원이었다. 이 세상에서 죄의 근원은 아담이었지만 이 우주에서 죄의 근원은 사탄이었다. 아담이 교만해져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던 것도 이런 사탄의 유혹 때문이었다. 문제는 세상 모든 아담들도 이런 교만의 뿌리를 안고 출생한다는 사실이다.

 

이 교만의 독으로부터 치유하기 위해 예수가 인간으로 자신을 낮추어 왔다. 죄가 사탄의 교만으로부터 기원했으니 그 죄에서 벗어남은 예수의 겸손에서 기원된다. 그러니 예수를 본받는다, 예수처럼 산다 함은 그 예수처럼 겸손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겸손은 영적 구원의 증표요 교만은 여전히 사단의 지배를 받는 인생의 증표이다. 그래서 모든 영적 성숙의 척도는 그의 말이나 성과가 아니라 겸손이어야 한다. 예수가 하늘 영광을 떠나 세상에 온 것도 교만한 마귀에게는 겸손의 시위였다. 그 예수는 세상에 올 때뿐만 아니라 세상을 사는 동안에도 내내 겸손하였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히2:17) 예수는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다른 이들과 똑같은 존재로 지냈다.

 

3.  모든 것 위에 높이심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인생, 특별할 것이 없는 존재로 지낸 예수, 하나님은 그런 예수를 모든 것 위에 높였다. 바로 이것이 예수의 겸손이다. 세상에서의 영광과 위대함은 그 사람의 지위, 재산, 업적, 가정 배경으로 평가된다. 이런 평가와 영광이 그리스도로 온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과는 얼마나 다른가? 어떤 가정에서 태어날 것인지에 대하여 그 예수가 조금은 생각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그런 결정권이 없지만 예수는 어느 가정을 빌려서 태어날지 결정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세상의 상식과 달리 그는 자신의 출생지를 변방의 나사렛으로 선택하였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 (요1:46) 이런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나사렛 동네는 별 볼일 없는 산간 오지 마을이었다. 그것도 랍비나 군인이나 관리의 집안이 아닌 노동자 목수 가정에 태어났다.

 

하나님이 예수라는 인간의 그리스도로 올 때 그 출생 배경부터가 이렇게 겸손했다.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는 가난했다. 그래서 예수 출생 8일 만에 번제를 드릴 때 예물로 양을 드릴 경제력이 못 되어 가난한 자들이 드리는 비둘기를 드렸다.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눅2:22~24) 그뿐이었던가? 예수는 당신이 태어날 장소도 어떤 곳으로 결정했던가? 짐승들이 머물고 또 그 짐승들이 먹는 마구간 여물통에 당신의 요람을 만들었다. 그러니 세상 어떤 처지의 인간인들 최소한 이런 예수보다는 좋은 곳에서 태어난 인생들이다.

 

게다가 예수의 혈통과 족보를 살펴보면 신앙인이라 할지라도 선뜻 동의하기가 부끄럽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마1:3~6) 예수의 조상 중에 네 여인이 나오는데 이 여인들이 어떤 여인들이었던가? 다말은 자기 시부 유다와 관계해서 자녀를 낳은 여인이었고 라합은 여리고의 몸 파는 여인이었으며 룻은 모압인으로서 이스라엘 밖 이방인이었고 밧세바는 다윗과 간음한 여인이었다. 왜 예수는 하필 이런 수치스런 족보를 가진 가정을 선택하여 왔을까?

 

결론

예수는 저 멀리 떨어진 천국에서 어느 날 갑자기 뚝 떨어져 온 분이 아니다. 죄의 본성을 유전자로 지닌 채 온 ‘사람의 후손’이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다. 이 탁한 죄인들 세계 한가운데 여느 사람의 후손으로 태어나고 자랐다. 아담으로 왔지만 두 번째 아담으로서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여 죄를 이겼다. 자신을 낮춘 겸손의 신비와 능력, 그렇게 어떤 면에서도 교만과 자랑을 취하지 않았다. 혹 ‘내가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더라면’ 하는 소원도 결국 인간적인 생각이다. 가난하고 가정 배경이 열악해도 예수처럼 하나님 나라를 섬길 수 있다. 예수는 이렇게 자신을 낮춤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높인 것을 보여 주었다. 그 예수처럼 하나님이 우리 인생도 그렇게 이끌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낸다.

'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시기에 심히 좋은 삶  (0) 2025.09.07
그 한 사람 때문에  (1) 2025.09.06
믿음과 순종  (5) 2025.08.21
하나님의 전쟁  (5) 2025.08.10
기름 부음 받은 자들에게  (6) 2025.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