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8. 2. 15:47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의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지리라' (사29:13~14)
바리새인들은 유대인들 중에서도 대단한 민족주의자들이었다. 로마와 헬라 문화로 퇴색되어 가는 민족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 했던 이들이었다. 이들은 자기들을 로마의 압제에게서 구원해 내 줄 메시아를 기다렸다. 그 기다림으로 하나님 앞에 목숨을 내놓고 살아왔다. 그런 그들이 예수에게서 큰 모욕을 당하였다. 대체 왜 예수는 그들을 ‘독사의 새끼’라고 욕했을까? 그리고 경건한 삶으로 메시아를 기다려 왔던 그들은 왜 메시아로 온 예수를 죽였을까? 외식이 문제였다. 외식은 겉과 속이 다른 것을 말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뜻은 더 깊다. 집에서 늘어지고 싶은데 참고 예배에 나온 것도 실은 겉빠속촉, 즉 외식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것을 외식이라 않고 ‘성실하다’고 한다. 속으로는 밉지만 참고 미소로 대하는 것을 사람들은 외식이라 하지 않고 ‘인내’라 한다.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열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병폐를 보았는데 그것이 외식이었다.
1. 예수가 정말 싫어해
외식은 단순히 겉과 속이 다른 것만을 말함이 아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외식은 무엇인가? 예수는 자신이 '죄인들을 위해서 이 땅에 왔노라'고 당신 입으로 천명한 바가 있었다. 그러기에 세리의 친구가 되었고 간음한 여인도 용서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죽는 순간에는 강도에게까지 구원을 허락하셨다. 그러한 예수였음에도 유일하게 참지 못하시고 분노를 발하셨던 대상자들이 있었다. 바로 외식하는 인간들이었다. 모든 사람, 어떤 죄도 용서할 수 있었던 분이 유독 이 외식에 대해서만은 불같이 화를 냈다. 그런 이들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치욕스럽게 여기는 뱀, 그것도 독이 있는 ‘독사의 새끼’라고 폭언을 일삼았다.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심판을 피하겠느냐?' (마23:33) 유대인들에게 뱀이 동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새삼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그 저주스러운 욕을 바리새인들에게 퍼부은 것이다.
도대체 외식하는 것이 무엇이기에 예수가 이렇게 화를 내셨을까? '바리새파 사람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운향과 온갖 채소의 십일조는 바치면서 정의와 하나님께 바치는 사랑은 소홀히 한다. 그런 것들도 소홀히 함이 없이 하고 이것들도 반드시 해야 한다. 바리새파 사람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한다. 너희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드러나지 않게 만든 무덤과 같아서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그것이 무덤인지를 알지 못한다.' (눅11:42~44) 겉으로 보기에는 경건하게 종교적으로 살고 율법 명령들을 지키는 것 같지만 그 본심이 다른 것에 있었던 당시의 종교 엘리트들의 행태를 비판하여 비유한 말이다. 하나님이 보시는 믿음은 내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 있음을 예수의 비판에서 읽을 수 있다.
'죄'라는 것은 형태나 양상이 아니다. 경향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리에서 자기 외의 사람들을 아래로 보려 하고 다수의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는 경향들, 그 방향들, 의도들이 죄인 것이다. 거룩한 종교행위, 선한 삶일지라도 그 같은 경향에서 출발한 것이면 그것이 외식이요 그것이 ‘자기 의’이니 죄인 것이다. '너희는 남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일을 사람들 앞에서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한다.' (마6:1) 종교행위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양상으로 나타나는 구제, 기도, 금식을 들어 ‘외식’을 경고한 것이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네 앞에서 나팔을 불지 말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네 상을 이미 다 받았다.' (마6:2) 불쌍한 이를 보면 도와주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마음에서 나오는 측은지심은 좋은 일이지만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한 의도로 행해졌다면 그 또한 외식이다. 성경은 그런 행위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행위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2. 남의 시선이 그렇게 중요해?
어떤 이는 장로가 된 후부터 새벽기도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나갔다고 자랑하였다. 실은, 장로씩이나 되어 새벽기도도 안 나온다고 흉볼까 봐 한 번도 못 빠지겠더라는 것이었다. 참 불쌍한인생이다. 그것은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기를 또 다른 율법으로 묶어놓은 무지이기 때문이다. 그 새벽마다 얼마나 힘들어하면서나왔을까? 다른 사람들 앞에 체면과 위신을 위해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행하는 것이 외식이다. 어떤 이상한 교회에는 ‘기도에 은사가 있는 자’라고 소문을 내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자기 기도를 받아야 일이 잘 풀리고 가정도 평안하며 병도 낫는다고 내세워 강조한다. 정말 기도를 아는 사람일까? 기도가 무엇인가?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 맡김이다. '하나님, 도와주지 않으면 가망이 없습니다’ 하고 하나님을 향한 간청인 것이다. 자기가 할 수 있으면 기도보다는 열심히 연구하고 수고할 일이다.
그런데도 자기 기도는 응답이 보장되는 것인 양 말하는 이들은 아직 유아적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한 신앙인이다. 마가복음 9장에는 벙어리 귀신이 들린 아이 이야기가 있다. 예수께서 제자 세 명을 데리고 변화 산에 올라갔었다. 그때 산 아래에서는 벙어리 귀신 들린 아이 부모가 제자들에게 그 귀신을 몰아내달라고 왔다. 제자들은 아이에게 든 귀신을 쫓아내려고 이것저것 할 수 있는 것을 다해 보았다. 하지만 귀신이 나가지 않았다. 잠시 뒤 내려온 예수가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류가 나가지 않는다’며 귀신을 쫓아냈다. 예수의 이 장면을 모방하여 어떤 이는 ‘기도만 하면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며 귀신 축출에 일가견이 있음을 광고하기도 한다. 그런데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려고 했을 때 정말 기도를 한 번도 안 했을까? 아마도 여러 번 해보고 또 해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무엇을 놓쳤을까? 예수가 여기서 말하는 기도와 금식은 어떤 것인가?
진짜 기도와 진짜 금식이 따로 있다는 말인가?
죄는 형태나 양상이 아니라 경향성임을 이 사건에서도 볼 수 있다. 제자들은 예수가 없을 때 자기들이 예수 다음 서열임을 자랑하고 싶었다. 자기들이 귀신을 쫓아냄으로써 그 예수 못지않은 존재임을 사람들 앞에 인정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귀신을 쫓아 내달라는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셨다. ‘나는 무익한 종이요 하나님만이 만유의 왕이십니다.‘라는 고백이 전제되지 않는 기도는 허공에 날리는 꽹과리 소리일 뿐이요 능력이 나올 수 없다는 말이다. 기도를 통해 나를 자랑하겠다는 시도는 기도에 대한 언어도단인 것이다. 겸손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고 자기 자신들을 나타내기 위한 기도는 이미 기도가 아니다. 그런 기도는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자기 놀음일 뿐이다. 오늘날에도 그런 인간 군상들을 교회에서 심심찮게 본다. 자기가 기도해 줘서 응답받았다 자랑하는 이들, 그런 이들은 기도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얼치기들이다.
3. 인정을 받고 싶어서
어떤 이들은 금식까지도 은근히 자랑으로 내세운다. 자신의 경건함, 그 척도를 좀 알아봐 달라는 뜻이다. 기도원에 가보면 단체 숙소에 그런 사역자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어떤 이가 자랑삼아 ‘난 3일째 금식 중’ 하니까 그 옆의 사람이 비웃는 듯 ‘겨우? 난 일주일째 금식 중’이라 하였다. 그때 피골이 상접한 건너편 사람이 담요를 걷고 가소롭다는 듯 일어서면서 ‘난 40일째’ 하며 나가더라는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는 새삼스러운 이야기도 아니다. '너희는 금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슬픈 기색을 나타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남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보기 싫게 한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가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마6:16) 엄밀한 의미에서 금식이 무엇인가? 곡기를 끊고 하나님을 협박하여 응답을 받아내는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자해이다. 금식은 그런 것이 아니다. 먹을 것을 끊는다 함은 ‘내 손으로 해결할 수 없으니 하나님의 도우심만 구한다’는 의미이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면 밥 많이 먹고 힘내서 이루어 내야지 왜 밥을 굶고 있는가?
설령,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에 내 원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제까지 이 땅에서 내가 양식으로 여겨왔던 것들에 눈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기뻐하는 것만을 나의 양식으로 삼겠다는 고백, 그것이 금식이다. 거기에다가 하나님 앞에서의 못난 자신, 약하여 또 범죄 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슬퍼하며 애통함이 금식인 것이다. 금식은 하나님을 알아 그 하나님을 최고의 기쁨으로 삼는다는 신앙고백의 행위라는 말이다. 너희가 다투고 싸우면서 금식을 하는구나. 이렇게 못된 주먹질이나 하려고 금식을 하느냐? 너희의 목소리를 저 높은 곳에 들리게 할 생각이 있다면 오늘과 같은 이런 금식을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겠느냐? 이것이 어찌 사람이 통회하며 괴로워하는 날이 되겠느냐?’ 머리를 갈대처럼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깔고 앉는다고 해서 어찌 이것을 금식이라고 하겠으며 주께서 너희를 기쁘게 반기실 날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들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사58:4~7)
자랑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어서 열심을 내는 종교 행위는 필경 하나님 앞에서도 당위성을 따질 인생들이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기적을 일으켜 병자를 고쳤는데 왜 날 모릅니까?‘ 자기 행위를 내세워 하나님께 따지는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독사의 새끼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 심히 모욕적인 말이면서도 무시무시한 말이다. 목숨 걸고 율법 지켜 살아왔지만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경향성, 그런 방향으로 행하였으니 문제였던 것이다. 내 자랑을 위해서 남을 깎아 내리고 내 깨끗함을 내세우려 다른 이의 허물을 지적하며 내 행복을 더 빛내기 위해 다른 이의 불행을 고명으로 얹으려는 인생들의 양상이 그러하다. 기독교는 왕이 되고 싶어 했던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이다. 자기를 자랑하던 삶에서 하나님을 자랑하는 삶으로 바뀌어 나가는 것, 바로 그런 것이 축복임을 아는 이들은 천국의 원리인 십자가적 인생을 산다.
결론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그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오늘의 우리에게 예수는 묻는다. 묻는 그 예수는 빛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하늘을 볼 줄 모르는 오늘의 인생들은 어떻게 대응할까? ‘저 태양 때문에 내 횃불이 빛이 나지를 않는다‘ 이것이 2000년 전 종교 엘리트들이 예수를 살해한 동기였다. 예수가 그토록 싫어했던 외식은 다른 것이 아니다. 내 생색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 그것이 외식인 것이다.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막7: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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