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9. 25. 12:54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영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마칠 것임이니라 네 백성이 다 의롭게 되어 영영히 땅을 차지하리니 그들은 나의 심은 가지요 나의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인즉‘ (사60:20~21)
존재라는 화두는 필연 과학이라는 사안과 충돌한다. 창조와 과학은 대립할 수밖에 없는가?
하나님을 모르는, 아니 인정치 않는 이들은 창조자와 그의 창조를 거부한다.
그렇다면 그런 이들에게도 구원관은 있을까? 있다. 인간이다. 인간의 개량과 발전이 구원이다.
그러니 그런 인간들의 세상은 창조론이 아닌 진화론이 더 어울리기에 지지하고 매달린다.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케 하는 마귀가 역사를 통해 내놓은 성과들과 영향력들은 막강하였다.
창조를 의심케 하고 부정시키더니 오늘날에는 무신론이 새삼스럽지도 않다.
창조와 창조자를 믿지 않기에 신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1. 순전한 바보들
세련된 인간들, 합리적인 인간들은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야 하고 자기가 중심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런 자기보다 센 존재, 그런 자기를 벌하는 존재가 있음이 꺼림직 하고 싫어 믿고 싶지 않다.
그러니 자기들 마음의 안정과 평안을 위해서 어느 철인처럼 신은 없다고 고집한다.
아니 더 나아가서 한때 있었던 신이었으나 이제 그 신은 죽었다고까지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런 오늘의 세상에서도 창조를 믿는 바보 같은 이들, 순진무구한 이들이 있다.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 계시어 세상을 이끌고 나를 지켜본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늘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눈치를 보며 하루하루를 경건하게 산다.
천지 만물이 이렇듯 조화롭고 규칙적이며 질서 있게 움직임이 그분에 대한 증거라 믿는다.
어떻게 낮과 밤의 길이가 이렇게 일정한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어김없이 운행 되는지,
어떻게 수천 억 개의 별들이 제 자리를 지키는지, 그리고 또 정확한 궤도로 돌고 있는지,
그것들을 창조한 전지전능자 하나님이 지금도 그 만물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라 믿는다.
물질 이전의 전능자, 시간의 이전의 창조자를 믿고
창조된 물질과 허용한 시간을 그분이 당신의 뜻에 따라 이용하고 있음을 믿는다.
만물은 하나님이 잠시 사용하는 것들이지 그 자체로 가치 있다고 보지 않는다.
성경에 물질은 필요에 따라 잠시 존재하는 것일 뿐 영원한 것이 아니 말하기 때문이다.
창조자를 믿는 우리는 보이는 물질세계 너머의 보이지 않는 영원을 염두에 두고 산다.
그럼에도 창조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물질로 만물을 정의한다. 역사까지도 유물적 결과물로 본다.
보이는 것이 전부이고 물질이 우주의 전부이며 그 상호적 결과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 본다.
유물론자들은 물질이 영원 전부터 존재해 왔고 또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창조자를 부정하기에 물질과 인간, 물질과 신을 동일시하는 ‘범신론’을 말하기도 한다.
신이 만물 안에 존재하고 그 만물 하나 하나의 사물이 곧 신이라 믿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만물은 만물이지 어찌 하나님과 만물이 동일한 것일 수 있을까?
그럼에도 인간도 신이 될 수 있다고 믿기에 나름대로는 열심히 수행하고 고행하며 정진하기도 한다.
이와 비슷한 논리로, 창조를 부인하는 인간들 중에는 ‘자연주의’를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런 자연주의들은 초월자를 인정치 않는다. 그러니 당연히 초월적 영역도 믿지 않는다.
만물은 그저 자연법칙으로만 움직인다는 것, 해 달 별도, 꽃도 열매도 그렇게 뭄직일 뿐이라 한다.
단지 자연 법칙에 의해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있을 뿐이지 거기에 기획자의 손길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창조를 믿지 않기에 그 귀결은 자연스럽게 인간중심주의로 갈 수밖에 없다.
우주의 중심과 세상 현실 역사의 목적은 바로 ‘인간’이라는 것, 그리고 인간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혹 신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런 인간들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내천, 많이 들어왔기에 익숙한 이 말도 곧 ‘인간이 곧 하늘이라’는 주장인 것이다.
또한 창조를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는 ‘다신론’을 주장하는 인간들도 있다.
세상에는 많은 신들이 있다는 것, 태양도 신, 달도 신, 별도 신, 산도 신이라는 말이다.
2. 새 창조라는 계휙
정말 인간들의 사고력과 상상력은 대단하다. 그렇게 믿고 살면 정말 그렇게 믿겨진다.
통일교의 참어머니라는 이가 특검 조사실에서 자신을 독생녀라 강론하여 가르쳤다 하는 세상이다.
그렇게 믿고 살면 상황파악 안 되고 객관성을 상실함에도 망상 환자가 되어감을 모르는 것이다.
다행히도 하난미의 계시인 성경은 그 첫 시작인 창세기 1:1에서 기독교의 핵심을 선포하였다.
기독교와 이방 종교의 차이, 진리와 세상 풍속의 차이, 생명과 철학의 차이를 케논해 놓은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첫 창조에서 하나님이 새 창조로 계획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것이 첫 창조에서 이미 암시되어 있으니 그것을 알면 기독교 신앙의 지향점을 알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 목적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너의 백성이 모두 시민권을 얻고 땅을 영원히 차지할 것이다.
그들은 주께서 심으신 나무라. 주의 영광을 나타내라고 만든 주의 작품이다.‘(사60:21)
오직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인간을 비롯한 천지를 창조했다고 여기 말하고 있다.
오늘의 현대 철학은 ‘존재’라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오묘하게 설명한다.
‘그 고유의 성질을 가지고 있으면서 쉬지 않고 흐르는 것’이라고 정의한 것이다.
10분전의 꽃과 10분 후의 꽃이 완전히 다른 것처럼,
만물을 이루고 있는 분자나 원자들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기에
존재는 그 고유 성질에서는 고정되어 있지만 형태는 계속 흐르고 있다는 말이다.
존재에 대한 현대 철학의 이 고상한 정의는 하나님의 창조에서 힌트를 얻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성품이나 신분이나 본질에서는 고정적이지만
그 존재가 담고 있는 내용 발산으로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영광은 만물을 통해서 나타나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존재방식인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고유 영광을 발산하는데 그것이 피조물에 그대로 담긴 현시화가 창조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권능과 성품 나타내기를 기뻐하기에 만물을 관찰하면 그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허공은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성품을 반사해서 현시할 수가 없다.
그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현시화 하기 위해서는 물질이 필요하다.
그 영광을 담지 하여 존재케 된 것이 피조물이니 그것이 창조의 목적이었다.
그런 하나님의 창조물 안에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성품이 그대로 담겨 있다.
그러니 피조물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냄을 목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우리의 주님이신 하나님!
주님은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기에 마땅하신 분이십니다.
주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만물은 주님의 뜻을 따라 생겨났고 또 창조되었습니다"(계4:11)
그러니 강제가 아닌 자발적으로, 즉 하나님의 영광을 효과적으로 반사하도록 피조물들 속에 거한다.
당신의 나라 완성을 위해 첫 창조에서 시간과 만물을 창조하여 어떻게 완성될 것인가를 암시하였다.
그리고는 여기 세상이라는 가시적 현실 역사에서 그덕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3. 사랑 충만한 거기
그렇게 존재하는 것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 곳은 어떤 곳일까?
하나님의 성품으로 살고 하나님의 지혜로 사는 그 곳은 얼마나 행복한 곳일까?
모든 존재가 거룩하고 흠 없이 사랑 충만한 하나님처럼 살게 되는 그런 곳이 있을까?
그런 곳, 그런 삶이 있으니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며 산다는 것,
그것은 로봇처럼 하나님을 자랑하고 목소리 높여 노래하는 기계적인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산다는 말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삶인가?
하나님의 성품, 그 인격과 지혜를 그대로 받아서 그 영광을 반사하여 산다는 말이다.
그것이 새 창조가 완성된 하나님 나라이다. 이미 그 상태를 보인 이가 있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은 엄청난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들 이름을 일일이 지었던 아담이었다.
고대 사회에 이름이 갖고 있는 의미는 그 존재의 내용이었으니
이름을 짓는다 함은 그 존재의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였다는 뜻이다.
그만큼 첫 창조 아담은 지혜로웠고 무흠한 상태로 지음 받았었다.
그 아담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을 살 우리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바울도 로마서에서 그 아담을 '오실 자의 표상이라' 하였다.
여기 오실 자는 그리스도이고 그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이미 들어가 있었다.
그러니 하나님의 영광 드러냄을 목적으로 사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당연히 지금까지 나만을 위해 살았던 삶에서 돌이켜 나를 부인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우리를 천국 백성이라 부른다.
두려움이나 강압에 의해서가 아닌 내 인격과 이성에서 자발적으로 영광을 드러내는 삶,
그런 나를 만들어 내기 위해 하나님은 역사와 인생 속에서 나를 설복시키고 있다.
오염과 실패를 통해 내 한계를 알게 하고 십자가로 당신의 사랑과 인내를 알게 하여
부름 받은 나로 하여금 자발적 순종과 당신 의존적 인생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왜 이렇게까지 할까? 그래야 내가 다시는 자의로 타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내 이성으로 탁한 삶의 더러움과 악한 죄의 고통을 충분히 겪었기에
하나님을 의존하여 그 분께 나를 맡겨 그분의 성품으로 살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이미 경험했기에 이제는 자의로 타락하지 않는다.
만물을 창조하여 타락으로, 그 타락에서 십자가로, 십자가에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그렇게 이끌어 가며 당신의 은혜를 보여주는 이유도 나를 설복시켜 가기 위함이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4~6)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세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네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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