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4. 7. 20:57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 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요21:1~14)
요한복음의 20장 마지막 두 구절은 훌륭한 마무리이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20:31~31) 이렇게 요한복음이 여기서 끝이 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더 있었다.
1. 끝나지 않은 이야기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닌 21장의 이야기, 그래서 신학자들은 이 부분을 원저자가 아니라 이후의 편집자에 의해 추가된 결론, 즉 에필로그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왜 에필로그가 더해졌을까? 아마도 독자들이 요한복음의 처음부터 보고 들은 것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노파심에서 한 가지 더 잊을 수 없는 이야기를 추가한 듯하다. 추가된 21장의 내용에는 부활한 예수가 디베랴 바다에 나타나 제자들에게 생선과 빵을 조식으로 먹인 이야기와 베드로에게 당신의 양떼를 부탁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부활한 예수가 해변에 나타나 그들을 부를 때까지도 제자들 중 누구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이는 요한복음 바로 앞장인 20장에서 마리아가 빈 무덤에서 예수를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무덤을 찾아갔던 그녀도 처음에는 그녀 뒤에서 부르는 예수의 음성을 들었으니 알아보지 못한체 그 예수를 무덤을 지키는 동산지기로 착각했었다. 사람들은 마리아가 너무 슬퍼서 분간하지 못했을 것이라 마무리짓고 넘어가려 할 때 이 에필로그는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던 다른 일까지 상기하게 만든다.
뒤늦게서야 부활 예수를 알아본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달려갔다. 가서 ‘내가 주를 보았다’고 증언하였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두려움에 숨어서 문을 걸어 잠그고 더 깊이 숨었었다. 그런데 그 잠그고 숨은 집 안으로 홀연히 부활한 예수가 들어왔다. 그리고는 겁에 질려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안이 있기를' 하고 인사를 했을 때도 그들은 예수를 몰라 보았다. 아니 감히 믿지를 못했던 것이다. 그날로부터 8일이 지나 도마에게 다시 나타났을 때도 제자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요한은 기록하고 있다.
2. 기이한 이야기
3년 동안 동거동락하며 이적을 보았고 그 많은 강해를 들었던 제자들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너무하다 못해 괴이한 일이다. 그러고 보니 이 기이한 이야기는 요한복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누가복음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서도 나온다. 부활한 예수가 그들과 친히 동행하셨으나 그들은 그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곰곰히 생각해 보니 비로소 요한복음 에필로그 편집자의 의도를 알 듯하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요한의 복음서를 다 읽고 난 후 '적어도 나는 마리아나 다른 제자들처럼 그렇게 둔감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그토록 은혜로운 우리 주님을 모를 수가 있나?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요한복음의 드라마를 마치려는 순간, 에필로그 편집자는 우리에게 경고한다. ‘정말 당신이 그렇게 장담할 수 있는가?’ 오늘날도 우리 가운데 현존하고 계신 부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기는 그때의 막달라 마리아나 다른 제자들이나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 이야기와 별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이울러 디베랴 바닷가의 아침식사 이야기는 요한복음 6장에 기록된 오병이어의 들판 식사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한 아이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예수는 모인 자들로 나누어서 함께 먹었었다. 그 들판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떡과 생선을 먹었던 분, 그렇게 예수는 디베랴 바닷가에서 빵을 집어 제자들에게 나눠주고 생선도 그렇게 하였다. 그 떡과 생선을 구원서 먹인 예수를 접한 제자들은 그 생선을 받고 떡을 나누어 먹으면서 무슨 생각들을 했을까?
3. 채워주시는 하나님
우리 하나님은 주린 자들에게 언제나 채우시는 분이다. 예수의 부지런한 손과 발은 하늘 풍성함으로 넉넉케 채우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는 그 풍성한 채움의 사건들이 다 지나간 이야기, 성경속의 옛날 이야기이지 지금은 아니라고,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즉물적으로 판단내리려 하지만 그 때 예수가 외친다. 아니라고, 박제된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도 여전하다고 말이다. 지금도 쉬지 않고 우리를 돌보고 축복하여 먹인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디베랴 해변의 이 이른 아침 식사 이야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많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공관복음에서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했던 지상에서의 그 최후의 만찬도 결코 마지막 식사가 아니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요6:51) 그리스도는 오늘도 이 땅에서 지치고 주린 이들을 사랑과 은총의 식탁에 초대한다. 그리고는 친히 먹이고 돌보는 살아계신 우리들의 하나님이다. 그런 면에서 부활은 단순히 하나의 절기가 아니다. 1년에 한 번씩 오는 특별한 날도 아니다. 부활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계속 경험하는 하나님의 시간이며 사건이다.
물론, 요한복음 21장은 요한이 아닌 누군가가 쓴 것일 수도 있다. 원본에 가필을 했다고 믿어야 할지 말지 신뢰가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이야기가 지닌 생명력이 약해지는 것은 아니다. 디베랴 바닷가에 부활 예수가 나타나 일곱 제자를 먹이고 이후에 특별히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세 번이나 당부하신 이야기는 예수의 수난과 부활 이야기를 먼 옛날 이야기로 여기지 말라는 간절한 외침이다.
결론
연극이 모두 끝나고 무대막이 내려올 즈음에 갑자기 에필로그 편집자가 튀어 나와 우리에게 외친다. 요한의 이야기는 막이 내렸을지 모르나 예수의 사랑과 은혜, 그 채우심의 이야기는 지금도 진행중이라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우리를 불러 먹이고 능력을 주고 있다고 말이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고 섬긴 그분의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 주님은 살아 계신다. 십자가를 지고 부활한 예수는 오늘 우리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이다. 살아 계신 그 하나님이 우리의 소망이기에 내 사는 날들이 두렵지 않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사4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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