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하는 인생들

2023. 7. 21. 20:23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오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이튿날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출32:1~6)

 

모든 인간들은 예배하는 존재들이다. 각기 다른 신을 부르며 각양 다른 형식으로 자기들의 신에게 예배를 드린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이들의 예배에서 공통된 목적은 자기 갈증을 해갈하기 위함, 곧 자기 이익에 있다. 인간들의 목마름이 그렇게 여러 모양의 예배로 나타나는 것이다. 애당초 인간은 자기를 지은 창조자를 의존하여 살도록 만들어졌다. 그러니 창조자 하나님을 비워낸 빈자리는 늘 갈급함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 목마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만 채워질 수 있는 갈증이다. 문제는 눈이 멀고 귀가 먹었기에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인지 못하고 인지 못하니 찾으려고도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에 인간들은 세상의 것들로 그 목마름을 채우려 하였다. 그 하나님이 빠짐으로 생겨난 갈증이 엉뚱한 방향으로 변이를 하였으니 곧 , 명예, 이성, , 마약, 도박, 취미, 운동, 우상, 인기, 철학 등이었다.

 

1. 갈망,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과 예수의 만남에서 등장하는 다섯 명의 남편, 그리고 한 명의 동거남은 죄에 오염된 우리 인간들의 잘못된 해갈 방식의 한 예로 제시된다. 하나님은 왜 인간들에게 목마름을 남겨 두셨을까? 그리고 우리 인간들은 왜 목마름으로부터 벗어나려 할까?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사49:14-15) 이미 하나님은 패역한 이스라엘을 향해 사랑을 쏟아붓고 싶어 했었다.그들을 향해 얼마나 은혜를 내리려 했는지 이 시에서는 물론, 모세의 율법서에서도 절절히 느껴진다'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출20:3-5)

 

질투하는 하나님, 여기 ‘질투하다‘는 신약에서 ’열심‘이라는 뜻으로도 쓰였다'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요2:17)  즉, 질투하는 하나님이란 표현은 우리를 향하여 열심을 내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질투하는 대상이 누구일까? 바알? 아세라? 정말 그런 신들이 있을까? 결단코 그런 신들은 없다. 다만 우상일 뿐이다. 우상은 인간들이 자기 욕심을 채우고자 만들어 놓은 것이기에 실체가 없다. 따라서 하나님이 질투한다 함은 우리에게 사랑과 은혜를 쏟고 싶어 하는 열심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향해 목이 마르다. 그래서 그의 피조물인 우리도 목이 마르다. 우리가 그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하나님의 갈증이 해갈되고 우리의 갈증 또한 해갈될 것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엉뚱하게 세상의 것들로 그 해갈을 추구하였다. 그 잘못된 갈망,  변질된 해갈 중 그릇된 예배도 한 형태였다. 그래서 예수의 이야기가 내가 목이 마르니 물 좀 주겠는가?’물 이야기에서 남편 이야기, 남편 이야기에서 예배 이야기로 전개시켜 나간 것이다.

 

사실은 한 개인의 잘못된 해갈 추구, 그 변질된 갈증과 갈망 추구에서 전 인류에게로 오도된 해갈 추구로 야기되었다. 예수는 내가 목이 마르다라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목마른 이유, 채우고 채워도 허한 우리 갈급함의 정체를 드러냈다. 그리고당신이 그 목마름으로 죽어 우리에게 해갈을 선물하겠노라는 의지를 암시하였다. 아울러 수가성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수를 약속하는 말씀을 통해 우리의 해갈 방법이 크게 잘못되어 있음을 알게 하였다. 여인에게 남편을 데려오라는 도발을 통하여 그녀의 잘못된 해갈 방법을 폭로하는 장면은 곧 우리 인간들의 잘못된 해갈 방법의 구체적 양태를 들추어냄이었다. 그 잘못된 해갈 방법이 인류에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만연되어 있는지를 지적한 것이다. 그 인간들의 잘못된 갈망 중에서도 악한 갈망의 변이가 바로 예배, 그릇된 예배라는 것, 사람 중심의 예배요 드리는 당사자 중심의 예배라는 것을 지적하였다. 어떤 이들은 예배라 하면 교회에서 드리는 기독교적 형식만을 떠올린다. 하지만 실상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예배를 드리며 살고 있다.

 

2. 삶의 중심, 그 속의 예배 

영어에서 '예배'를 뜻하는 단어는 'worthship'이다. 이는 '가치'라는 뜻의 ‘worth'와 '기본, 바탕'이라는 뜻의 'ship'이 합해진 용어이다. 즉,  '가장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자기 삶 중심에 두는 것'이 예배라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불교인들도 예배를 드리는데 그 예배를 예불이라 한다. 이슬람교도들도 그 나름 알라를 예배하는데 하루 다섯 번씩 시간을 정해놓고 메카를 향하여 절을 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우리 기독교인들이 부끄러울 만큼 정성을 다 한다. 힌두교인들도 그들의 신을 예배하고 심지어 무신론자들도 자기 삶의 한 양태로 예배를 드린다. 이렇듯 모든 인간들은 자신을 가장 가치 있는 자리에 올려놓고 자기를 예배하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모든 종교들이 자신을 예배하는 것이다. 세상 종교들은 지금의 자기보다 더 나은 자기를 만들거나 상승시키기 위해 힘 있는 어떤 존재의 도움을 청하는 수단이었다. 그러기에 그들이 섬기는 것은 결국 그들이 부르고 섬기는 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인 것이다.

 

죄로 오염된 인간들이 각기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르며 각기 다른 양식의 예배를 드리지만 그들의 공통된 목적은 자신의 목마름 타계를 위한 자기 유익이다. 그 해갈을 위한 여러 양식들이 예배라는 양태로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타락한 인간의 대표로 등장하는 가인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자로 묘사됨에는 인간의 예배가 그 같은 인간성에 근거하고 있음을 고발하여는 것이었다. 그렇게 죄에 오염된 인간은 자기 이익이나 자기 자랑을 위하여 스스로에게, 혹은 우상에게 예배하는 존재이다. 그런 이들의 예배는 그 목적도 자기 노력과 헌신을 통해 절대자에게서 얻어내려는 거래인 경우가 다반사이다. 성경은 그런 행태를 가리켜 우상 숭배라 하였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출20:4)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출32:1)


우상이라는 것의 전제, 그것은 
'자기를 위하여‘이다. 즉 자신을 위하여 만들어 낸 것은 모두 우상이라는 말이다. 모든 인간들은 자기 갈망과 욕심을 위해 무엇인가에게 예배를 드린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런 양상의 우상 숭배를 ‘탐심’이라고까지 정의하였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골3:5) 원래 인간들은 하나님을 가장 가치 있는 자리에 올리고 그분께 전적으로 의뢰하며 살아야 할 존재였다. 그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찬양하며 예배하는 존재, 그것이 하나님의 인간 창조 목적이었다. 예배는 그 사실, 그 창조 목적을 상기시키고 확인시키는 자리요 시간이었다. 그 예배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 타락한 삶의 실체를 들여다보게 하고 그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겪게 하여 은혜로 구원하는 역사를 경험시켜 우리로 더욱 진정한 예배의 자리로 이끄는 것이다. 하나님은 긴 시간을 통하여 당신의 은혜를 떠난 인간들의 죄와 악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인간들에게 자기 갈증 해갈하기 위해 만들어 온 모든 것들의 허망함도 들추어냈다.

 

3. 예배, 과연 하나님이 받으실까?

인류가 이루어 온 과학, 문명, 학문, 종교 등 그 어떤 것도 인간들의 목마름을 완전히 해갈할 수는 없다. 심지어 하나님으로부터의 직접적인 율법을 받았던 민족조차도 그 받은 바의 율법을 지켜내지 못했다. 인간들은 행복할 수 있는 방법만 안다면 자신들 힘으로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도 세상 사는 방법, 이기는 처세를 제시해 주면 한번 그렇게 해 보겠노라고 머리를 쳐들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준 율법은 인간들을 구하지 못했다. 아니, 구하기는 커녕 그들의 죄악상과 한계만 더 낱낱이 드러냈다. 하늘 백성들은 그런 인간 세상의 역사에서 자신들의 한계와 본질을 보는 이들이고 하나님의 크심을 깨달아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이다. 그러한 자들이 모여 사는 곳을 천국이라 한다. 그러면 이 땅에서 그런 우리들이 지향해야 하는 진짜 예배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이 바른 예배와 우상 예배의 모습을 처음으로 설명해 준 곳이 창세기 4장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2~4:7)  3장 말미에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흙을 경작하도록 명하셨다. 그런데 그 ‘흙’을 묘사하는 형용사‘근본 된’이라는 단어, 그러니까 아담이 경작해야 할 땅이 흙이었다. 아담의 근본인 흙, 그 말인즉 ‘너는 신이 아니라 흙에서 근본 된 자’임을 직시하라는 것, 신이 아닌 흙이 하나님처럼 되려 했던 그 죄를 회개하라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 바로 뒤에 이어지는 것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였다. 하나님이 정성 담긴 피 있는 제물을 원했는데 가인의 제사에는 피가 없었기에 열납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제물 종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 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3~7) 하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 예배를 정의하는 것이다. 그러니 3장 말미와 4장의 이야기를 붙여서 읽어야 한다. 하나님은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나서 흙을 경작하게 된 일, 당신 명령에 순종하지 못했던 일을 회개하며 살았기에 아담의 제사를 열납 하였다.. 그 아버지 아담의 회개와 인간이 한계를 알고 그 경계를 지켜 온 아벨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열납 한 아벨의 제사를 단지 ’제사’라 않고 ’아벨과 그의 제사‘라 하였다.

 

결론

아벨이 드린 제물이나 제사 형식이 훌륭했기에 그의 제사를 받으신 것이 아니었다. 인간 한계를 인정하고 자신이 세상 주인으로 살려는 삶은 죄라는 인식 아래 드린 제사, 그런 제사였기에 하나님은 그의 제사를 기뻐하며 받았다. 반면에 가인의 제사는 자기 의를 드러내고 자신 유익을 목적으로 했던 가짜 예배였다. 그 결과가 죽음으로 드러났다. 하나님을 자기 유익 추구로 삼는 사람들, 그런 이들은 그분을 의뢰하여 그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죽인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에서부터 이 이치는 이미 정해진 것이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진짜 예배는 자신을 우주의 중심에서 끌어내리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피조물임을 인정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겠노라고 나선 자들의 모든 행위가 예배이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골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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