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4. 7. 17:12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내가 이같이 우매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시73:17~26)
신앙 여정이 쉽지 않다. 그 어려움들은 어느 시기에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 어려움은 그 나라 백성으로 지어져 감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죽는 날까지 죄로 오염된 자신과 싸워야 하는 여정이기에 사는 날들 자체가 영적 전투이다. 그래서 우리는 ‘끝까지’ 싸워야 하고 ‘끝까지’ 참아야 한다.
1. 평생 싸워야 하는 인생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어려움들에는 다 이유가 있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히10:32~34)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알게 하기 위해’ 고난이 있다는 것이다. 원문에는 ‘앎이라’에 ‘스스로’라는 원어 ‘헤아우토이스’가 수식되어 있다. 그래서 원문대로 다시 읽어 보면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함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너희 스스로 앎이라’가 된다. 어려움은 하늘 소망을 ‘스스로, 주관적으로’ 인식하게 한다는 것이니 객관적 고난 상황이 주관적 가치관으로 누적되어 간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의 하늘 살기는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 된다. 그런 어려움에서 진짜 신앙인들은 끝까지 견뎌내고 가짜나 사이비들은 떠나간다.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는 우리들이기에 보이는 것의 상실에 흔드리지 않고 또한 고통스럽지도 않다. 그래서 끝까지 인내한다. 그러나 보이는 것만을 소망하는 가짜들은 이 과정에서 걸러지는 것이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히6:10~12) 이렇게 우리 삶은 끝까지 전투이다. 5년, 10년으로 끝나는 전쟁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자녀 됨을 위해 생의 마지막까지 싸워야 하는 영적 전쟁이 신자의 삶이요 태도이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24:12~13)
이 긴 전쟁을 끝내면 우리가 기다려 온 그 나라가 주어진다는 소망이 우리를 견디게 한다. ‘주께서 너희를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고전1:8)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끝까지 견고케 하기에 삶에 그런 훈련의 사건들이 닥치는 것이다. 바울도 죽는 날까지 이 전쟁을 하다가 갔다. 그의 어려움은 복음 전파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역시 예수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지어져가야 할 사람이었기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4:7~9)
2. 그러나 소망이 있기에
세상적 시선으로 보자면 일상의 답답함과 사면초기 상황이 다반사였던 바울이었다. 그러나 그는 소망에 대한 확신으로 살았던 사람이었기에 그 와중에도 감사와 항상의 기쁨을 말할 수 있었다. ‘기록한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고후4:13~16) 바울은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 새 몸을 입고 서게 될 그 소망의 때를 확실하게 붙들고 있었다.
그러기에 만만찮았던 자신의 사역적 삶에서 인내할 수 있었고 혼란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고전15:31~34) 바울만이 아니었다. 예언자 하박국은 자기 시대의 혼돈과 자기 개인 삶의 혼란을 어떻게 정리했던가?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합3:17~18)
뿐만 아니라 성경의 한 시인에게서도 삶의 혼란을 신앙으로 정리했음을 읽을 수 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시73:17~26)
3. 그럴수록 더욱 더 하늘을
어려울수록, 답답할수록 더욱 더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성경은 말한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이렇게 마귀가 혼란스러움과 의심으로 공격을 해 올 때 하늘로 눈을 돌려 구원의 소망을 다시 확신하며 힘든 상황들을 이겨나갔다. 오늘 힘든 내 상황만 보지 말고 높은 저 하늘 소망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순탄케 풀리지 않는 일들로 지쳤고 깊은 상처로 아파도 너무 아파서 힘들 것이다. 이제 그만 하고 싶다. 그래서 기도도 해 본다. 그러나 하나님은 답이 없고 당면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주지 않는다. 단지 소망 가운데서 참고 이겨내라고 한다. '하나님이 나한테 왜 이러시나? 내게 이럴수가 있는가?'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견디며 사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 무응답이 하나님의 응답이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나에게 꼭 필요한 과정이기에 침묵하는 것이다. 아니 허락하는 것이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딤후3:12)
바울의 이 문장의 원문에는 ‘모두’라는 원어 ‘판타스’가 들어 있다. 즉 믿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이끌려가는 삶을 살게 되어 있다는 것, 그런 사람들은 예외 없이 여러 모양의 ‘핍박’을 경험하게 된다는 바울의 확언이다. 그 처해진 상황에서 우리는 하늘을 보아야 한다. 물론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런 상황들이 ‘스트레스’로 다가오면 대부분 인간적 방법으로 풀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방법을 한들 일시적일 뿐 삶의 근본적 스트레스는 해갈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생을 사는 우리들이 경험하고 감내해야 하는 몫이다. 피할 수 없다. 다만, 믿음의 사람들은 그런 어려움을 견뎌내면서 하늘 소망이 더 분명해진다. 현실에서 내 삶은 더 힘들고 비참하다는 생각은 대부분 다른 이와 비교 때문이다. 다른 이들은 나보다 고난을 덜 받는 것 같은데 나만 더 심하게 겪는 것 같고 다들 잘 먹고 하고자 하는 일들도 쉽게 풀려 걱정없이 잘들 사는 것 같이 보인다.
하지만 아니다. 그것은 착각이다. 인생 모두가 각기 나름의 어려움을 겪는다. 각각 자기들대로의 받는 고난들이 있다는 말이다. 설령, 나보다 고난을 덜 받고 수월하게 간다 해도 인생의 목적지는 결국 한 곳이다. 그래서 예수가 베드로에게 다른 이들의 인생에 신경쓰기 보다 주어진 자기 삶에 충실한 것이 하나님 앞에 바른 인생임을 말한 바 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요21:19~22)
결론
어떤 이들이 어떤 길을 가든 잘하든 못하든 신경 쓰지 말고 자기 삶에 집중해야 한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나는 불행하다. 왜 나만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나?’ 자책하고 비교 원망 하면 자신만 더 불행할 뿐이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맞는 어떤 인생을 각자에게 알맞도록 허락하였다. 단지 내가 가야 하는 내 인생의 몫을 살아내며 소명으로의 길을 견디며 가는 인생들에게 열린 하늘문으로의 가능성이 감지된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벧후3: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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