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8. 2. 17:50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 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막12:41~44)
헌금 설교는 참 부담스럽다. 돈을 주제로, 그것도 헌금을 주제로 설교를 하면 '저 목사가 드디어 돈을 강요하기 시작하는구나' 하고 오해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수의 목사들이 설교하기를 꺼리는 주제가 헌금에 대한 설교이다. 그러나 헌금에 대한 바른 이해는 신앙의 본질에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안이다. 그러므로 헌금에 대한 분명한 성경적 정의를 회피함은 목사로서 직무유기일 수도 있다. 하나님 앞에서 보다는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처신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헌금에 대한 분명한 복음적 메시지를 전하여 왜곡된 축복관, 엉터리 물질관을 제대로 세우는 것이 목사로서의 당연한 선포이다.
1. 헌금의 순수성
예수는 헌금에 관심이 있었다. 헌금함 맞은편에 앉아 누가, 얼마나, 어떻게 헌금하는지를 지켜보았던 것이다. 재미있는 장면이다. 예수는 무엇이 그렇게 궁금했을까? 그 예수가 보는 앞에서 여러 부자들이 헌금함에 연보를 많이 넣고 갔다. 한 과부도 자기 전 재산을 가지고 와서 헌금을 하였다. 예수는 그것이 그녀의 전 재산임을 금방 알아차렸다. 많지 않은 돈이었지만 그 여인에게 피 같은 돈이었음에도 그녀는 그것을 모두 헌금함에 넣었다. 오늘날의 금액으로 몇 천 원 정도의 적은 돈이었다. 그러나 다시 말하거니와 그것은 그녀에게 전부였다. 오죽하면 그 동전이 너무도 가벼워서 연보함에 떨어지는 소리까지 구별될 정도였다.
그 돈을 모두 헌금함에 넣고 나면 그녀의 당장 끼니는 어떻게 될까? 그것을 모를 리가 없는 예수인데 그 헌금 행위를 말리지 않는다. 상식적인 지도자라면 이 부분의 대응으로 ‘당신의 성의는 충분히 알겠오. 그 마음은 이미 받았으니까 하나만 넣고 하나는 다시 가져가시오. 가서 식구들하고 빵이라도 사서 먹도록 해요.’ 그래야 되지 않겠나? 예수 또한 그래야 사랑의 하나님답지 않은가? 그럼에도 예수는 오히려 전 재산을 털어 넣은 그 여인을 칭찬하였다. 왜 예수는 그 가난한 여인의 그 행위를 칭찬하였을까? 혹 어떤 목사는 이 이야기에서 ‘우리도 저 여인의 열심을 본받아 헌금에 힘쓰자’고 설교하기도 한다. 하기야 그렇게 결론을 내리면 목사도 좋고 듣는 청중도 이해가 빠르니 일석이조일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그런 식으로 결론 낸다면 우리는 헌금에 힘쓰는 정도가 아니라 벌어들이는 대로 모두 갖다 바쳐야 한다. 하니님이 자기 전 재산을 갖다 바친 과부를 칭찬하셨으니 말이다. 우리는 정말 그렇게 할 자신이 있는가? 아니, 정말 그렇게 전 재산 다 갖다 바치는 것이 맞는가? 꼭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이 칭찬해 주시는가? 그러나 이 가난한 과부를 칭찬한 이야기는 교회, 즉 천국 백성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계시하는 에피소드이다. 오순절날의 성령 강림 이후에 교회가 탄생했다. 그 교회는 예수의 피값으로 만들어진 교회였다. 거기에는 누룩이 들 수 없는 순수 하늘 백성들의 공동체였다. 그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큰 잘못을 범하지 않았음에도 그 자리에서 죽었던 것이다. 구약의 아간 경우나 사도행전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가 바로 그것이었다.
2. 축복의 약속
자기들 전 재산을 팔아서 교회에 모두 헌금하면서 자기들 먹을 것 조금 챙겼을 뿐인데 그것이 정말 그 자리에서 급살을 맞아 죽을 만큼 큰 잘못이었을까? 그러나 이것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의 순수성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작은 티 하나 들어올 수 없는 순결한 하늘 공동체 독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였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세상의 지역 교회가 아니다. 창세전부터 구별받은 하나님의 백성들, 즉 영적 공동체를 말한다. 그런 교회는 잡티가 들어올 수 없는 천국을 상징하는 곳이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행4:32-35)
네 것 내 것 구분 없이 전 재산을 내어놓고 서로 통용하며 살아가는 곳, 그 결과 핍절한 사람, 가난한 사람이 없는 곳, 그런 곳을 가리켜 우리는 천국이라 한다. 그 천극의 그림자로 이 땅에 교회를 준 것이다. 성령 강림으로 탄생된 초대 교회의 모습은 그런 천국 삶을 계시해 주고 있다. 사람들이 자기 생명처럼 여기는 돈, 재산을 모두 내어놓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다른 이들과 유무상통 한다는 것은 이 땅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런 것은 천국에서만 가능하다. 내 소유가 나의 힘이라고 믿는 인생들과 그런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힘이고 내 삶의 주인이라는 확신에서만 가능하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기에 성경은 그 하늘 삶의 모습을 그림자로 초대교회 때 잠깐 보여주었다.
구약 신명기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궁극적으로 들어갈 그 나라, 그 상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신15:4) 그런데 정말 그러했던가? 인류 역사상 가난한 자가 없었던 때가 과연 있기는 했던가? 없었다. 잠깐 동안도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분명하게 여기 이렇게 말씀을 통하여 약속하였다. 당신의 말씀만 듣고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복을 받아 가난한 자가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럼에도 왜 역사 속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던 때가 없을까? 하나님이 식언을 한 것일까? 기록자가 오류를 한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명령을 모두 지켜 행한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3. 나를 드림
그런데 신약 한 모퉁이에 정말 그런 공동체가 있었다. 교회였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말한 대로 그 말씀과 명령을 모두 지켜 행한 누군가가 있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다 지켜 행한 이, 그가 누구일까? 그런 사람이 있었기에 진정 가난한 자가 없는 공동체가 생긴 것이다. 예수라는 그리스도, 그가 하나님의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고 하늘 공동체를 탄생시켰다. 그로 인해 탄생한 공동체에서는 모든 자들이 자기의 전부를 내놓고 서로 나누었다. 그곳에서는 경제 약자가 없었다. 그것이 유무상통하는 초대교회의 그림이요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이다. 하늘 백성들의 공동체 모델로 잠시 그려진 그 그림 속에 우리 또한 들어 있다. 교회가 된 우리는 경제 약자가 없는 그 공동체 속에 들어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도 교회에 내 모든 것을 팔아서 갖다 바쳐야 하나? 예수가 전부를 바친 이를 칭찬함, 그것이 오늘에는 어떤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나?
구약시대에는 성전에 제사 지내러 갈 때 반드시 제물을 가지고 나갔다. 그 제물에 자기 죄를 전가시켜 태움으로 죄가 사해지는 율법의 내용, 그 규정에 충실하기 위함이었다. 그 제물은 속죄양으로서 장차 우리 죄의 대속자로 와서 죽을 메시아를 상징하였다. 그렇게 구약의 제물이 올 메시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면 신약시대의 헌금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그것은 이미 온 메시아를 상징한다. 인간으로 와서 하나님 말씀을 완벽하게 듣고 지켜낸 이, 우리를 사망에서 건져내는 제물로서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 그것이 헌금이다. 그러니 헌금을 드리면서 구제 사업이나 교육 사업에 일조한다는 생각은 헌금이 아니다. 헌금은 메시아로 인해 죄 사함을 받고 의롭게 되었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고백인 것이다. 헌금이 이미 온 예수를 뜻한다면 나의 헌금은 내 안에 들어온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뜻한다. 나와 예수가 연합되어 하나님께 드려짐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헌금으로 바치는 그 예수 안에 나 자신이 들어있다.
결국 헌금은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림이다. 저주로 죽을 나를 생명의 속전인 은 30에 팔린 예수가 내 속전으로 죽어 나를 살렸다. 이제 나는 예수 것이니 더 이상 ‘나’라는 존재의 내 것이란 소유권을 주장할 수도 없다. 그렇게 하나님께 ‘나’를 모두 드리는 것을 성경은 순종이라고 부른다. 그 순종의 삶에서 헌금이 나오고 자기를 비워 남을 살리는 사랑과 헌신도 나온다. 그러니 헌금은 액수의 많고 적음이 중요치 않다. 예수라는 제물에 의해 내가 구원되었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그 정신을 제대로 깨닫고 실행에 옮긴 이들에 대하여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마케도니아 교회 교인들의 헌금을 예로 들었다. 그 마게도냐 교인들의 상황이 어떠했던가? 그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 있었고 극한 가난에 시달렸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풍성한 연보를 했다.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했다.. 제발 우리도 그 연보에 동참하게 해 달라고 바울에게 간구를 했을 정도였다.
결론
이 가난한 사람들이 이 땅에서의 자기들 안위를 걱정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그들의 관심은 이미 이 땅의 것들에 있지 않았다. 그들의 소망은 이미 하늘에 자리하고 있었기에 힘껏 드릴 수 있었다. 그렇게 드리고도 아깝지 않았다. 내가 하나님의 소유가 확실하다면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니 아까울 게 없다는 것, 그런 신앙고백의 표현이 헌금이다. 이런 신앙고백은 하나님이 주는 믿음에서만 나올 수 있다. 헌금은 거지 동냥 주듯이 교회에 와서 주머니 것을 털어 주는 것이 아니다. 신앙고백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림, 그것이 헌금이다.
이런 고백 없이 소액 투자하고 많은 배당금을 받을 심산으로 헌금하는 사람들과 ‘나는 하나님의 것이니 나를 드립니다’는 고백으로 헌금을 드리는 사람들, 성경은 전자를 가리켜 ‘적게 심는 자’라 하고 후자를 가리켜 ‘많이 심는 자’라 한다. 헌금을 적게 하면 적게 보답하고 많이 하면 많은 것으로 보답한다는 엉터리 해석들이 난무 하는 현실이다. 하지만 믿음에 근거하지 않고 헌금하는 이들은 풍성한 천국과는 상관없는 인색한 인생을 산다. 그 믿음으로 자신을 드리는 헌금자들은 이미 천국을 살고 있으니 풍성한 삶의 여유가 바로 이런 이들의 것이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게 복을 주시리니 네가 여러 나라에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하겠고 네가 여러나라를 치리할지라도 너는 치리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신15:4~6)
'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나라와 제사장으로 (0) | 2023.09.04 |
---|---|
10퍼센트의 하나님 (0) | 2023.08.02 |
진짜 기독교인 (0) | 2023.08.02 |
오늘 우리의 예배 (0) | 2023.08.02 |
그리심산과 시온산 (0) | 2023.07.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