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믿음

2023. 9. 25. 18:10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합3:16~18)

 

'믿음'이라는 단어는 통상 사람의 언어라 여긴다. 그래서 믿음이 좋은 사람, 믿음이 없는 사람 등, 사람이 자기 의지로 갖고 말고 할 문제로 여겨왔다. 그런데 하나님의 믿음이라니? 하나님도 믿음이 필요한가? 필요하다면 누구를 향한 믿음인가? 우리로서는 낯설다. 생경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을 면밀히, 그리고 정확하게 읽어 보면 믿음이라는 사건은 인간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건이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고대 아브라함의 예에서 그 분명한 형적을 읽을 수 있다.

 

1. 다시 나타나신 하나님

아브라함이 살던 당시는 자기 살던 곳 이외 다른 곳으로 가면 위험한 시대였다. 공동체로부터의 법적 보호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낯선 곳에서 위해를 받아도 말할 곳이 없는 이방인이요 나그네 신세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하나님이 나타나 '네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는 명령에 따라 이방인의 삶을 살려니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두려웠다. 그래서 본토를 차마 떠나지 못한 채 같은 갈대아 문명권인 인근 하란에서 머물다 죽었다. 그렇게 데라가 죽자 하나님이 그 하란에서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났다. 그에게 하나님은 두 번째로 등장한 것이다. 당시 아브라함 나이 75세, 그때까지 하란에 머물던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난 하나님은 우르에서의 약속을 그대로 반복하셨다. 이 하나님의 끈질긴 권유로 마침내 아브라함이 일행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땅에 들자마자 기근이 발생하였다. 이에 아브라함은 곧 애굽으로 갔다. 아마도 자기에게 나타났던 신에게 속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복을 준다고 해서 거기까지 왔는데 복은커녕 기근이라니?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애급으로 줄행랑을 쳤다. 이것이 소위 믿음의 조상이라는 인물의 행태였다. 기근으로 애굽으로 도망간 것도 가관이지만 실망스러운 일은 따로 있었다. 그 애굽에서 아내 때문에 자기 신변에 위험이 닥칠까 하여 누이라 속이고 애굽 최고 통치자의 품으로 보내버린 처신이었다. 이것이 부름 받은 아브라함의 믿음이었고 그의 실체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꾸중과 질책은 잘못을 한 아브라함이 아니라 애급 왕에게 떨어졌다. 이 어찌 된 일인가? 왜 하나님은 잘못한 아브라함이 아니라 애굽의 통치자를 꾸짖을까?

 

당시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던 애굽이었다. 그런 나라의 통치권을 쥐고 있었던 바로는 어떤 왕보다도 강력한 통치권자였다. 그러니 아브라함도 자기가 알아서 그 권력자에게 자기 아내를 헌납했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바로를 징책하므로서 하나님 당신이 더 강하신 분임을 아브라함에게 보였다. 그런데 왜 아브라함을 혼내지 않았을까? 이는 아직 그가 징계를 감당할만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세월이 지난 어느 한 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다시 언약을 한 후에 제물을 쪼개 놓으라 하였다.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400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4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창15:13~17)

 

2. 믿음의 출발은 하나님

히브리인들은 계약 시 양 당사자가 손을 잡고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갔다. 이는 계약, 즉 언약을 어긴 자는 그 쪼갠 고기처럼 처단될 것임을 확약하는 의식이었다. 그런데 그 계약식에서 하나님만이 홀로 그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셨다. 이는 우리가 그 언약을 지킬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기에 당신 홀로 그 언약을 지켜가겠다는 것, 즉 인간의 한계를 이미 알았던 하나님이었다. 그래서 당신 홀로 그 쪼개진 고기 사이로 지나셨다. 하나님과 약속을 지켜낼 수 없는 인간들 때문에 쪼개질 하나님, 그리고 실제로 쪼개진 하나님, 그것이 십자가였다. 그 십자가 사건으로 언약은 완성되었고 그 결과, 그 믿음의 후손들인 우리들 교회가 탄생되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의 인생을 더 들여다보면, 하나님이 그렇게까지 언약하셨음에도그는 그 약속을 믿지 못하여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는다. 실로 이것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자의 믿음이었다.

 

그 뒤로 한동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은 뒤 13년 후에야 하나님이 나타났다. 이때가 그의 나이 99, 자기에게 나타난 그분만 믿고 낯선 땅 가나안까지 왔는데 13년 동안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하나님, 그러니 아브라함으로서는 그동안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으며 두려웠겠는가? 그렇게 13년 만에 나타나신 분이 말했다.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 즉, 하나님의 섭섭함과 노여움, 그리고 전지전능한 당신을 믿지 못하고 왜 네 마음대로 했느냐는 추궁이었다. 그리고는 99세의 늙은 그에게 아들을 주시겠다 하였다.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었던 아브라함은 웃고 말았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당신을 믿고 따르라고 말함에도 그는 믿을 수 없어 웃었던 것이다. 아브라함뿐만이 아니었다. 히브리서에 믿음의 조상 대열에 번연하게 올라있는 그의 아내 사라도 이런 하나님의 언약을 듣고 속으로 웃었다.

 

아브라함이나 사라나 어느 것 하나 신앙적으로 제대로 한 것이 없었던 인생들이었다. 믿음이란 그런 인생들을 하나님 당신이 징계와 교훈과 훈련을 거쳐 만들어 온 것이다. 나중에는 100세에 얻은 그 귀한 자식까지 하나님 앞에 번제로 드릴 정도의 믿음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셨다. 하나님은 모리아 산에서의 그 믿음을 칭찬하면서 그에게 다시 축복하였다. 하지만 그 축복은 이미 반복된 언약이었다. 다시 말해, 복 주기로 작정한 하나님은 그 복을 받을만한 인생으로 당신이 직접 만들어 갔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절대 신뢰했고 순종했기에 그 복을 얻은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개입하고 간섭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택하여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그렇게 믿음은 출발에서부터 도착까지 나를 당신의 자녀로 완성시켜 가는 그 계획에 대한 신뢰이다. 그러니 믿음은 나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출발한다.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와 언약, 이 모든 것을 신뢰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3.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

그 믿음이 우리 삶에 들어와 우리를 징계하고 달래며 설득하기도 하면서 당신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을 일러 하나님의 믿음이라 한다.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믿음이 우리에게 들어옴을 '객관적 믿음'이라 하고 우리가 그 역사를 통해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게 됨을 '주관적 믿음'이라 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 때 그는 어떤 믿음의 소유자였던가?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11:18~19) 우상을 섬기던 갈대아 우르의 형편없던 겁쟁이가 하나님의 인도와 가르침과 징계로 ‘하나님은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시는 분’이라는 믿음, 100세에 얻은 자기 자식의 가슴에 칼을 꽃을 믿음의 소유자가 되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만든 믿음을 소유한 첫 모델이라는 의미에서 믿음의 조상이지 그가 대단해서 믿음의 조상이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 이전의 아브라함은 나약하고 졸렬했으며 비겁했었다. 그런 인생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어 낸 하나님, 그래서 믿음은 전적인 하나님의 작품인 것이다.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롬4:1~2) 그렇다. 믿음은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이다. 그분의 믿음에서 우리의 믿음이 잉태되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아직은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그 객관적인 믿음이 어느 날 우리에게 이해되고 인식되어 믿어지게 되는 주관적 믿음으로 나타남, 그것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 것이니 이로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가 되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언급한 이 어구는 사실 하박국서의 인용이었는데 종교개혁자들의 이념이기도 하였다.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하박국 예언자가 활동했던 시기는 나라가 바벨론에게 망하기 직전 시대였다. 국가 지도자들이 패역할 대로 패역했고 백성들은 우상 섬김과 부도덕한 짓들을 자행하던 시대였다. 그런 와중에 부도덕한 자들은 잘 살고 경건한 자들이 고생하는 현실, 예언자는 이 부조리에 분노하였다. ‘하나님이 어찌 일을 이렇게 하시나? 왜 악인이 의인을 삼키는 현실에 하나님은 보고만 계시는가?’ 예언자는 하나님께 따졌다. 자기는 의롭고 선민임을 전제한 이 따짐에 하나님이 응답하셨다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합2:2~4) 이 응답으로 하박국의 의문과 답답함이 한순간에 해소되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 일을 이루실 것을 확신하였다. 그것이 하박국서이다.

 

결론

하박국 예언자는 하나님의 계시로 자기에게 떨어졌을 그 저주의 두려움을 알자 자기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며 뼈가 썩고 몸이 떨렸다고 한다. 장차 바벨론에게 떨어질 그 무시무시한 저주는 사실 자기들에게 떨어질 것이었는데 하나님이 선물로 믿음을 주어 의인이 되었으니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그래서 노래하였다.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 나무에서 딸 것이 없고 밭에서 거두어들일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주 안에서 즐거워하리라.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리라.‘(합3:16~18) 믿음은 하나님이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완성된다. 그러니 믿음은 우리에게는 선물이요 은혜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니 우리가 이 믿음으로서 산다.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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