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9. 4. 13:24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그 두령들과 재판장들과 유사들을 부르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보인지라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수24:1~2)
'믿음'이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친숙하다. 이 믿음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다고 어려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원하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잘못되면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는 말을 듣는다. 그래서 그 믿음을 강하게 하고자 여러 방법들을 동원하는 중에 큰 믿음 달라고 금식기도, 40일 작정기도, 1000일 새벽기도를 하기도 한다. 심지어 정말 믿음이 좋은 사람이 산상에서 기도하면 그 산의 흔들바위까지도 굴러뜨린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믿음을 기도라는 분량과 연결하여 집착하기도 한다. 정말 그렇게 믿음은 분량으로 잴 수 있는 어떤 것인가? 내가 열심히 갈고닦아서 좋은 것으로 만들어 가질 수 있는 것인가?
단연히 믿음은 그렇게 생기지 않는다. 그렇게 여김은 모두 사람들의 오해에서 비릇되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이 그렇게 오해를 했을까? ‘믿음’이란 말을 단지 ‘믿는다’의 명사형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전에서 찾아본 ‘믿다’라는 말은 ‘받들고 따르다’라는 뜻으로 다분히 행위를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내가 ‘행하는 것’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해서 믿음이 생긴다면 그 믿음이라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선물일 수가 없다. 더구나 그분의 부어주시는 은혜는 더욱 아니다. 응당 받아야 할 대가일 뿐이기 때문이다.
1. 믿음이 무엇인가?
성경은 무엇을 믿음이라 하며 또 그 믿음은 우리에게 어떻게 오는가? 우리는 믿음을 이야기할 때, 그 근원이 어디인지를 자주 간과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의 근원은 ‘하나님의 의’이다. 이 ‘하나님의 의‘라는 말은 신학적 용어이다. ’'아버지가 자식에 대해 끝까지 아버지의 노릇을 해주심‘이 하나님 아버지의 의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개념이 아니다. ’관계를 맺은 어떤 존재가 그 관계가 요구하는 의무와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함‘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관계를 맺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 즉 우리에게 하나님 당신이 하실 일을 성실하게 해 주심을 말한다. 그것이 아버지로서의 역할이다. 그렇게 자녀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와 뜻이 우리를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복음이라는 그 복된 소식이 무엇인가? 복권에 당첨되는 것인가? 내 아들의 좋은 대학에 들어가거나 좋은 직장에 입사하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세계대회에서 우리나라가 이긴 것인가? 사실, 이런 것들은 모두 상대적인 것들이다. 우리에게는 기쁜 소식이겠으나 패배한 쪽에서는 슬픈 소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원히 변치 않는 좋은 소식, 누구에게나 절대적인 기쁜 소식은 무엇인가? 구원의 복음이다. 죄로 죽을 우리를 위해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를 보내시고 그 예수는 우리를 위해서 저주로 죽고 다시 살아나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것, 그 하신 일이 우리에게 전가되어 내가 온전케 되었다는 것, 바로 이것이 기쁜 소식이요 복음이다. 성경 전체는 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복음으로 믿는 우리들이 그리스도인들이다. 이 복음이 진정 기쁜 소식이 되기 위해서는 그 소식이 나와 관계가 있어야 한다. 자기 아들이 서울명문대학에 들어갔다는 소식에 산골 마을 이씨가 뛸 듯이 기뻐하는데 함께 그 소식을 들은 옆집 정씨는 아무 감동이 없다. 그 이유는 옆집 아들의 좋은 소식이 자기와는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처럼,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복음이 구체적으로 나와 관계가 있어야 한다. 그 예수의 죽음, 그리스도의 구원이라는 사건이 나에게 진짜 복음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믿음이다. 오늘날 보편적이고 일반적으로 이 복음들이 선포되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인터넷으로나 책으로, 또는 SNS를 통하여 얼마든지 접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렇게 던져지는 복음들, 예배들, 설교들, 그것들이 나와 관련한 진짜 좋은 소식이기 위해서는 나에게 믿음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2. 믿음은 어떻게 가질 수 있나?
성경은 ‘믿음이란 방법이 우리를 믿음이란 결과로 이끌어간다’고 말한다. 즉,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이다. 의인이라서 믿음인가? 아니면 믿음이라서 의인인가? 이해가 쉽지 않은 논리이다. 도대체 앞의 믿음은 무엇이고 뒤의 믿음은 무엇인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이 말은 마치 믿음이 두 종류인 듯한 뉘앙스까지 풍긴다. 물론, 믿음이라는 것을 보는 관점에 따라 달리 이해하면 종류도 달리 가질 수 있다. ‘믿음에서 출발해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의미는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믿음을 대표하는 조상 아브라함의 경우, 그는 자기 삶에서 어떻게 하여 믿음이라는 것을 가졌던가?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히11:8-9)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고향을 떠났다. 그래서 오늘의 믿음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부러워한다.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 나에게도 있기를 누구나, 모두가 원하고 구한다. 그런데 정말 그는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 믿음으로 떠났던가?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데라는 205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 (창11:31~32)
아브라함이 일가족을 이끌고 갈대아 우르, 즉 바벨론을 떠나온 것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인 데라가 아브라함과 그 식솔들을 이끌고 거기에서 나왔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스데반의 설교를 보면, 분명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은 데라가 아닌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곳을 떠나라고 명령하셨다.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행7:2~3) 하지만 창세기에는 분명, 아브라함이 아닌 데라가 그 떠남, 여정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3. 보잘것 없는 인생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 또 하나 있다. 사람들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대단한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우상을 만들어 팔고 그 우상을 섬기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 아브라함도 하나님이 아닌 우상의 덕으로 잘 먹고 잘 살던 사람이었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수24:1~2) 언뜻 보면 다른 신들을 섬긴 조상이 데라만 지칭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엄연히 그 앞에 ‘너희 조상들’이라는 말이 복수형이다. 다른 신들을 섬긴 이들이 데라 한 사람만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나홀 모두였다는 말이다.
아브라함은 우상을 섬기던, 심지어 우상을 만들어 팔던 집안의 자식이었으며 그런 집안의 내력을 좇아 우상을 섬기던 사람, 그것을 가업으로 삼고 살았던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왜 믿음의 조상을 선택할 때 집안 내력이 이렇듯 형편없는 사람을 택했을까? 그와 동시대 사람이었던 욥을 선택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욥은 하나님도 인정하는 동방의 의로운 사람이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그런 욥보다 아브라함을 선택함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믿음은 그런 불가능에서 시작됨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우상을 섬기며 살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어느 날 어떤 분이 나타나 무조건 우르를 떠나라 하였다. 훗날 바벨론이라 불리는 그 갈대아 우르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로서 4,000년 전이었던 그 당시에도 오늘날의 수세식 화장실이 있었던 곳이었다.
문명, 도시, 화려함과 편리함,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에게 이곳보다 더 좋은 곳은 없었다. 그런 그에게 어떤 신이 나타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어떤 땅으로 가라고, 그러면 그로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을 주어 이름을 창대케 하여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우상을 섬기던 그들에게는 솔깃한 말이다. 복을 부어준다는데 마다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래서 데라가 가족과 관계자들을 모아 길을 떠났다. 그 목적은 오로지 복을 받기 위함이었다. 우르라는 세상에서 나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하는 여정은 이렇듯 하나님의 일방적인 주권에 의해 진행되었다. 그 약속의 땅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약속의 땅을 선물로 주시는 분이 누구인지, 그들은 알지 못했다. 제대로 알지 못하나 그분이 원하는 바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선택하고 하늘로부터 땅으로 부어지는 은혜, 믿음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우리의 믿음 또한 그렇게 시작되었다.
결론
믿음이란 것은 하나님에게서 먼저 나왔다. 그러기에 우리의 믿음은 실패할 수가 없다. 그 객관적 믿음인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에게 주관적 믿음을 이끌어 내신다. 하나님이 반드시 그렇게 만드신다. 혹, 지금의 내 믿음이 형편없다고, 내 신앙이 너무 초라하다고 낙담되고 실망스러운가? 상관 없다. 믿음은 내가 하는 것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쪽 일방에 의해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시작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신실하심으로 나의 믿음, 우리의 경건을 완성시켜 가실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빌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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