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퍼센트의 하나님

2023. 8. 2. 23:34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창14:17~20)

 

십일조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에게 십일조를 하라고 시키셨는가? 하나님의 살림이 궁색해진 것일까? 하나님이 하늘나라 재정이 부족해서일까? 하나님은 영이시다. 영이신 하나님에게 물질은 의미가 없다. 돈, 물질, 경제적인 사안들은 유한한 존재로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문제이지 영원한 하나님, 영으로 존재하는 그분에게는 한 줌 가치도 없다. 그럼에도 십일조를 명령함은 당신의 은혜를 나누기 위함이요 그 십일조가 약속의 땅과 관계있기 때문이다.

 

1. 약속의 땅과 십일조

성문 규정으로서의 하나님이 내린 십일조 명령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고 난 이후부터였다‘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레27:30)  하나님은 약속의 땅에서 나는 소산과 가축의 십 분의 일을 꼭 하나님께 바치도록 했다. 그 땅에서 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제공됨을 고백하게 함이었다. 즉 은혜를 기억하라‘는 의도에서 십일조를 명령한 것이다. 그 십일조가 어떤 것인가'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우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신14:22~23) 십일조를 매년 드리되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한 곳에서, 그 드려진 각종 곡물들과 기름들을 권속들과 함께 먹으라고 하였다. 십일조의 용도가 단지 레위인들의 생활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자신과 권속들, 즉 이웃 사람들과 나누며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또한 그 십일조를 먹되 그들의 우양의 처음 난 것을 먹으라고 하였다. 십일조가 우양의 처음 난 것즉 ’맏물, 맏이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맏이' 또는 '맏물은 처음 난 것만을 말함이 아니었다'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첫 소산 곧 제일 좋은 기름과 제일 좋은 포도주와 곡식을 네게 주었은즉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그 땅 처음 익은 모든 열매는 네 것이니 네 집에 정결한 자마다 먹을 것이라' (민18:12~13)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십일조로 그 분깃을 삼았는데 그 분깃을 ‘첫 소산’이라 하여 ‘제일 좋은 기름, 가장 좋은 포도주와 곡식’이라 했다. 가장 좋은 것을 허락한 하나님,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면 뒤의 별로 안 좋은 것들도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여기 ’맏물’은 단지 첫 번째 태어난 의미를 넘어 그 맏물이 속해 있는 전체를 대표하는 개념이다. 아울러 ’맏물’은 출애급 사건, 그 중에서도 유월절과 관련되니 십일조는 구원 사건과도 밀접한 것이다.

 

애굽 장자들이 모두 죽었을 때 하나님은 어린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장자들을 살려 주셨다. 그리고는 내가 장자들을 살려 주었으니 처음 난 것은 사람이건 짐승이건 모두 내 것이라’고 했다. '처음 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히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니라' (민3:13) 십일조에는 유월절 어린양에 의해 살아난 처음 난 것, 맏이들의 대신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여호와께서 너와 네 조상에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가나안 사람의 땅에 인도하시고 그 땅을 네게 주시거든 너는 무릇 초태생과 네게 있는 생축의 초태생을 다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 우양의 목을 꺾을 것이요' (출13:11~15)

 

2. 대속과 대표성

혹 어린양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 대신할 다른 가축물의 목을 꺾으라 하였다. 살아 있는 가축의 목을 꺾이면 죽는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를 대신할 어린양이 없었다면 우리 모두 목이 꺾여 죽을 운명이었음을 상징한다. 그러니 모든 초태생은 대속하라는 말은 곧 인간의 모든 장자들도 대속하라는 말이었다. 맏물은 어떤 것을 대표하는 대속의 효능을 지니는 바, 우리의 십일조가 그것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장자들 대신에 한 지파를 선택하여 전체 대표자로 삼았다. 그 선택 된 지파가 레위 지파였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제물로 이스라엘 대신한 대속물, 그래서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했다. 이로서 레위 지파는 기업으로서의, 즉 이 땅의 지파적 이름을 상실하게 되었다'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난 남자를 일 개월 이상으로 다 계수하여 그 명수를 기록하라. 나는 여호와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난 자의 대신에 레위인을 내게 돌리고 또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 중 모든 처음 난 것의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내게 돌리라'.(민3:40-41)

 

앞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체를 당신의 장자로 여긴다고 선언한 바 있다. 그리고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당신의 자녀로 삼겠다는 구원의 약속을 어떻게 이루어갈 것인지, 그것을 레위인들로 이스라엘 장자 삼아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모형으로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한 대속물이 하나님께 바쳐짐으로 나머지가 모두 복을 받게 되는 원리, 이것은 메시아를 통한 구원의 그림이었다'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출4:22) 이스라엘 전체를 장자라고 한 사실, 레위 지파만이 아니었다는 것, 그것은 레위 지파가 전체 이스라엘을 대표하고 있는 장자들이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레위 지파에게는 처음 난 것이 모두 하나님의 것이라는 장자의 개념과 어떤 무리를 대표하여 대속하는 맏물의 개념이 겹쳐 있다. 그 장자와 맏물 개념이 십일조의 내용이니 레위 지파는 민족의 십일조로 드려진 것이다.

 

또한 십일조는 약속의 땅에서 그들에게 은혜를 기억하라는 의도에서 명한 율법이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를 기억하는 그들을 기뻐하여 복을 주는 축복의 순환, 그것이 십일조에 담겨 있는 것이다. 레위는 그렇게 하나님이 복을 주었으며 또 줄 것의 표징으로 하나님 앞에 드려진 지파였다. 그래서 레위지파가 제사를 잘 지내면 이스라엘 전체가 약속의 땅에서 복을 받게 되고 제사를 소홀히 하거나 하나님 섬김에 성실치 않으면 이스라엘 전체가 벌을 받았다. 그러니 십일조는 하나님께 바쳐진 대속의 제물요 대표적 대속의 제사장 역할을 갖는다. 십일조가 약속의 땅에서 얻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은혜에 대한 신앙고백이듯, 레위인들이 하나님께 구별되어 바쳐진 것 또한 그 레위인들의 희생으로 온 이스라엘이 복을 받게 된다는 구원사 전체 그림이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3.  왜곡된 십일조

그렇다면 레위지파에게 바쳐진 십일조는 누구의 십일조가 포함된 것인가? 이스라엘의 십일조가 포함되었다. 그 기원은 성문화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멜기세덱이라는 하나님의 제사장, 그에게 축원을 받고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렸다. 레위라는 인물이 태어나기도 훨씬 전,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던 제사장 계급 레위 지파도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이다. 이는 레위지파에게 십일조를 바친 이스라엘도 복 받은 자로서 거기 서 있었던 셈이니 모두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십일조를 드린 자들이었다. 그러니까 그 라인에 서 있는 아브라함, 레위, 이스라엘 모두가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축복을 받은 자들이라는 말이다. 형식상으로는 제사장인 레위 집안의 아론이 받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내가 받았다라고 표현함에서 그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멜기세덱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존재였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복을 보낸다.

 

그리스도는 아브라함과 그의 허리에 있는 레위, 그리고 그 레위가 대표하고 있는 믿음의 후손인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영적 이스라엘인 오늘의 우리에게 복을 붓고 있다. 그 복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께 신앙고백으로 바치는 것이 십일조이다. 그러니 십일조는 신앙고백임과 동시에 그 자체가 나의 삶 전체를 대표하는 대속물이다. 하지만 십일조의  이 중요한 의미를 사람들이 훼손해 왔다. 구약시대에도 사람들이 자기의 유익을 따라 십일조를 눈속임으로 했었다. 사사기에 보면 십일조 의미가 무너져 레위인들이 흩어지는 모습들을 보게 된다. 흩어진 레위인들은 개인적으로 무당 노릇을 해 주고 밥벌이를 해야 했다. 십일조가 안 들어왔고 또 들어왔다 해도 저는 것, 흠 있는 것, 하자 있는 것들만 들어오니까 레위 사람들의 생계가 힘들어졌다. 십일조로 하늘 복을 주려 했던 하나님, 예수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려던 것이었는데 사람들이 그것조차도 눈속임으로 하니 통탄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라기로 구약을 닫으며 통탄하였다'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3:8~10) 그래서 진짜 십일조인 희생양 예수를 그리스도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세계라‘하면서 ’마태복음‘을 열고 마23장에서 말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있었지만 십일조 정신을 잃은 채 형식적 십일조를 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된 것인가? 소경 된 인도자들, 소명감 없는 호구직책적 성직자들 때문이었다.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를 삼키려는 사욕의 성직자들, 하루살이는 살이 없으니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지만 낙타는 살점이 많기 때문이다. 

결론

십일조의 정신이 무엇인지에는 각설하고 십일조를 해야 복 받는다고 일방적으로 가르쳐왔으니 드리는 자나 받는 자나 마찬가지이다. 그 고기 살점만에 마음을 두었기에 각자들은 자기 할 일을 다한 것으로 여겨 세속적 사람들과 똑같이 성공을 촉구하고 또 그런 것을 축복하며 살아왔다. 그러면 이제 헌금이나 십일조를 안 해도 되는가? 아니다. 이제 하나님은 십일조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요구하신다. 영생을 복으로 주셨으니 이제 우리는 영생의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예수가 우리의 십일조로 사셨기에 자발적 순종의 삶, 그것을 원하신다.

 

오늘도 믿음으로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지명하여 말씀하신다. ‘너는 내 것이라그래서 이제 내가 사는 모든 삶이 하나님의 소유이다. 하나님의 것이기에 우리는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헛된 곳에 쓸 수가 없다. 하나님이 필요로 할 때는 언제든지 내 모든 것을 내놓을 준비가 된 우리들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십자가에서 이 땅의 것과 함께 이미 죽었고 하늘의 존재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그 예수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께 전적인 순종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10%의 하나님이 아니라 내 삶을 전적으로 드리는 100%의 삶을 살고 있는가 말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23:23)

'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음에 대하여  (2) 2023.09.04
그 나라와 제사장으로  (0) 2023.09.04
축복과 헌금  (0) 2023.08.02
진짜 기독교인  (0) 2023.08.02
오늘 우리의 예배  (0) 2023.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