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5. 6. 12:47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단12:1~4)
요한 계시록은 직접 하늘에서 어떤 일이 있는지를 기록하여 이 땅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설명해 준다.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어떤 관점에서 보았는가가 다를 뿐, 결국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습니다' 그 계시의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그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에 관한 증거였다. 이를 복음이라 하는데 예수와 그의 삶 자체가 복음의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예수의 삶은 광야에서의 교회 삶이었다. 교회는 바로 우리들이다. 그러니 예수가 우리 삶을 살다 간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교회는 예수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는 우리의 삶 자체가 복음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1. 그림자와 실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어찌 그리 멀리 계셔서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나의 간구를 듣지 아니하십니까? 그러나 나는 사람도 아닌 벌레요 사람들의 조롱거리, 백성의 멸시거리일 뿐입니다. 나를 보는 사람은 누구나 나를 빗대어서 조롱하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면서 비아냥댑니다. ‘그가 주에게 그토록 의지하였다면 주가 그를 구하여 주겠지. 그가 그토록 주의 마음에 들었다면 주가 그를 건져 주겠지’ 합니다. ~ 나의 기력이 옹기처럼 말라 버렸고 나의 혀가 입천장에 붙어 있으니 주께서 나를 흙 속에서 죽도록 내버려 두셨기 때문입니다. 개들이 나를 둘러싸고 악한 일을 저지르는 무리가 나를 에워싸 내 손과 발을 찔렀습니다. 뼈마디 하나하나가 다 셀 수 있을 만큼 앙상하게 드러났으며 원수들이 나를 끊임없이 노려봅니다. 나의 겉옷을 원수들이 나누어 가지고 나의 속옷도 제비를 뽑아서 나누어 가집니다. 그러나 나의 주님, 멀리하지 말아 주십시오. 나의 힘이신 주님, 어서 빨리 나를 도와주십시오.'(시22편) 다윗의 시인데 마치 예수의 생애를 읽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
시편의 다른 부분에서도 볼 수 있다. '주님은 마음 상한 사람에게 가까이 계시고 영혼이 짓밟힌 사람을 구원해 주신다. 의로운 사람에게는 고난이 많지만 주께서는 그 모든 고난에서 그를 건져 주신다. 뼈마디 하나하나 모두 지켜 주시니 어느 것 하나도 부러지지 않는다. 악인은 그 악함 때문에 끝내 죽음을 맞고 의인을 미워하는 사람은 반드시 마땅한 벌을 받을 것이다.' (시34:18-21) 분명 이 시들은 다윗의 이야기인데 누구의 삶과 똑같은가? 예수 그리스도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삶을 앞서 다윗이 미리 살아낸 것이다. 그 삶을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났던가? '온 세계가 주님을 기억하고 주께로 올 것이며 이 세상 모든 민족이 주님을 경배할 것이다. 나라는 주님의 것, 주님은 만국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다.'(시22:27-28, 31) 성경이 다윗의 삶과 예수의 삶을 이렇듯 똑같이 기록해 놓음은 우리의 삶에 복음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의 삶이 나타나야 할 당위성을 이야기한다.
내 삶에 그 예수의 삶이 재현되고 있는지, 복음의 내용으로 살아내고 있는지,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확인해야 한다. 예수처럼 도덕이나 윤리적으로 완벽한 삶을 살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아낼 수 없다. 아니 불가능하다. 혹시라도 그럴 수 있었다면 하나님이신 그 예수가 직접 인간으로 와서 죽을 필요도 없었다. 그러면 성경이 요구하는 삶, 복음이 명령하는 삶은 어떤 삶인가? 자기를 죽여 원수를 살려내는 그리스도적 삶의 원리를 이해하는 삶이다. 그 과정에서 실패하고 실수하더라도 그런 삶을 추구하는 방향성, 삶의 자세가 사는 현장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 조차도 스스로는 불가능하다. 죄로 오염된 우리들로서는 그렇게 살 수 없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를 해야 한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를 그 방향성의 자리로 이끌어 갈 것이다.
2 반드시 될 일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읽는 자는 단수이고 듣는 자들은 복수이다. 당시는 성경이 흔하지 않았기에 회당에서 한 사람이 읽고 여러 사람이 들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 자는 한 사람이었고 듣는 자들과 거기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복이 있는 자들’이란 단지 읽고 듣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지키는 인생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러분은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고 그저 듣기만 하여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약1:22)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치 않는 자들은 자신을 속이는 자이다. 이렇게 성경 말씀을 읽고 믿는 우리에게는 요구되는 책임과 의무가 있다. 아니 당연히 나타나게 될 삶이 있다. 그것은 예수의 삶이고 그 삶이 복음이다. 그 계시의 일들은 예수로서 악한 세력이 망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이 되는 일이다.
이 계시록이 기록된 때는 이미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그의 사역을 완성한 후였음에도 왜 이미 이루어진 일이라 하지 않고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 기록했을까? '비밀을 알려 주시는 분은 오직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뿐이십니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 임금님께 앞으로 일어날 일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임금님의 꿈, 곧 임금님께서 침대에 누워 있을 때에 머리속에 나타난 환상은 이러합니다. 임금님이 잠자리에 드셔서 앞날의 일을 생각하고 계실 때에 비밀을 밝히시는 분께서 임금님께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단2:28-29) 대왕의 꿈을 다니엘이 해석하는 내용이다. 대왕이 꿈속에서 큰 신상을 보았다. 머리는 금, 팔과 가슴은 은, 나머지는 철과 흙으로 되어 있는 신상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삽으로 뜨인 돌이 날아와 그 신상을 산상조각을 냈다. 그 뜨인 돌은 예수를 상징한다. 마지막 때에 악을 멸망시키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것을 왕에게 보여 준 것이다. BC 605년 전투에서 승리한 바벨론이 유대인들을 포로로 잡아갈 때 다니엘도 잡혀 갔었다. 그때가 예수 출현 600년 전, 그러니 당연히 그 일은 장차 될 장래 일이라 말한 것이다.
그후에 예수가 왔고 그 일이 이루어졌다. 계시록에서도 유다지파의 사자가 이겼고 그가 교회시대의 인을 뗄 자로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장로들 가운데서 하나가 나에게 ‘울지 마십시오.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였으니 그가 이 일곱 봉인을 떼고 이 두루마리를 펼 수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계5:5) 그 책의 인이 어떤 인이었나? ‘그 때에 너의 백성을 지키는 위대한 천사장 미가엘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나라가 생긴 뒤로 그 때까지 없던 어려운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 그 책에 기록된 너의 백성은 모두 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땅 속 티끌 가운데서 잠자는 사람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이 깨어날 것이다. 그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은 수치와 함께 영원히 모욕을 받을 것이다. 지혜 있는 사람은 하늘의 밝은 빛처럼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한 사람은 별처럼 영원히 빛날 것이다. 그러나 너 다니엘아, 너는 마지막 때까지 이 말씀을 은밀히 간직하고 이 책을 봉하여 두라. 많은 사람이 이러한 지식을 얻으려고 왔다 갔다 할 것이다.‘ (단12:1-4)
3. 속히 될 일
그 인은 예언된 마지막 때가 이르기까지 봉함하여 두라고 한 그 인이다. 그런데 예수가 십자가로 이겼고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인 교회가 탄생되었으니 교회의 이 땅 삶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 과정이 적힌 책, 그 책의 인이 떼어진 것이다. 요한은 환상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았다. 이미 그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도 보았다. 악의 세력이 불 못에 던져진 것도 보았다. 그 일은 다니엘서의 예언대로 분명 이루어졌다. 하지만 우리 눈에 보이는, 가시적 하나님 나라는 아직 오지 않았다. 다만 그 일은 영적으로 이미 이루어졌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시작한 일이니 가시적으로도 실패 없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에서 요한은 그렇게 말했다. 아직 보이지는 않지만 예수가 이미 시작하였으니 그 일은 ‘반드시 속히 될 일이다’ 라고 믿음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믿음과 확신은 베드로도 마찬가지였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벧전4:7) 더 쉬운 설명으로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조롱하는 자들이 나타나서 자기들 욕망대로 살면서 여러분을 조롱하여 말하기를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약속이 어디에 있느냐? 조상들이 잠든 뒤로 만물은 처음 창조 때로부터 그냥 그대로다’ 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늘이 오랜 옛날부터 있다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서 물로 형성되었다는 것과 또 물로 그때의 세계가 홍수에 잠겨서 망해 버렸다는 사실을 그들이 일부러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있는 하늘과 땅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은 경건하지 못한 자들이 심판을 받아서 멸망을 당할 때까지만 보존되었다가 불타 없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만은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 같이 올 것입니다. 그 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녹아 버리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일은 드러날 것입니다.' (벧후3:3-10)
오늘날 말세에도 사람들은 노아 때처럼 말한다. ‘언제 비가 오냐? 비가 온다는데 왜 백 년이 지났는데도 비가 안 오냐?’ 또는 ‘정말 예수가 재림하고 종말이 올까?’ ‘언제 오냐?’ 이렇게 조롱하고 있고 또 비아냥댄다. 그런데 노아 때 비가 왔다. 다만 120년 후에 왔다.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했으면 그 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하나님의 시간에서 기간은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하고자 한 일은 반드시 일어나고 이미 시작된 일은 더 분명하게 끝을 향하고있다. 이런 것을 가리켜 ‘속히 될 일’이라 하였다. 이 표현은 시간적인 면을 강조함이 아니다. 그 나라 완성의 필연성과 확실성을 강조한 말이다. 우리는 그 소망으로 산다. 그래서 매 순간 내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에 대하여, 사람에 대하여, 그리고 허락된 나의 시간과 기회들을 소중하게 여긴다. 물론 그렇게 사는 것이 쉽지 않다. 손해를 보기도 하고 답답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분명 힘든 삶이다. 하지만 끝까지 이겨내야 할 것은 그날이 반드시, 그리고 속히, 아니 느닷없이 오기 때문이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계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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