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4. 7. 15:56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4:4~7)
소위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 그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 구원의 여정에 대한 정의가 말하는 이들마다 좀 다르다. 어떤 이들은 성화가 이루어져야 칭의가 있고 칭의가 되어야 영화의 단계에 들어간다고 말한다. 그래서 내 힘과 노력을 보태서 성화를 이루지 못하면 의롭다는 칭함을 받을 수 없다고 한다. 정말 그럴까?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구원의 과정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구원이라는 사건은 최후 심판이 현존 역사로 뚫고 들어온 사건이다. 창세전에 택함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아 죄값을 치루었기에 의로운 자, 즉 칭의를 받았다. 다시 심판을 받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최후 심판이 이미 역사에 들어왔기에 지금을 말세라 한다.
1. 양자가 된다는 것
말세는 미래의 어느 날 우리에게 닥치는 날이 아니다. 예수의 십자가 심판에서 정죄 받아야 할 어떤 자들에게 무죄 선고가 내려졌고 그 예수가 다시 세상을 심판하러 올 터인데 그 때까지의 시대를 말세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고 선택하셨다. 이 상태를 어떤 이들은 죄가 없었던 아담으로의 회복인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죄가 없었던 아담도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우리의 회복된 거룩이 거기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우리는 언제라도 또 죄를 범할 수 있고 추락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바울은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들 것'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던지 그 구절에 '양자 삼으심'이란 어구를 첨언하였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양자 삼기로 미리 정해 두었다. 그러니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드는 궁극적인 목적은 양자로 삼아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면 왜 양자인가? '양자'는 당시 유대인들도 잘 알지 못하던 개념이자 용어였다. 유대인들의 법적 체계에서는 이 개념이 없었다. 바울의 사용한 이 개념은 로마법에서 차용한 어휘였다. 바울은 로마 시민이었고 또 그 분위기에서 살았기에 양자라는 개념을 알았고 쓸 수 있었다. 로마법상 양자가 되면 그 부친 이름을 따르고 그 부친의 소유에 대한 권리까지 확보되는 신분이었다. 당시 적자들에게는 아버지가 재산을 물려주지 않아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었으나 양자들에게는 반드시 재산을 물려주어야 했었다. 그것이 당시의 로마법이었다. 바울은 이 엄청난 신분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유업을 물려받을 신분임을 강조하였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부모가 자기 마음에 들면 호적에 올리고 들지 않으면 버리는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낳자마자 일단 호적에 올리고 사람답게 키우기 위해 애쓴다.
하나님도 창세전에 우리를 선택하였고 아들로 삼았다. 그 후부터는 당신의 자녀로 만들어 간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기에 계획하고 목적한 것은 반드시 이룬다. 하나님이니 실패나 실수할 수 없다.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이 땅에 보냈다. 예수는 이 땅에 왔을 때에 전적으로 자기를 비웠고 성령에 의해서 이끌림을 받았다. 하나님의 영이 의도하는 대로 살아내기 위함이었다. 예수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나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시키시는 일만 했고 하버지가 하라는 말만 했다. 그것은 예수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당신의 동생들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 완성되어갈 것인지를 보여줌이었다. 성령 하나님이 이끌 것이고 우리는 그 분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게 되어 결국에는 하나님이 원하는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나게 될 것이다.
2.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예수 안에서 그 삶을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완성해낸 성령이 우리 안에도 동일하게 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4:4~7) 우리도 역시 하나님의 아들들이기 때문에 동일한 성령이 부어졌다. 그래서 내 실존으로는 절대 확신을 가질 수가 없던 내가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러니 우리는 그 분의 자녀로 완성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지금 자기 꼴을 보면서 ‘난 안 돼. 난 가짜인가 봐’ 이런 판단은 금물이다. 그런 태도은 겸양이 아니라 불신앙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한다면 낙담은 금물이다. ‘우리는 이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를 대신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압니다‘ (롬8:24~28) 우리의 영혼은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몸은 아직 악습을 완전히 벗지 못했다. 죄의 습관을 안고 여전히 살고 있다.
그래서 일반인들과 달리 우리는 죄를 지으면 괴롭다. 그래서 매일매일 하고 싶은 것, 즐기고 싶은 것,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으로부터 죽는 연습을 한다. 그리하여 할 수만 있다면 속히 이 죄의 몸을 벗고 싶어 한다. 그 결과, 우리들은 죽음이라는 것을 힘들어하지 않게 되었고 내려놓기, 비워내기도 수월하게 되었다. 인간 육신의 죽음이 옛사람의 죽는 관문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죄에 대해 처절하게 고민해본 우리들이었기에, 또 그렇게 하고 있기에 옛사람을 완전히 벗는 날을 소망하고 기다린다. 구원 받은 우리는 이미 법적으로나 제도적으로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다. 그런 우리들을 중도에 포기한다면 하나님도 법을 어기는 것이라는 바울의 논리,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확실하고 완성도 필연적이다.
3. 반드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우리는 반드시 그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벧후3:10~13) 이 땅의 모든 것은 변한다. 장차 불타버릴 것들 뿐이다. 이 세상에 절대적이며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럼에도 교회당 안에서도 특권층을 부러워하고 높은 지위를 추동시키며 심지어 그런 것들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축복과 능력에 대한 설교들로 충만하다. 이런 현실이 무섭다. 오늘의 교회들이 어디까지 추락하여고 이러는지 두렵고 떨린다.
누가복음의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잘 알려진 천국과 지옥의 비유이다. 부자가 지옥 불 가운데서 가지고 있던 것이 무엇이 있었나? 아무 것도 없었다. 거기서 그는 완전히 발가벗은 채로 불타는 일밖에 없었다. 우리 인생들이 무덤 너머로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살았던 현실에서 그 부자는 매일 잔치를 벌였다.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좋은 옷에 첨단의 유행을 따라 하고 싶은 것을 다하고 명품을 두르고 살았었다. 반면에 나사로는 어떠했던가? 그는 이 땅에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개처럼 부자들이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얻어 먹으며 살았던 인생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였다. 저 하늘에서 거지 나사로는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되었다. 우리는 하늘을 보며 사는 자들이지 땅에다 두고 갈 것들을 쌓는 자들이 아니다.
이 땅에서 조금 힘들더라도 그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추구하겠는가? 아니면 잘 먹고 잘 사는데 것에 내세를 잊고 살다가 영원히 지옥의 땔감 재료로 살겠는가? 이 땅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다가 가던 우리 하나하나는 존귀한 존재들이다.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성경에는 내가 세상을 떠날 때에 천사가 와서 기다려 나를 모셔간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눅16:22) 다른 이의 표현이 아니라 예수의 직접적인 표현이었다. 우리는 천사가 기다렸다가 받들고 올라가는 신분이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사랑을 말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무엇이 사랑인가? 이 땅에서 그들이 원하는 빵을 조금이나마 제공해 주는 것이 사랑인가? 아니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을 준비시키는 것이 사랑인가? 진짜 사랑을 하라는 것이다.
결론
이미 양자된 우리 삶은 이 땅에서 만사형통일 수 없고 또 무사안일이어서도 안 된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15:18~19) 세상과 대중 다수는 언제나 자기와 일치하지 않는 것을 싫어한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지구가 돈다고 말했을 때 세상은 그를 화형 시키려 했다. 아테네의 걸출한 의인 아리스라는 시민들 투표로 그 도시에서 쫓겨났다. 왜? 어디를 가나 그가 의인이라고 불리는 것이 미웠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상대적으로 자신들이 악인이 되어져가는 분위기가 불편했던 것이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지만 조금씩이라도 그리스도를 닮았다. 아니 닮아가고 있고 그 삶을 추구하려 한다. 하지만 그런 우리를 세상은 곱게 보지 않는다. 보기 싫어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아들이라는 신분의 고귀함을 알기에 그 공격을 참아내고 극복해 나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후4:17) 거기서 절망하거나 낙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어주신 소망을 붙잡고 산다. 하나님이 우리를 양자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 아들된 신분과 위상이 오늘의 어려움을 견디게 하고 영적 소통을 더 강화시켜 나가게 한다. 그런 우리를 보고 있는 하늘 아버지가 지금 말씀하신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시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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