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9. 4. 13:02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19:5~6)
사람들은 평안을 원한다. 큰 사고 없이 무난한 일상의 영위, 안전한 삶을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지극히 일상적이고 단순한 바램이 결코 쉽지 않다. 세상 삶이 그렇게 만만치 않기 때문이요 또 평안을 대하는 자신의 감정이 균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앙인의 평안은 상황이나 감정에 근거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근거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 이야기는 우리의 흔들리지 않는 위로요 방향이다. 실제로 믿음이 사도들은 열악한 환경과 위협적인 신변의 처지에서도 하나님 안에서의 평안을 찬송함에 주저치 않았음을 볼 수 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을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게 주실 수 있는 분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영원무궁 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유1:24~25) '여러분을 넘어지지 않게 지켜 주시고 흠이 없는 사람으로 자기의 영광 앞에 기쁘게 나서게 하실 능력을 가지신 분, 곧 우리의 구주이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 영광과 위엄과 주권과 권세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 전에서부터 이제와 영원까지 있기를 빕니다. 아멘' (엡3:20~21) 그렇다. 신앙인이라 함은 당장 닥친 문제 때문에 우는 자들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그 하신 일로 감격하고 울고 그 뜻에 맞도록 살지 못하는 자신의 안타까움으로 운다. 요한을 포함한 사도들은 서신서들을 쓰면서 곳곳에서 그렇게 복받치는 감격을 표현하였다.
1. 하나님 찬양
신앙인들은 자신의 구원을 넘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구원받았다.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1:11~14)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도 기독교를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의 크심을 모르기에 나의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는 종교로 말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를 찬송하는 종교이다.
물론, 이런 표현이 인간적 측면에서 자존심이 상하겠지만 엄연히 인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존재이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고 또 익숙한 휴머니즘, 인내천, 등 인간 중심주의 사상들은 인간이 최고라는 기조에 뿌리하고 있다. 같은 인간으로서 이런 표현에 인간적 거부감이 당연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창조주이고 우리 인간은 그이 피조물이다. 창조자가 당신을 알리는 성경을 통해 피조물인 우리의 존재 근거를 그렇게 규정하고 있으니 이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다만, 그 창조자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았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는다.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거듭난 우리들, 하늘 시민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게 되어 있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찬양할 것이 무엇이 있느냐고, 이 지긋지긋한 삶과 극악한 상황에서 하나나님께 감사할 것이 무엇이 있느냐고 말이다. 혹이라도 신앙인으로서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오늘날 같은 처지를 허락한 하나님이 원망스럽다면 그 사람은 아직 복음을 제대로 모르는 인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찬양받기를 원하시나?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그 사랑은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약속으로 일관되고 있다. 우리를 너무도 사랑해서 창조자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라는 소리를 듣기 원하신다.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감사와 사랑, 거기에서 나오는 찬양을 듣고자 원하신다. 그 이유로 나를, 우리를 구원하셨고 또 천국 백성으로 만들어 나가신다. 열악한 삶의 조건과 만만찮은 인생 여정을 통해 양육하여 나가시는 것이다.
2. 피로서 표현된 사랑
죄의 종이었던 우리를 그 죄에서 해방시키고자 하나님은 당신 자신인 예수를 죽였다. 우리의 해방을 위해 그 하나님이 잠시 예수라는 인간으로 와서 그리스도라는 사역을 감당하신 것이다. 여기 ‘해방하다’는 원어 ‘루오’는 ‘깨끗이 목욕시키다’는 의미이다. 죄로 온통 더러워진 우리를 예수의 피로 깨끗하게 씻어 주었다.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그렇게 표현하셨다. 성경에는 오직 그 예수의 피로서만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선언한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9:22) 그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제사장’이 되었다. ‘나라와 제사장’이라는 표현의 원문은 ‘바실레이안 히에라이스’, ‘나라, 곧 제사장’이니 '나라'와 '제사장'이 동격이다.
이것은 출19:6의 성취이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말씀을 잘 지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 이스라엘로 상징되는 오늘의 우리는 그 말씀을 지킬 능력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로 와서 모든 것을 지켜냈고 이루어낸 그 삶을 우리에게 전가시켰다. 비로소 우리가 제사장 나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 여기의 ‘나라’는 영토적 개념이 아니라 주권적, 통치적 개념이다. 하나님의 통치, 주권이 임하는 우리의 생각이나 삶 자체가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다.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10:19)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요 내가 곧 제사장이다. 옛 약속에 따르면 오직 제사장 직분자들만 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예수의 희생으로 이제 우리들 자체가 성소에 들 수 있는 제사장들이 되었다. 그리하여 영원한 성소인 천국에서 들어가 영원히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게 되었다. 출산을 해본 이들은 안다. 태어난 아기가 알아듣지 못해도 자기의 그 아기가 너무도 이뻐서 그 아기에게 계속 말을 한다. ‘손이 예쁘네, 발이 예뻐, 눈이 맑아’ 등, 너무 사랑하니까 칭찬하고 싶어 못 견디는 것이다. 인생이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이 그런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존전에서 그분을 섬기고 찬송하는 제사장들이 되었다.. 날마다 제사를 드리는 자들이 되었다는 말이다.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히13:15)
3. 하나님의 기뻐하는 삶
대제사장 예수가 자기 몸을 제물로 드림은 하늘 아버지에 대한 절대 순종이었다. 그가 드린 제사처럼, 제물은 마땅히 죽어야 하니 우리 또한 그 죽음에 갈음하는 제물적 삶을 살아야 한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 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벧전2:13~14) 제도와 법과 상위 권위에 복종하라 한다. 왜 우리가 그런 권위에 복종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제도나 법이라는 상위 권위로 우리 인간의 악함과 죄를 억제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전2:15~21)
찬양으로의 삶은 이 땅에서의 성공과 번영 때문에 형제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장의 삶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의 삶도 결국은 예배의 삶이었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계22:3) 여기 ‘섬기며’라고 번역된 ‘라트류오’는 ‘예배하다’는 뜻이다. 그러한 아버지와 자녀가 영원히 함께 거하는 곳이 천국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인데 그 모습을 지상에 그려놓은 것이 교회요 그 교회의 예배이다. ‘여러분이 나아가서 이른 곳은 시온 산,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시인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여러분은 축하 행사에 모인 수많은 천사들과 하늘에 등록된 장자들의 집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완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재자이신 예수께 나아왔고 아벨의 피보다 더 훌륭하게 말하는 그가 뿌리신 피 앞에 이르렀습니다.‘ (히12:22~24) 이 모습이 예배의 모습이요 구약 성막과 성전에서 드려지던 제사의 모습이다.
결론
우리는 이 땅에서 ‘교회’로 구원을 받았다. 교회, 즉 하나님의 나라는 개별적이 아니라 집단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여야 한다. 세상의 외로운 이방인, 나그네로 사는 우리는 모여야 한다. 많은 이들이 이제 예수가 왔기에 율법은 폐기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율법은 폐기된 것이 아니라 성취되고 완성되었다. 우리 또한 예수 안에서 이미 완성된 하나님 나라로 지어져 가며 그 율법들을 완성시켜 가고 있다. 그렇게 세상에게 구별된 어떤 무리들, 하나님을 부인하는 세상에서 불려 나와 기꺼이 나그네적 삶을 사는 무리들, 그 무리인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요 제사장이다.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는 표현이 과거시제이니 이미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 앞의 ‘우리를 사랑하사’에 해당하는 ‘아가파오’는 현재시제이니 그 사랑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영원토록 계속될 것이다.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계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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