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8. 16. 22:50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그 어미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일천 일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취하였나이다.” 어미가 가로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미가가 은 일천 일백을 그 어미에게 도로 주매 어미가 가로되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고자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돌리리라.” 미가가 그 은을 어미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미가 그 은 이백을 취하여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 5 이 사람 미가의 집에는 신당이 있으므로 또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그의 제사장으로 삼았더라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17:1~6)
구원을 얻은 우리는 현실에서 침노해 들어온 천국을 어떠한 모양으로 살아내는가? 사사기는 그런 삶의 성공 가능성과 실패의 참담함을 소개해 주는 책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약속의 땅에 들어간 이후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물론 약속의 땅은 궁극적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가리킨다. 하지만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육신으로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살게 될, 그리고 은닉된 천국의 상태와 정서를 지칭하기도 한다. 그런 가나안 땅에 들어선 이스라엘의 삶은 이방인들의 삶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우리는 나에게 침노해 덜어온 천국을 어떻게 살아야 하며 그 여정에서 어떠한 전쟁을 어떻게 치러내야 하는지를 사사기에서 읽을 수 있다
1. 저마다 자기 옳은 대로
사사기를 읽다 보면 마치 후렴구처럼 반복되는 어구가 있다.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신학자들은 사사기의 저자를 사무엘이라 추측한다. 하나님을 왕으로 삼아 살아야 하는 이스라엘이었음에도 그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살았던 이스라엘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사무엘 사사에게 와서는 ‘우리에게도 왕을 세워 달라’고 요구하였다. 사무엘이 그 지경까지 이르게 된 이스라엘을 사사기를 통해 그려내고 있다고 본 것이다. 사사기는 인간의 불가능과 무력함을 적나라하게 폴로하고 있다. 아울러, 인간의 그런 약함과 부조리를 덮는 하나님의 은혜도 드러내고 있다. 이는 비단 사사기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성경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인생의 왕이라는 이 주제는 사사기에서도 예외 없이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구약과 신약이라는 성경 전체를 하나로 묶으면 ‘언약’이라는 단일 테마로 표현할 수 있다. 그 언약 내용을 한 문장으로 표현해 놓은 곳이 출애굽기 19장이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출19:5~6) 이 언약이 창세기에서는 어떻게 주어졌던가? 동산의 선악과 사건으로 나타났다. 즉 ‘내 말을 잘 듣고 순종하면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영생하게 된다’는 언약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제시한 몇 가지 항목들을 철저히 지켜내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먼지에 불과한 자신을 깨닫고 인정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완전히 비워진 그릇에 하나님이 담기는 그 상태를 ‘순종’이라 하는데 그때에 비로소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하늘 백성, 즉 약속의 사람이 될 수 있다. 성경은 그 상태를 살아있는 상태라 하고 그렇지 못한 상태를 죽은 상태라 한다. 그러니 ‘존재 한다’ 함은 하나님과 관계된 상태에서만 가능한 말이다. 그런데 피조물인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연합할 능력이나 가능성이 없었다. 그것은 전지전능한 하나님 쪽에서 우리 삶에 개입해야만 가능했다. 그래서 전능자가 인간의 가능성을 부수고 당신 앞에 엎드리게 만드는 것을 구원이라 한다.
2. 본래 벌거벗은 존재
인간 불순종의 시작은 하나님의 동산에서부터였다. 유감스럽게도 거기서 첫 인간은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다. 그 결과는 필연적인 죽음이었다. 그런데 돌연 짐승 가죽이 등장하고 그것으로 인간의 죽음이 덮이는 이후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피조물 인간은 본래 벌거벗은 존재였다. 그렇게 무력한 존재로 살게끔 지어졌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창조자 앞에 겸손해질 때 하나님은 의의 옷을 입히고 당신의 백성으로 삼는다. 그런 피조물이 언제부터인가 전능자 앞에서 자기 벗음이 부끄러워서 피하게 되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3:10)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존을 내세우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성경은 그것을 죄라 한다. 곧 피조물이 창조자 앞에 ‘나도 자존심이 있다’고 말함이다.
그때 아담은 이미 하나님 앞에서 죽었다. 그런 인간의 실패를 하나님이 당신의 은혜로 덮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3:21) 이 이야기가 성경 전체의 구성이고 핵심 내용이다. 하나님은 처음 인간들을 통해 당신의 언약 성취라는 은혜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자손을 통해서도 거듭 덮음의 은혜를 설명해 주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창3:23) 타락하여 저주받은 인간에게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한 조치는 일면 하나님의 심판이었으나 동시에 창조자의 배려이기도 하였다. ‘너희가 어떤 존재인지 한 시도 잊지 말라’는 것, 그래야 순종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흙에서 만들어진 티끌들에게 흙을 갈게 한 것이다. 흙인 우리 자신들의 근본을 잊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자기 잘난 맛에 살아온 인간들은 여전히 그 근본 됨을 잊고 산다. 하기야 그러니 인간이다. 그 결과, 자기 제사를 주장하는 형이 동생을 죽이는 시기와 경쟁, 우열의 세계로 인류역사가 흘러감은 불가피했다. 죽임을 당한 동생 ‘아벨’이라는 이름의 뜻이 ‘없음, 허무’였다. 근본 된 땅을 갈며 자기 한계를 제대로 인식하는 이들의 자기 인식이 ‘아벨’이었던 것이다. 그 가치관으로 사는 이가 자기 제사를 주장하는 ‘있음’의 대명사 가인에게 맞아 죽었다. 여기서부터 세상에 존재하게 되는 두 종류의 인간이 분리되었다. 한 종류는 자기 자존을 지키기 위해 이웃을 살해하는 부류들이고 다른 한 종류는 그런 이들에게 죽지만 하늘의 은혜로 부활로 일어나는 사람들이다. 전자는 그렇게 큰소리치며 살다가 영원한 사망으로 들어가고
후자는 졌으나, 아니 죽었으나 다시 살아나 영원한 생명을 사는 존재가 된다.
3. 덮으심의 은혜로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인생들 삶에 개입하여 거칠고 악한 세상을 이용하신다. 거칠고 극악한 세상 세력을 이용하여 우리의 무력함, 불가능을 경험시킨다. 우리 삶의 십자가 현장에서 당신의 은혜로 덮어 살려내신다. 그 일을 인간 역사 속에서, 그리고 우리 인생에서 이루어 가신다. 이미 노아라는 인물과 그 가족들을 통하여 그 덮음의 은혜를 보여준 바가 있다. 노아 당시 세상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서 네피림, 용사, 유명한 자로 인생을 살았다.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창6:4~8)
그 은혜를 입은 노아가 120년 동안 어떻게 살았던가?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어 살았다. 현실적으로 노아의 개인적 삶은 죽음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노아만 살리고 네피림, 거인, 용사, 등 모든 유명한 자들을 죽였다. 세속 힘을 소유하고 그것에 기대어 사는 인생은 자기 약함을 드러내는 하늘 은혜를 거부해 왔다.. 이후 바벨탑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의 가능성과 성과를 다시 한번 무너뜨렸다. 그리고 우르라는 당시의 선진 문명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을 택하였다. 그리고 그를 통해 하늘 구원이 어떻게 은혜로만 주어지는지를 그의 인생으로 설명해 주었다. 그 구원의 시작이 하나님이요 끝도 하나님이었음을 아브라함의 전체 생애를 통해 보여준 것이다. 구원은 우상물이나 만들어 팔던 인간에게 하나님이 먼저 찾아감으로써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후 모리아 산의 결단을 실행할만한 믿음의 사람으로 그 아브라함을 이끌어가셨다. 솔직히 그 과정에서 아브라함이 얼마나 실수하고 실패했던가? 그런데 그 아브라함이 비로 우리들이었다. 이후에도 하나님은 그 후손들에게 구원과 영생이란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고자 애굽으로 들여보냈고 거기서 그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그 문명 세계에서 세상을 상징하는 애굽에게 당신 백성들이 핍박받는 모습을 연출해 낸 것이다. 그러나 거기로부터의 탈출에서 세상의 장자들이 죽고 그들 힘의 상징이었던 군사들이 수장되었다. 반면에 그들에게 억눌리던 하늘 사람들은 하나님의 덮는 은혜로 살아 나왔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혹 있었다면 불평과 원망이었다. 오직 하나님의 덮는 은혜가 그 정도로까지 패역했던 그들을 살려낸 것이다.
결론
그렇게 문명의 세계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은 이후 광야에서 40년을 살아야 했다. 왜 그들을 바로 가나안 땅으로 들이지 않고 그 거친 환경에서 그것도 40년을 살게 했을까? 그들이 자기들 판단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나안의 아낙인에게 이스라엘은 겁을 먹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였다. 자신들을 출애굽 시키고 거기까지 이끈 하나님을 믿지 못했던 이스라엘, 그들은 하나님 판단보다 자신들 판단을 더 의지하는 아담적 죄성을 드러낸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아담들을 광야로 내몰아 자신들의 무력한 존재임을 체험케 한다.
우리에게 광야 인생을 허락함도 내 자력으로 당신의 말씀을 지켜낼 수가 없음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스데반은 그 순교의 와중에 그 광야의 이스라엘을 ‘광야 교회’라 불렀다. 그리고는. 가나안 정복 전쟁의 여호수아서를 지나 사사기로 이어진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온 이들이 이후 어떻게 살았던가? 그들의 삶에서 복음을 실재화하여 살아냈던가? 여전한 인간성을 드러내며 살았던가? 하나님은 같은 질문을 오늘의 가나안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던지신다. 어떻게들 살고 있는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치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행하여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그 때에 저희가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하나님이 돌이키사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 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사십 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행7:3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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