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8. 23. 13:53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특심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그 우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 (단2:31~35)
구약이 하늘 원형을 이 땅의 그림자로 이해할 수 있게 기록한 것이라면 요한계시록은 하늘 모습을 직접 기록하여 이 땅의 일들을 해석할 수 있게 기록한 책이다. 사도행전이 예수가 승천 후 자기 영을 보내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해 간다는 것, 즉 하늘에서의 예수 사역을 이 땅 제자들 삶과 사역을 통해 보여준 계시였다면 요한계시록은 직접 하늘에서 어떤 일이 있는지를 오늘의 우리들에게 설명해 주고자 기록한 계시였다. 이렇게 성경은 예수의 사역을 어떤 관점에서 보는가에 따라 책명만 다를 뿐, 결국 같은 이야기이다.
1. 계시로서의 삶
예수가 그리스도였다는 것에 대한 증거는 성경, 곧 말씀이었다. 계시 내용이 하나님 말씀이었고 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였다. 이를 복음이라 하니 예수와 그의 삶 자체가 그 복음의 내용이었다. 그 삶은 광야에서의 삶이었으니 곧 교회 삶이었고 교회는 곧 우리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우리의 삶을 살다 간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 하나님을 믿고 메시아 예수를 따르는 우리의 삶은 이미 그 자체가 복음이다. 그러나 그런 삶을 사는 우리를 향한 세상의 대우와 시선은 어떠한가? 시편의 시에서 나타난 다윗의 고백은 읽는 이로 하여금 마치 예수의 생애를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아니, 어쩌면 그가 예수의 삶을 앞서 살아낸 시낭인이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어찌 그리 멀리 계셔서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나의 간구를 듣지 아니하십니까? 그러나 나는 사람도 아닌 벌레요 사람들의 조롱거리, 백성의 멸시거리일 뿐입니다. 나를 보는 사람은 누구나 나를 빗대어서 조롱하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면서 비아냥댑니다. ‘그가 주에게 그토록 의지하였다면 주가 그를 구하여 주겠지. 그가 그토록 주의 마음에 들었다면, 주가 그를 건져 주겠지’ 합니다.” (시22편) 진짜 신앙인으로 산다면 현실은 이러하다. 냉담하다. 비아냥적인 분위기이다. 그런데 그런 삶을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났던가? “온 세계가 주님을 기억하고 주께로 올 것이며 이 세상 모든 민족이 주님을 경배할 것이다. 나라는 주님의 것, 주님은 만국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시22:27~28)
성경이 다윗의 삶과 예수의 삶을 이렇듯 똑같이 기록해 놓음은 우리 삶에 복음 그 자체였던 예수의 삶이 나타나야 한다는 당위적 표현이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도 주께서 하실 일을 말하면서 '주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셨다' 하고 선포할 것이다.” (시22:31) 그 일은 하늘 백성인 우리에게 반드시, 그리고 불가피한 일로서 인생에서 진행된다. 요한은 계시록에서 우리 삶에 그 예수의 삶이 재현되고 있는가를 묻는다. 그 복음의 내용으로 살아내고 있는가를 확인케 한다. 이 말은 도덕이나 윤리적으로 완벽한 삶을 살라는 말이 아니다. 정말 그런 삶을 살아낼 수 있다면 하나님이 인간으로 와서 죽을 필요도 없었다. 성경이 요구하는 삶은 나를 죽여 상대를 살려내는 십자가적 삶의 원리를 이해하고 혹 실패하고 실수하더라도 그런 삶의 방향성이 인생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2. 진짜 복된 자들
내 스스로, 나의 힘으로는 그렇게 살 수 없다. 불가능하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나를 그런 자리로 이끌어 간다. 그것이 믿음의 삶에 때로 일어나는 억울하고 불편한 일들이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읽는 자는 단수이고 듣는 자들은 복수이다. 성경이 흔하지 않았던 당시에 회당에서 한 사람이 읽고 여러 사람이 들었었다. 그러니 성경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 누가 더 복될까? 거기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 여기서 ‘복 있는 자들’이란 구원받은 하늘 백성들을 말한다. 그런 이들은 단지 읽고 듣는 것에 그치지 않고 듣는 것으로 끝내지 않는다. 그것을 지키는 인생들이다. “여러분은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고 그저 듣기만 하여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약1:22)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치 않는 자들은 자신을 속이는 자라 함은 믿는 자에게는 요구되는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말이다. 아니 당연하게 나타나는 삶이 있음을 말한다. 그것이 예수의 삶이고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그렇게 나타나는 계시의 일들은 반드시, 그리고 속히 될 일이다.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일들을 기록한 책입니다. 이 계시는 곧 일어나야 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천사를 보내셔서 자기의 종 요한에게 이것들을 알려 주셨습니다.” (계1:1~3) ‘반드시 속히 될 일’은 예수로서 악이 망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됨이다. 이 계시록이 기록된 때는 이미 예수가 십자가를 졌고 당신의 사역을 완성한 후였다. 그럼에도 왜 '이미 이루어진 일'이라 하지 않고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 기록했을까?
“비밀을 알려 주시는 분은 오직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뿐이십니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 임금께 앞으로 일어날 일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임금의 꿈, 곧 임금께서 침대에 누워 있을 때에 머리속에 나타난 환상은 이러합니다. 임금이 잠자리에 드셔서 앞날의 일을 생각하고 계실 때에 비밀을 밝히시는 분께서 임금께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단2:28~29) 뜨여진 한 돌이 날아와 그 신상을 부수었다. 그 뜨여진 돌은 당연히 예수를 상징한다. 즉 다니엘은 그것이 마지막 때 하나님이 악을 멸하고 당신 나라를 세울 것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남유다가 망하기 전인 BC 605년 갈그미스 전투에서 승리한 바벨론, 그들이 유대인들을 포로로 잡아갈 때 다니엘도 그들 속에 잡혀 갔었다. 그때가 예수 출현 600년 전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그 일은 ‘장차 될 일’이라고 말한 것이다.
3. 이미 , 그러나 여전히
그러고 예수가 왔고 그 일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요한이 그이 계시록에서 유대 지파의 사자를 언급한 것이다. 그가 이겼고 이긴 그분이 교회시대를 여는 인을 뗄 자로 기술하였다. “그런데 장로들 가운데서 하나가 나에게 ‘울지 마십시오.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였으니 그가 이 일곱 봉인을 떼고 이 두루마리를 펼 수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계5:5) 그렇다면 그 책의 봉인이 어떤 의미를 가졌던가? "그 때에 너의 백성을 지키는 위대한 천사장 미가엘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나라가 생긴 뒤로 그 때까지 없던 어려운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 그 책에 기록된 너의 백성은 모두 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땅 속 티끌 가운데서 잠자는 사람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이 깨어날 것이다. 그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은 수치와 함께 영원히 모욕을 받을 것이다." (단12:1~2)
그 인은 예언된 마지막 때가 이르기까지 봉해두라고 한 그 인이었다. 그런데 예수가 십자가로 이겼고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인 교회가 탄생되었으니 교회의 이 땅 삶과 하늘나라의 완성 과정이 적힌 책의 인이 떼였다. "지혜 있는 사람은 하늘의 밝은 빛처럼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한 사람은 별처럼 영원히 빛날 것이다. 그러나 너 다니엘아! 너는 마지막 때까지 이 말씀을 은밀히 간직하고 이 책을 봉하여 두라. 많은 사람이 이러한 지식을 얻으려고 왔다 갔다 할 것이다.“ (단12:2~4) 그런데 왜 '이미 이루어진 일'이라 않고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 하였을까? 이것이 ‘이미, 그러나 아직’의 원리이다. 이미 임한 천국이 지금도 완성을 향해 가고 있는 이 땅 현실을 의미한다. 요한은 영적으로, 그리고 환상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았다. 이미 그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도 보았다. 악의 세력이 불 못에 던져진 것도 보았다. 그 일은 다니엘서 예언대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보이는 현실, 우리의 지금에 가시적인 하나님 나라는 오지 않았다. 다만 그 일은 영적으로 이미 이루어졌고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시작한 일이기에 오래지 않은 장래에 가시적으로도 실패 없이 이루어질 것에 대한 확신적 표현이었다. 이 믿음과 확신은 사도 베드로에게도 마찬가지였기에 이렇게 말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벧전4:7) 초기 교인들에게 이 말이 어려웠는지 베드로는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여 이렇게 말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잊으려 함이로다” (벧후3:3~5)
결론
말세의 사람들은 노아 때처럼 ‘언제 비가 오냐? 왜 100년이 지났는데도 비가 안 오냐?’ 즉 ‘정말 예수가 재림하냐? 종말이 오기는 오냐?’ ‘언제 오냐?’ 이렇게 조롱하고 비아냥거린다. 그런데 노아 때 비가 왔다. 다만 120년 후에 왔다. 하나님이 하겠다 하면 그 일은 이미 진행되고 완성된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10년, 100년 1000년이라는 기간은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하고자 한 일은 피할 수 없고 이미 시작된 일은 끝을 향하여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이런 것을 ‘속히 될 일’이라 한다. 이 표현은 시간을 강조함이 아니었다. ‘하나님 나라 완성의 필연성과 확실성’을 강조함이었다. 우리는 그 소망으로 산다. 그래서 사는 것이 힘들고 지쳐도 매일을 돌아보며 기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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