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의 예배

2023. 8. 2. 14:04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창22:7~9)

 

오늘날 전국적으로 드리는 예배들, 정해진 시간과 약속된 장소에서 신자라 하는 이들은 예배를 드린다. 예수가 제물로 바쳐져서 우리를 구했으니 그 구원받은 자의 자격과 고백의 예식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예배는 우리가 예수의 성품으로 하나님 앞에 제물로 되돌려 드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예수의 삶은 어떠했던가? 죽기까지 순종하는 삶이었고 감히 하나님 아버지에게 도발하지 않는 삶이었다. 바로 그런 삶을 예수로 인해 하늘 백성임을 확인한 우리들 요청하는데 그 요청에 대한 응답과 확신의 충전으로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또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1. 삶으로의 예배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전체 계명의 핵심이다. 예배는 바로 그 핵심 계명에 순종하여 내 삶을 하나님께 드림을 확인함이다. 이는 강요가 아니었다. 예수로 다시 태어난 우리이기에 나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게 되어 있다. 그렇게 성전이 되어 일상의 삶을 예배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음을 이미 예수가 앞서 보여주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3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2:19~21) 성전 된 우리의 실체가 이렇게 예수 안에서 미리 보인 것이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그 성전이다. 성전이었던 예수가 어떤 제사를 드렸던가? 아니 어떤 삶을 살았던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이 모습이 예수의 삶이요 예배였다.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했던 삶, 그런 삶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성전의 모습이니 오늘의 우리 삶에서도 이 예배가 나오는 것이다. 예수 이전까지는 제사의 모형과 그림자를 통해 예배를 계시 하였다. 그러나 그 실체인 예수가 우리 제물이 되고 제사장이 되어 제사를 모두 드렸다. 그러니 우리는 그 예수의 실체인 십자가를 근거로 예배를 드린다. 그 예배는 그리심 산이나 예루살렘 같은 장소적 형식적 성격이 아니다. 당신 자신을 제물로 드렸던 예수의 삶, 그처럼 우리의 삶으로 드려지는 것이어여 한다. 그래서 오늘의 우리가 드려야 할 신령과 진정으로의 예배에 대해 바울이 이렇게 정의하였다.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12:1~2) 하나님의 지성소가 되어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된 우리이기에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일 필요가 없다. 어쩌면 그래서 예수 부활 후 교회가 탄생하자 예루살렘 성전이 지금까지도 복원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실상, 예수로서 탄생된 교회는 예루살렘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으로 흩어지는 교회였다. 하나님의 거소가 된 우리는 이제 성전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성전인 자신으로부터 은혜와 사랑을 내어놓는 존재들, 오늘의 예수가 된 것이다. 우리는 거듭난 자들의 삶으로 성령에 의하여 전인적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2. 형식으로의 예배

그렇다면 우리들이 주일마다 모여서 드리는 교회에서의 예배, 장소적 개념의 예배도 이제는 수정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여전히 구약의 제사 때처럼 시간과 공간에 매여 형식화된 예배는 형행화되기 쉽고 의전이나 의식에 빠질 수도 있다. 그 예배 시간과 예배당 건물만 빠져나오면 교인들이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사는 것, 여전한 세속적 가치관으로 살고 있는 모습들에서 시공간적 예배에 대한 집착과 미련을 이제는 제고해야 할 때이다. 사실 그런 예배는 그림자요 모형으로 주어졌던 구약 시대의 제사 드림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예수로, 믿음으로, 복음으로, 말씀으로, 생활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아직 진리라는 실체, 즉 그리스도가 오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이 땅의 것들로 수단과 방법 삼아 예배를 드리게 하였다. 그러니 그 제사, 그 예배에는 제물도 있어야 했고 감정을 자극하는 찬양단도 있어야 했으며 모인 이들의 분위기를 인위적으로 만들기 위한 엄숙함도 있어야 했다.

 

오늘의 대형교회 예배를 떠올려 보면 바로 그 모습이다. 대규모의 찬양대와 연주자들, 대리석의 성전 외부와 화려한 카펫의 내부, 그리고 벽면의 파이프 오르간, 그야말로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 성전, 그 예배들은 단지 모형이요 그림자였을 뿐이다. 예수라는 실체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였다. 2000년 전에 실체가 왔고 그 실체가 오늘날 우리 안에 성령으로 함께 하고 있다. 그래서 믿음이 생겼기에 이제는 이 땅 것들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충분히 감격스럽다. 인위적 엄숙과 경건을 만들지 않아도 일상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경외심을 갖는다. 그러한 이들이 모여서 찬양과 말씀을 나누는 자리가 오늘의 삶이요 그 고백이 현장 예배임에도 오늘 교회들에서 드려지는 예배 행태들은 어떠한가? 실체가 오지 않았을 때 쓰여졌던 방법과 수단들이 그대로 쓰여지고 있지 않은가?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기 위해 도를 넘게 치장한 성가대나 밴드들, 오케스트라들, 심심치 않도록 영화관 수준의 멀티미디어를 사용하고 심지어 연극까지 가미하기도 한다. 목사의 설교는 짧고 재미있으며 신선해야 환영받는 현실, 예배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다. 그런 예배에 길들여지면 예배 감성이 어떻게 될까? 그 예배 시간에 자신이 무엇인가를 느껴야 직성이 풀리게 된다. 그리하여 자기를 감동시키는 것에 실패한 예배는 예배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인간의 감정과 만족에 의해 판단되는 예배가 과연 하나님 앞에서도 맞는 예배일까? 정말 하나님도 그런 예배를 원하시고 또 흡족해하실까? 분명한 것은 예배는 드리는 이의 만족을 위함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여 인간을 설득하는 쇼도 아니고 이벤트는 더더욱 아니다.

 

3. 오늘의 예배

오늘의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떠한 예배를 드려야 하나? 아니 하나님 앞에 준비된 예배는 어떤 것일까? 준비된 예배라는 말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청년 시절, 매주 거르지 않고 들었던 목사님의 헌금 기도가 잊히지 않는다. 빈손으로 나오지 않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혹 빈손으로 온 자라도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다음에는 빈손으로 오지 않게 하소서빈손으로 나온 이들이 듣기에 매우 거북한 헌금 기도였기에 시간이 지난 요즘에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런데 실제로 성경에 그런 구절이 있었다.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 (출23:15) 그러니까 예배 때는 반드시 하나님께 무엇을 가져와야 했던 것이다.

 

무엇을 가져오라는 것인가? 대속 제물을 가져 와야 했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드시 대속 제물에 의지하여야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 죄에 대한 대속 제물은 어린양 예수로 이미 하나님께 드려졌다. 오늘의 우리는 그 사실을 믿는 믿음 하나로 하나님 앞에 선다. 그렇게 이미 드려진 예배의 제물은 하나님이 준비했던 것이지 우리가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 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창22:7~8)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에서 준비물은 하나님이 준비하신다. 우리는 믿음에 근거한 그 배려에 감사한 마음으로 나오면 된다'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창22:13~14) 오늘의 우리는 그 은혜의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예배에 임하고 또 그 예배로의 삶을 산다. 그것이 성령 받은 자들이 드리는 오늘의 예배이다. 하나님이 준비한 제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말씀들, 그 아래 선 우리는 은혜로 감사하여 이제는 내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 내 이익을 위해 남에게 해를 끼치는 삶이 아니라 나를 희생하여 남의 유익을 구했던 예수의 삶을 살게 된다. 그것이 오늘 우리들의 예배요 삶이다.

 

결론

거듭 말하거니와 예배는 형식이나 방법의 차원이 아니다. 한 인격과의 만남이고 그 인격의 드러남이다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히13:15~16)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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