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2. 15. 21:06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 (사8:14~15)
성경 말씀이 어렵다는 이들이 많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런 성경을 고전 인문서 중의 한 책으로 여기기도 한다. 예수 당시도 그랬다. 사람들이 예수의 말을 생명으로 듣지 않고 그의 주장이나 괴변으로 들었다. 이는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때의 믿는 사람들에게나 오늘의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말씀이 구원에 이르는 생명이 되겠으나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숨은 것, 즉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구원의 비밀을 모른 채, 이런 생명의 말씀을 무시하며 사는 인생들을 가리켜 예수는 가시덤불, 또는 엉겅퀴 삶이라 하였다.
1. 질려와 형극의 삶에서
예수는 그런 삶을 가시덤불과 엉겅퀴라 표현했지만 예수 이전의 유대 현자들은 그런 삶을 질려와 형극의 삶이라고 표현하였다. ‘그 날에는 천 주에 은 일천 개의 가치 되는 포도나무 있던 곳마다 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라. 온 땅에 질려와 형극이 있으므로 살과 활을 가지고 그리로 갈 것이요’ (사7:23~24) 가시떨기와 황량한 돌로 가득한 세상, 이런 곳이 저주받은 인간들이 사는 현실이다. “나 여호와가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렘4:3~4)
하늘 백성의 모형으로 살아야 했던 이스라엘이었다. 그 역할을 하라고 하나님이 아브라함 때부터 그들을 불러냈고 선별해 주었다. 그런데 그 중심지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가시덤불이다. 그런 사람들이 사는 땅에는 그 어떤 씨를 파종해도 열매가 맺힐 수 없음을 이사야는 선포한다. 왜? 그 이스라엘로 하여금 열매 맺지 못하게 하는 돌 때문이었다. 그 돌이 예수라는 그리스도였다. 죄인들이 유일하게 피할 수 있는, 그리고 안식처가 되는 도피성이 되는 예수였는데 그런 예수가 어떤 이들에게는 거치는 돌이요 불편한 진실이 되어 함정과 올무가 되었다. 왜 은혜의 예수가 그들에게 가시떨기와 돌밭이 되었는가? 약속의 땅에 들어와 사는 그들의 자기중심적 생각, 즉 아담주의 때문이다.
가시덤불과 돌들로 인해 열매 맺을 수 없는 마음이 되어버린 종교주의자들, 도덕주의자들, 그들의 그런 생각들로 인해 화염검과 그룹들이 지키는 생명나무로 갈 수 없는 인생들이 되었다. 그 생명나무를 숨긴 이가 누구인가? 다른 이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었다. 휘장으로 생명인 예수, 즉 지성소를 가렸으니 생명으로 온 예수를 그리스도로 보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가시떨기와 돌짝은 이스라엘 입장에서 예수였다. 그가 죄된 세상에 와서 그들 눈과 귀를 막고 생명나무 실과를 먹을 수 없게 만들었다. 왜 그랬을까? 그 나라와 영생은 인간 도덕이나 종교 열심으로는 도달할 수 없음을 깨우치기 위함이었다. 그럼에도 은혜를 입은 우리들에게는 생명의 씨가 뚫고 들어왔다.
2. 은혜의 현실에서
하나님의 진노로 가시덤불과 돌짝이었던 우리 삶이 예수로 인해 은혜로운 옥토로 변하게 하였다. 그러한 은혜의 영적 현실을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이렇게 설명하였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12:23~24) 이 부분을 정확하게 읽어야 한다. 밭이 옥토가 되어서 열매 맺는 것이 아니라 한 알의 씨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 예수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채워졌다. 여기에 우리의 수고나 업적, 자격이나 열심은 1%도 기여가 없다. 오직 하나님 일방의 은혜라는 씨에 의해서만 열매 맺는 하늘 백성들이 될 뿐이다. 바로 이런 이들이 하나님 나라 가족이고 예수의 골육이다.
복음의 이런 현실을 바울은 호세아서와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 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롬9:25~29)
예수는 당신의 육적 어머니, 혈육적 형제들을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앞에서 부정하여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조건과 자격을 분명하게 선언하였다. 혈통, 업적, 열심, 재산, 지위, 훌륭한 인품, 도덕적 성취, 학식이나 깨달음, 그 어떤 것도 하늘 백성 됨에 기여할 수 없다는 말이다. 예수가 좋다고 많이들 모여 있었지만 그중에‘남은 자들’에게만 하늘 비밀이 전해졌다. 나머지는 무엇인가? 길가 밭이고 돌짝밭이며 가시떨기이다. 그나마 그 ‘남은 자들’도 자기 열심이나 자격, 조건에 근거함이 아니었다. 원래 인간들은 죽은 흙에 불과한 처지들이었다. 그러니 하나님에 의해 남겨진 것이다. 하나님이 남겨졌기에 옥토가 되어 ‘하나님 백성,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로 남겨진 것이다.
3. 은혜 수용을 거부하여
그렇다면 하나님의 거룩한 씨로 심기지 않은 자들은 어떻게 되는가? 오히려 예수라는 가시덤불과 돌짝에 의해 멸망의 자리로 갈 일만 남았다. 그들은 하나님처럼 자기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고 세상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인생들이다. 그런 삶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 에녹성과 바벨탑 건설 세상 건축자들이었다. 그렇게 자기 계산, 자기 지식과 경험으로 사는 이들은 모퉁이 돌인 예수를 버린다. 예수가 은혜 입은 우리 인생에 들어와야 화염검과 그룹, 즉 가시떨기와 돌짝이 제거된다. 그래야 휘장이 제거되고 얼굴을 가려왔던 수건이 벗겨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죽은 흙들은 은혜를 수용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 은혜에 걸려 넘어진다. 불편할 뿐이다. 왜? 자신을 하나님처럼 우주의 중심, 인생의 주인이라 여기는 자기 자존 때문이다.
'하나님처럼 다 알고 하나님 못지않게 다 할 수 있는 내가 무엇이 부족해서 은혜를 의지해야 하는가?' 이런 인생들에 대하여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9:30~33) 은혜를 의지하지 않는 자들은 그 예수에 의해 오히려 부딪힘을 당하고 부끄러움을 당하며 거침이 될 것이라는 말이니 심판이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것이 심판이다.
은혜로 해결해 주겠다고 온 메시아를 죽인 세상,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그런 세상이 그때 예수에 의해 죄인으로 정죄되고 심판에 이른 것처럼, 예수를 의지하지 않는 인생들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저주로 결국 말라죽는다.. 인생을 하나님께 맡김은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 시각으로 볼 때 미련하고 약해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믿음의 삶임을 바울은 강조하여 이렇게 말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1:18)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1:23~24)
결론
예수를 알지 못한 채 여전히 가시덤불과 돌짝밭과 길가 밭 상태로 사는 이들, 그런 이들이 이 현실 세상에서는 어떻게 살게 되는가?길가 밭은 말씀이 떨어지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말씀을 빼앗아 가는 상태이다. 이런 비밀한 은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이 말씀조차 100배의 결실 맺는 성도, 즉 존경받을만한 성도 되기라는 교훈 이야기로 읽게 되니 이런 것이 말씀 곡해이다. 질려와 형극의 세상 삶에서 성경 말씀을 그 진의대로 읽을 수 있는 능력, 그 비밀의 말씀을 곡해 없이 읽는 맑은 능력, 이런 은혜가 임하여 그 비밀한 은혜의 결실 맺는 하나님의 땅이 되기를 기도해 본다.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마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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