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5. 4. 13:43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막10:13~16)
가정의 달 5월이 찾아왔다. 가정의 꽃인 우리의 자녀에 대한 생각을 새삼 하게 되는 시즌이다. 자녀란 무엇인가? 또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자녀란 한마디로 보석상자이다. 보석함 자체는 보잘것없다. 낡고 못생긴 상자일 수 있고 평범한 항아리일 수 있으며 땅속 흙에 묻힌 상자일 수도 있다. 다만 그 속에는 온갖 보석이 담겨 있으니 그 안이 보석이 중요한 것이다.
1. 보석 같은 존재로
애굽으로 팔려가는 한 소년이 있었다. 형들에게 팔려 억울하게 끌려갔다. 한 동안 노예로, 죄수로 고생했다. 그러나 훗날 애굽을 살리고 동족을 살렸다. 팔려가는 작은 소년 속에 하나님의 보석이 반짝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베들레헴에서 양 치던 소년이 있었다. 나이도 어린 막내였다. 주로 하는 일은 아버지 심부름, 형들 대신 늦게까지 양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소년 속에 훗날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민족을 구할 보석이 숨겨져 있었다. 이 땅의 아이들, 우리 가정의 자녀들 속에도 이 위대한 보석들이 있을 수 있다. 우리 공동체의 아이들을 어떻게 보석처럼 키울 것인가? 어떻게 아이들을 우리 희망이 되고 나라의 희망이 되며 하나님의 꿈으로 키울 것인가?
어느 마을에 예수가 지나간다는 소문을 듣고 아이들이 예수께 달려왔다. 항상 일정이 빠듯하고 그날도 갈 길 바쁜 데 아이들이 몰려오자 제자들이 제지했다. 그때 예수의 반응은 금하지 말라 하였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이들의 것이라 하였다. 온유한 예수가 화까지 내면서 말했다면 거기에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메시지가 무엇이었나? 아이는 무조건 용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용납과 격려이다. 사람은 격려받고 칭찬받기를 원한다. 누구나 잘한다고 하면 잘하고 못한다면 못하게 된다. 이것을 교육학에서 ‘피그말리온 효과’라 한다. 사람은 기대한 대로 성장한다는 것이다. 최고의 교육방법은 신뢰이다.
오늘의 우리 공동체는 아이들이 자기 꿈을 펼치기에 적절한 환경인가? 어느 교육 담당관이 이 나라에도 노벨상 수상자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우리나라에 노벨상 받을만한 천재 세 명만 보내주옵소서.’ 하나님이 응답하여 아인슈타인, 에디슨, 퀴리 부인을 보내주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이들이 노벨상은커녕 평범한 사람으로 변해갔기에 답답한 교육담당관이 아인슈타인을 찾아가 만나보았다. 놀랍게도 그는 대학에도 못 들어가고 피자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수학을 잘하고 수학만 하면 신이 나는데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대학에 들어갈 수 없어 그만두고 아르바이트를 합니다.’ 사정은 특허 벽에 막혔던 에디슨이나 여자라고 거절당해온 퀴리부인도 마찬가지였다.
2. 스킨십의 기적으로
왜 아이들은 예수께 나왔을까? 만져주기를 바라서였다. 예수가 부드러운 손과 사랑으로 아이를 안아 주실 때 아이들은 사랑받는 기쁨을 느낀다. 아마도 그것만으로도 ‘나는 저 유명한 랍비께서 사랑하는 사람이야’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녀를 용납하는 방법 중에 안아주는 방법이 있다. 소위 접촉의 기적인 것이다. 12년을 혈루증으로 고생했던 여인도 예수의 옷자락에만 접촉만 하고도 나음을 얻었다. 아이들을 용납하되 그들을 안아주며 ‘할 수 있는 아이’로 키워야 한다.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해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그렇다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인간의 어떠한 말들을 넘어선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그 축복받기를 소원하였다.
그들은 부모가 자녀를 위해 축복하면 그대로 된다고 믿고 살았다.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 동생이 장자의 축복을 받고 형은 저주를 받았다. 왜 그렇게 되었나? 야곱은 장자의 축복받기 위해 눈이 나쁜 아버지를 속였다. 야곱의 그런 태도는 축복은커녕 저주를 퍼부어도 할 말이 없는 태도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잘못된 야곱의 태도를 성경 어디에서도 지적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야곱은 그 후에 더 많은 복을 받고 에서는 세속 인간으로 성경에서 지워졌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축복받은 야곱이 옳았다는 것인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대한 열망의 문제이다. 야곱은 잘못했지만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가볍게 여겼다. 팥죽 한 그릇만큼이나 가볍게 여겼다.
우리 공동체는 아이들을 하나님에 대한 열망을 가진 자로 키워야 한다.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이 애굽에서 마지막으로 한 일이 있었다. 두 아들을 위해 아버지의 축복을 받는 것, 야곱의 임종 직전에 두 아들을 데리고 왔다. 그리고 축복기도를 요청했다. 당시 최강국 총리가 무엇이 더 필요해서 축복을 원했겠는가? 총리 요셉이 그 아들들에게 무엇을 못줘서 할아버지의 축복을 받게 했겠는가? 야곱과 요셉이 사모했던 것은 세상에서의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이었다. 하나님이 우리의 최고 복이다. 가장 큰 복인 하나님을 경험하고 믿게 해야 한다. 우리의 아이들을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아이로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받는 아이, 사랑받고 사랑할 줄 아는 아이로 키우는 것이다.
3. 나를 넘어서
가정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최선의 방법은 어른들의 기도와 가정예배이다. 그러한 예를 예수의 태도에서도 읽을 수 있다. 아이들을 용납하고 안아주며 축복해 준 예수가 아이들에게 한 말씀은 무엇이었을까? 성경에는 그 대답이 없지만 예수가 마음으로 하고 싶었던 말씀이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착하게 자라라’ ‘공부 잘해라’ ‘이기는 자가 돼라’ 이런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다른 사람에게 기쁨이 되는 사람이 되어라’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 당신이 이 땅에 온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실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소명으로 살았다. 많은 사람들의 기쁨과 생명이 되기 위해 이 땅에 왔다. 그의 일생 자체가 남을 위한 삶이다.
장애인으로서 미국 백악관 정책 비서관을 지내고 차관보까지 오른 한국인이 있었다. 강영우 박사였다. 그는 자녀들에게 나를 위해 살지 말고 남을 위해 살도록 가르쳤다 한다. 그랬더니 큰 아들은 아버지 같은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겠다고 의대에 가고동생은 아버지 같이 약한 사람을 돕겠다고 법대에 갔다고 한다. 나중에 아이들 소원대로 큰 아들은 의사가 되고 작은 아들은 변호사가 되었다. 두 아이가 고등학교 때 들어간 그 미국 학교의 교훈이 ‘Not for self’였다고 한다.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남을 위해 사는 것이다. 이 학교의 연간 수업일은 150일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도 미국에서 가장 많은 대통령, 국무장관, 공직자, 경영인 등을 배출하였다.
‘Not for self’, ‘나 자신을 위해서 살지 말라’ 이 믿음이 인물을 만들어 낸다. 공부가 인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자존감과 가치관이 인물을 만들어 낸다. 정말 위대한 사람, 세상에 필요한 사람은 공부가 아니리 신앙 가치관으로 만들어진다. 세상의 가치관은 ‘Only for myself’이나 예수의 가치관은 ‘Only for others’이다. 그러니 어느 신학교 현관에 쓰인 문장이 가정의 달인 이 5월에 다시 한번 암송된다. <자기를 위해선 땀을 흘려라. 이웃을 위해선 눈물을 흘려라. 그리고 진리를 위해선 피를 흘려라> 무엇으로 우리 아이들을 키울 것인가? 예수께로 가면 인물이 되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 예수, 그분이 만져주면, 그분이 축복하면, 그분이 가르치면 위대하게 쓰이는 인물이 될 것이다.
결론
서울대 내란과, 육군사관학교 반란과, 우리 공동체의 고위 엘리트들을 향한 자조적인 표현들이 만연한 오늘날, 이런저런 자조와 비난으로 혼란스럽고 극악함까지 느껴지는 현실 세상에 이런 인물이 필요하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자원이 묻혀 있는 곳은 어디일까? 남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 광산일까? 사우디아라비아의 거대한 유전일까? 어느 현자는 무덤이라 했다. 왜? 자기 가능성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죽은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보석인지 모르고 하루하루 살다가 묻힌 사람들이 누워있는 곳이 무덤이다. 내 삶을 그렇게 끝낼 것인가? 우리 아이들도 그렇게 한 세상 살다 가게 할 것인가?
‘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들을 보고 가로되 “이들은 누구냐?” 요셉이 그 아비에게 고하되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 아비가 가로되 “그들을 이끌어 내 앞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리라”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인하여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두 아들을 이끌어 아비 앞으로 나아가니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입맞추고 그들을 안고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뜻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내게 네 소생까지 보이셨도다” 요셉이 아비 무릎 사이에서 두 아들을 물리고 땅에 엎드려 절하고 우수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좌수를 향하게 하고 좌수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우수를 향하게 하고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이스라엘이 우수를 펴서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좌수를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어긋맞겨 얹었더라‘ (창48: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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