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7. 22. 11:14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거기서 살며 또 거기서 나가서 부느엘을 건축하고 그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 제사를 드리고자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된 그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숭배함이더라 저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팔월 곧 그 달 십 오일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 지은 산당의 제사장은 벧엘에서 세웠더라' (왕상12:25~32)
선거 시즌이면 정치인들이 사찰을 방문한다거나 또는 교회당에 참석하여 친절하게 예배까지 드리는 작태들을 본다. 지난주에는 서울 시내에 자리한 대종교단에서 합장을 하고는 이번 주에는 대형 교회 예배에 나와 경건한 코미디를 연출하는 인간들, 하나님은 그런 인간들과 그런 경건 코스프레를 어떻게 보실까? '이것들 정말 예배를 어떻게 알고!' 하기야 정치권력의 향배를 놓고 교회를, 아니 그 예배를 자기들의 지지 수단으로 삼아왔던 일들이 어제오늘의 일들은 아니었다. 민심을 자기들에게 돌리기 위해, 또는 유리하게 하기 위해 그들의 신앙 장소를 방문하는 것, 특정 시간대를 굳이 선택하여 눈도장받으려는 군상들의 탁한 동기들, 그런 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그런 이들의 방문으로 자기들의 정통성과 세력을 은근히 내세우는 대형 교회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볼까? '이 같잖은 쓰레기들이 정말 놀고들 있네! ' 마루어 짐작해 본 하나님의 마음이다.
1. 그리심 산의 예배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요' (요4:20)사마리아 여인이 예수에게 말한 예배의 산은 그리심 산이었다. 북이스라엘의 사마리아인들은 남유대인들 사이에는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벽이 있었다. 남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짐승 취급하면서 예루살렘 성전 접근을 막자 자기들 나름대로 그리심 산에 예배처를 짓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려왔었다. 그리고는 그리심 산에 있는 성전이야말로 진짜 성전이라 신념하고 주장해 왔다.. 사실, 하나님도 특정한 한 장소에서만 예배를 받으시겠다고 말씀하신 바가 있었다.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 거하게 될 때 또는 여호와께서 너희로 너희 사방의 모든 대적을 이기게 하시고 너희에게 안식을 주사 너희로 평안히 거하게 하실 때에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한 곳을 택하실 그곳으로 나의 명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곧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 서원하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 (신12:10-11) 이렇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성전은 한 곳이어야 했다. 그래서 양 지역 사람들은 서로 자기들 성전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곳이라고 우겼다.
사마리아인들이 그리심산이 하나님이 지정하신 예배의 장소라고 여기게 된 배경은 또 있다.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창12:6-8) 아브라함이 세겜에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린 것을 근거로 자기들 제단이 참 제단이라 여겼다. 또한 이스라엘의 시조 야곱도 세겜에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린 것까지 증거로서 내세웠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 앞에 그 장막을 치고 그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일 백 개로 사고 거기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하였더라' (창33:18-20)
이스라엘이 여리고 함락 후 가나안에서 치른 첫 번째 전쟁인 아이 성에서의 전쟁, 그 전쟁에서 이긴 뒤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린 곳도 사마리아의 에발 산이었다.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단을 쌓았으니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한 것과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단이라.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와 화목제를 그 위에 드렸으며 여호수아가 거기서 모세의 기록한 율법을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그 돌에 기록하매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유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이왕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한 대로함이라.' (수8:30-33) 예루살렘에 지어진 성전은 그로부터 500년 후인 솔로몬 때였으니 사마리아인들의 정통성 주장은 일리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했던 모리아 산 또한 그리심 산이었기 때문이다.
2. 시온 산의 예배
그러나 성경은 북이스라엘이었던 사마리아 땅에서의 예배처를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땅에 지어진 예배처의 역사와 계보를 밝힘으로 하여 그 예배처가 우상 숭배지의 표본이었다고 못 박았다.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거기서 살며 또 거기서 나가서 부느엘을 건축하고 그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왕 된 그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숭배함이더라. 저가 또 산당 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팔월, 곧 그 달 십 오일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 지은 산당의 제사장은 벧엘에서 세웠더라.'(왕상12:25-32)
북이스라엘이 시온 산이 예루살렘 성전을 무시하고 자신들 땅에 성전을 지은 것은 포로 이후에 처음 있었던 일이 아니었다. 이미 그 이전에도 있었던 일이었다. 솔로몬의 신하였던 여로보암이 그 치하에서 힘들었던 백성들을 혹세무민 하여 흔들었다. 성전을 짓느라 세금을 많이 거두었고 잦은 국가공역 동원에 불만이 많았던 당시 민심을 부추겼던 것이다. 그 결과,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열 지파를 규합하여 북이스라엘로 독립 분리하였다. 그리고 북쪽 사람들이 예배를 위하여 남유대 예루살렘으로의 출입을 불안히 여기고 못 마땅하게 여긴 끝에 북이스라엘의 벧엘과 단에다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거기서 예배를 드리게 하였다. 그 예배처에 설치한 금송아지를 가리켜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고 하였다. 시내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것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우리 신이라’ 했던 이스라엘, 사마리아인들의 예배처에는 그때의 시내 산 금송아지와 똑같이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가 선 것이다.
그러니 그 산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로 적합하지 않았다. 따라서 적절한 예배처로서 그리심 산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예수는 여인에게 ‘그리심 산이 틀렸고 예루살렘의 시온 산이 맞다’라고 해야 했다. 하지만 예수는 무엇이라고 대답했던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요4:21) 그리심 산도 아니고 시온 산도 아니라면 어디라는 말인가? 적어도 예루살렘의 예배는 하나님이 지정해 준 공식 예배였다. 그러나 그 예배는 사실, 진짜 제물이자 제사장인 예수로서 이루어질 구원의 상징 퍼포먼스였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예배를 통한 은혜의 필연성을 깨닫지 못했다. 아니, 추구하지도 않았다. 단지 자신들의 이어온 종교 행위를 믿고 의지하며 ‘자기 의’를 쌓고만 있었다. 그러면서 자기들을 위한 다윗 왕국을 재건을 가져다줄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메시아를 예배하며 대망하고 있었다. 예수는 그런 예배도 아니라는 것, 여인에게 한 그 대답은 구약적 예배 선언이었다.
3. 이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수의 대답은 이제 예배는 장소나 방법에 의해 드려 지는 것이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짐의 선포였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지니라.' (요4:23-24) 여기 ‘신령과 진정’이라는 말에서 ‘신령’이라는 원어 ‘프뉴마’는 ‘성령’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진정’이란 말의 원어 ‘알레떼이아’는 ‘진리, 실체, 본질’이라는 뜻이다. 우리말 개역성경이 ‘알레떼이아’를 ‘진정‘으로 번역을 하였기에 사람들은 통상 예배는 ’신심어린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드려야 한다‘는 권고 정도로 이해하여 왔었다. 그러나 원어의 뜻을 제대로 알면 이 구절이 예배에 대한 진지한 태도나 마음가짐을 권고하는 구절이 아님응 알 수 있다.
‘알레떼이아’는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 ‘실체와 본질’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단어였다. 그림자나 상징, 예표와 반대적 의미로 성경에서도 그 뜻으로 쓰인 것이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요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요6:32)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요15:1) 그 외 다른 여러 곳에서 ‘선지자, 왕, 생명수’등에 쓰였으니 이 ‘알레떼이아’는 구약에서 땅의 것으로 예표 되었던 그림자의 실체, 그 본질이 드러날 것이기에 이제 예표적 예배가 사라진다는 의미이다. 구약의 제사에서 제사장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을 제단 앞에 세웠었다. 그리고 속죄를 원하는 죄인의 머리와 그 제물의 몸에 양손을 얹고 죄인의 죄를 그 제물에게 전가시키는 의식을 행하였다. 그리고 제물을 죽임으로써 죄인의 죄가 그 제물로 속해졌다.
이는 우리의 죄를 위해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질 예수, 그를 모형한 것이요 하늘과 땅 사이의 유일 중보자적 제사장 사역을 예표함이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 여인 앞에 그 실체이신 예수가 서 있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이제는 그림자가 아닌 실체로 예배를 드려라‘고 말한 것이다.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히9:23-25)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는 자기 피를 들고 성소나 지성소 정도가 아닌 하늘로 들어갔다. 그 예수 안에 우리들이 들어 있다. 그것이 오늘 우리의 영적 실체이다. 그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를 지성소로 만들었다. 이제 우리가 성전인 것이다.
결론
그렇다면 우리의 매일, 일상적 삶이 예배이다. 영적으로는 이미 천국에 들어가 지성소가 된 우리들이기에 지금의 삶에서 장차의 천국을 경험한다.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어린양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진 예수, 그의 성품과 순결한 삶으로 우리 역시 매일의 삶으로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지고 있다. ‘알레떼이아’ 즉 ‘실체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실체인 예수를 제물로 바친다는 뜻이기 때무이다. 다만, 그 제물 됨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 내 능력과 업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그가 이루어 가신다. 신령과 진정으로의 예배란 그런 것이다. 그러니 쫄지 말자.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4: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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